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덕숭산 495.2m
덕장은 자신을 높이 일으켜 세우지 않는다. 듣고, 기다리고, 소통하기만 할 뿐. 하나 용장도 지장도 언제나 어눌하고도 나직이, 그러나 드넓은 평야에 솟은 하나의 섬처럼 뚜렷하고도 단호하게 드높은 정신의 칼날을 가는 그 덕의 저력에 스스로 무릎을 꿇는다. 495m는 우리가 올라야 할 높이가 아니다. 높은 산은 깊고, 토중석(土中石)이 드러난 돌보다 훨씬 강하다.
내포는 조용히 들끓고 있었다. 내포(內浦)가 그랬고, 그 내포(內包)도 그랬다. 언제나처럼 어눌하고도 나직이, 그러나 드넓은 평야에 솟은 하나의 섬처럼 뚜렷하고도 단호하게.
삽교천과 무한천이 서해 아산만으로 흘러들며 만들어낸 예당평야와 이를 둘러싼 고만고만한 높이의 산들, 서해안고속도로를 따라가며 바라보이는 지루한 풍경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 같은 충청도 촌로의 사투리처럼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정신의 먹이를 찾아 산을 오른다’라고 시인은 말하지 않았던가. 그의 말이 맞는다면, 우리가 해발 495m의 덕숭산에서 찾아 맛볼 높이는 결코 자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닐 터.
산자분수령의 원리에 따르면 불규칙하게 솟은 평야의 산들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다. 안성 칠장산에서 갈라져 나온 금북정맥 줄기가 봉수산을 거쳐 내포에 이르러 솟구친 것이 덕숭산이다.
당신들이 덕숭산을 찾는 이유, 그중 적어도 절반은 수덕사 때문일 것이다. 행여 덕숭산은 몰라도 수덕사라는 이름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설령 수덕사에 가보지 않았더라도,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는 알 것이다. 1966년 김문응이 짓고 한동훈이 곡을 붙여 송춘희가 부른 이 노래는 당시 방송 가요프로그램에서 수차례 상위 랭킹에 올랐다 하는데, 지난 2000년 수덕사 앞에는 송춘희 노래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헌데, 의기양양 세운 기념비는 정작 수덕사 선방의 비구니들에 의해 3일 만에 무너져 내렸다.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하는 유행가 가사는 뭇 중생들에게 먹혀들었을지 모르나, 용맹정진 선방에 틀어박힌 납자들에겐 한갓 혼돈의 업보 한 장 더 얹는 일이었나 보다.
수덕사로부터 나타나는 이런 외골수 기질이 왜 이중환이 <택리지>를 통해 ‘충남에서 가장 살만한 땅’이라 추켜세웠던 내포에서 전해져 오는 것일까. 배가 부르면 정신이란 희미해지기 마련일 텐데. 수덕사 입구 주차장은 기형적으로 넓었다. 절이 욕심이 큰 탓이려니, 동네사람들에게까지 꼬박꼬박 주차료를 받아내는 관리들이 얄미워 휙 차를 돌려 나와 버렸다. 그때까지 덕숭산은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과 충의사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군 장교가 대통령이 되자 독립운동가를 위한 충의사를 지었고, 기념관은 표를 끊은 사람만 입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곳을 돌아 나오며, 사진을 찍던 기자는 의사가 마지막으로 지녔던 피 뭍은 손수건을 보곤 코끝이 찡해졌노라고 털어놨다. 예산에서 나고 자란 의사가 25세의 나이로 산화할 때까지 생을 찬찬히 곱씹어 보며, 단지 그것이 정권의 존재조건을 채우기 위한 대의의 포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조금 누그러들기 시작했다.
철권으로 적을 부수려 뜨거운 가슴으로 압록강을 건넜던 젊은 사내.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그의 고향, 섬 속의 섬 도중도(島中島) 뒤편으로 덕숭산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도 땅 팔아 독립운동했던 사람들의 자손은 여전히 땅 파먹고 살고 있지. ‘사내가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 매헌은 한마디로 일갈하고 있었다.
이어진 발길은 남연군묘로 거슬러 갔다. 조선말, 흥선대원군의 야심이 묻힌 그곳은 천혜를 입은 명당이라 했다. 연꽃 봉우리 속에 볼록 솟은 산 하나, 봉분은 자그마했고 오르는 길은 탄탄했으나 돌보는 이 없는지 잡풀들만 무성했다.
흥선군 이하응은 ‘2대째 왕이 나는 땅’이라는 말을 듣고 아버지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겼다. 묏자리에 있던 가야사엔 불을 지르고, 서있던 돌부처는 그 꼴이 보기 싫어 얼굴을 돌렸다고 했다. 그리고 고종이 나고, 순종이 나고,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무덤을 파헤치고, 철통봉쇄 문을 걸어 잠근 조선은 상여에 실려 사라졌다.
연천에서 이곳까지 이장해 왔다는 상여 하나 덩그러니 묘 앞에, 그것도 복제품이 유리에 가려 놓여있었다. 덕숭산은 다시 부연 안갯속에 숨어버렸다.
‘의좋은 형제’는 예당저수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는 중이다. 댐이 아니라 저수지 이름 붙은 물 중에 가장 규모가 크다는 이곳을 보니 길가에 어죽집이 그토록 많았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빌자면, 조선시대 살았던 이성만․이순 형제는 ‘모두 지극한 효자로서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도 성만은 어머니 묘소를 지키고 순은 아버지 묘소를 지켰다. 아침에는 형이 아우집으로 가고, 저녁에는 아우가 형의 집을 찾았으며 한 가지 음식이 생겨도 서로 만나지 않으면 먹지 않을’ 정도였다.
구수한 어죽 끓는 냄새 솔솔 풍기고, 밤새도록 서로의 곳간에 쌀가마니 옮겨다 놓느라 고생했으니, 형님먼저 아우먼저. 예당저수지에서 흘러나간 물은 덕숭산에서 발원한 물과 만나 삽교천을 이룬다. 손잡고 나아가는 물은 후덕하게 예당평야를 적시고 아산만으로 흘러든다.
추사 선생은 어찌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예산읍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졸한 그의 집이 있다. 건축양식이 어찌 되는지는 몰라도, 53칸짜리 이 집을 짓기 위해 충청도 53개 고을에서 한 칸씩 부조를 받고 한양에서 나라의 건축을 맡아하는 목수를 불러와 지었다 하니, 기가 찰 일이다. 인간의 생이 그러하듯, 세파의 끝에 추사가 결국 들어가 누운 집은 세한도에 나오는 단칸 움막이 아니었던가.
매표소에서는 세한도 인쇄품 한 장에 5천 원. 수덕사에서는 대웅전 부처님 알현하는데 2천 원.
만공(滿空)이 혀를 끌끌 찬다. 덕숭산 중턱에서 만난 만공탑은 “그러하니 풀밭 속에도 부처가 있노라”라고 선승의 화두 하나 던지는 것 같다. 충남도청이 들어올 예정이라는 산 아랫말엔 외지에서 온 꾼들만 부산할 뿐, 이제 뙤약볕에 그저 내버려 두어도 그만일 푸른 벼들만 농한기의 망중한을 즐기며 황금의 가을 들녘을 준비하고 있다.
산은 낮다. 그러나 몸을 낮춘 산은 언제나 드높은 정신세계를 향하며, 어느 침봉보다도 매서운 지향점을 품고 있다. 그래서 이 더운 날 늘어지는 몸과 마음에, 죽비를 내려치고 또 치는 키 작은 산으로 향한다. 걸음은 느리고, 발자국은 선명하다.
20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