올 한 해를 되돌아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보다는 내 역할인 엄마에 충실하려고 애썼다.
책을 출간 후 작가로서의 활동보다는 본캐인 엄마에 최선을 다해보고자 노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본성이 책임감이 있는 사람인가 보다.
올해 큰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나 스스로 많은 브레이크를 걸었다. 주변 고등학교를 보낸 엄마들이 했던 말들을 되새기며 최대한 나의 행동반경을 좁히며 내 계발에 제동을 걸었다.
입학 전부터 "예비고등학생"이라는 타이틀이 부담스러웠다. 아이를 데리고 교복을 맞추러 다니면서 마치 내가 다시 교복을 입은 사람처럼 설레었고, 이상할 만큼 강직해져 있었다. 아이의 시간이 시작되는 순간, 나의 시간도 함께 출발선에 선 것만 같았다.
2025학년도부터 전면시행되는 "고교학점제" 설명회를 중 3 때부터 미리 찾아다녔다. 미리 알아두면 뭐라도 아이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다. 엄마라면 정보가 빨라야 하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무조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줘야 한다는 착각 속에서 나는 부모의 자리에서 점점 더 앞서 나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이가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열리는 고교학점제 설명회(4주 과정)도 자원해서 이수할 정도로 유난스럽게 열심히 공부했다. 마치 수험생처럼.
아이는 그런 나를 보며 종종 말했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라며 말을 아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뭐가 있는 듯이 아이는 과묵했다.
그 말을 몇 번이나 들었을까. 아이의 낮은 목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내 일을 해나갔다. 다만 지필공부에 수행 준비에, 하루하루를 동동거리며 버티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먼저 조급해졌다. 아이가 힘들어 보일수록, 나는 더 많은 것을 대신해주고 싶어졌다. 그 심정이 어디 나만의 것이었을까. 아마도 대한민국의 많은 엄마들이 비슷한 마음으로 하루를 견디고 있을 것이다.
나는 큰소리쳤다. 고등학생이 되면 대한민국에만 있다는 ‘라이딩’을 내가 맡겠다고. 하지만 돌아보니 그것은 아이를 위한 다짐이라기보다, 나 자신에게 씌운 역할에 가까웠다. 잘 해내는 엄마이고 싶다는 마음, 뒤처지지 않는 부모이고 싶다는 욕심이었다.
아이는 유명한 학원이 아니어도, 동네 학원만 다녀도 자기 몫을 해낼 수 있는 아이였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나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아이를 돕고 싶다면서, 실은 내 자랑거리에 아이를 포장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 생각 앞에서 나는 오래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사랑은 더 해주는 일이 아니라, 믿어주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체감했다.
아이를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며 기다려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배웠다.
돌이켜보면 나는 아이와 나 사이의 거리를 자꾸 좁히려 했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안도감이 필요해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에게 필요한 건, 나와 같아지는 일이 아니라 자기 속도로 걸어갈 수 있는 여백이었다.
사람은 참 어리석다. 직접 겪어보고 나서야 그것이 단맛인지 쓴맛인지 알게 된다. 경험을 해야만 내려놓을 수 있고, 넘어져봐야 손을 놓을 줄 알게 된다.
올 한 해를 돌아보며 엄마로서의 내 마음도 그렇게 정리되고 있다. 개정된 고교학점제라는 말이 방송이나 언론에서 나올 때마다 나는 괜히 귀를 기울여서 날을 세워 마음에 힘을 주곤 했다. 너무 열정적인 엄마의 노력으로, 헛발질만 일삼았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뒤늦게 따라왔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을, 이 나이가 되어서야 실감한 셈이다.
지금도 수시로 바뀌는 교육제도 앞에서 골머리를 앓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흐름이 사교육 시장을 더 들끓게 만드는 건 아닌지, 과연 아이들을 위한 방향이 맞는지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래야 먹고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현실도 알지만, 그럼에도 이건 아닌 것 같다는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한 발 물러서 보기로 했다.
아이의 인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해 보기로 했다. 대신 살아주려 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믿어주는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 실천해야 했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나는 또 한 번 배운다.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를 바라보며, 나 역시 조금 늦게 자라는 중이다. 아이와 엄마는 함께 자라나고 성장한다는 말이 그냥 있는 말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