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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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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준 Jun 20. 2024

지리산 떠날 재주도 없고

지리산 사진가 임소혁

   

하동이라기에 화개장터만 생각했다. 그런데 산의 이쪽 편과 저쪽 편, 아예 드는 볕이 달라 지리산 자락이라 하기에도 뭣한 그곳에 그는 살고 있었다. 약속장소인 소류지에 무성한 연꽃들을 보며 ‘오죽 벼농사가 별 볼일 없으면 농업용수로 연을 키울까, 사람 하나 찾지 않는 마을에’라 생각하는 사이, 지리산이라는 이름에 늘 뒤따르는 사진작가 임소혁 씨가 나타났다. 마을의 중심부에서는 한참을 들어간 계곡가에 그가 사는 집이 있었다. 두해 전 빈집을 얻어 이것저것 손보며 가꿨다는 그곳에서, 내온 커피를 마시러 잔을 드는 그의 손가락을 훔쳐봤다. 짧고 굵은 것이 영락없는 클라이머의 그것이었다.      




산 사진을 찍어오면 돈으로 바꿔주겠다

“처음부터 산에 가서 사진 찍는 걸 좋아했어요. 주봉에 올라가서 카메라 펼쳐놓고 노숙하며 하루 종일 기다리기도 하고.”


고령산악회 회원으로 산에 입문한 그는 1979년 매킨리 등반을 가기 위해 잘 나가던 회사를 때려치울 정도로 클라이밍에 미쳐있던 시절이 있었다. 산에 갈 적마다 늘 배낭에 카메라를 빼놓지 않고 챙기던 그를 프로의 세계로 이끈 사람은 산 선배이자 사진 선배 안승일 씨였다. 


“선배가 사진을 찍어오면 돈으로 바꿔주겠다고 했어요. 어차피 산을 좋아하니 전국의 산봉우리만 다 찍어 와도 돈이 될 거라고. 그래서 명산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자고 생각하고 길을 떠났죠.”


그렇게 첫 번째로 간 곳이 월출산이었다. 향로봉 발치에 텐트를 치고 천황봉을 찍었다. 마침 비 그친 뒤라 운해가 넘쳐났고, 며칠 동안 씨름한 끝에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얻었다. 그런데 정상부에 있던 군부대에서는 낯선 방문객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서울에 왔다가 다시 월출산으로 갔는데 군인들이 사진을 찍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에이 지리산이나 가자하고 산을 내려와 구례로 갔죠. 필름이 많이 남아서 다 쓰고 갈 생각이었거든요.”


그런데, 이 우연한 산행이 그를 평생 지리산에서 살게 한 계기가 되었다. 


“반야봉에 올라가니 운해가 넘실대는 거예요. 신나서 찍으며 하루를 거기서 잤는데 다음 날도 같은 풍경이 펼쳐졌어요. 이후 비가 오기에 세석까지 가서 산장에서 백도 캔 하나를 끓여 먹고 있는데, 카메라 장비를 본 누가 ‘아저씨 저 위에 운해가 넘쳐요’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가스를 헤치고 촛대봉에 올라가 보니 또 운해가 찰랑찰랑. 그렇게 가진 필름을 다 찍고 서울에 와서 현상해 보니, 아, 지리산에 또 가야겠더군요.”


그는 “덫에 걸렸다”라고 말했다. 또 지리산엘 가니, 이제 거길 빠져나올 재주가 없게 됐다고. 세석에서 몇 날 며칠을 텐트생활을 하다 보니, 이제 산장을 지키던 토박이들도 차츰 마음을 열게 되었고, 늘 거기 있으나 또한 새로웠던 지리산은 젊은 사진가의 마음을 산에 묶어두게 했다. 그런데 달라진 것도 있었다. 그가 처음 사진을 찍고자 했던 그 목적, 전국의 모든 봉우리들을 찍어 팔겠다는 이른바 ‘피크 헌팅’에서 이제 지리산만 파고들어 이 화두를 사진으로 풀어보겠다는 ‘등로주의’로 마음이 바뀐 것이다. 


“산을 올라도 늘 새로운 길을 찾아서 다녔습니다. 등산로가 아니라 짐승의 길로만 말이죠. 그래서 산에서 사람을 만날 일도 별로 없었어요.”


말바위, 독바위, 합수골…. 그는 지리산에 좀 가봤다 하는 사람에게도 생소하기만 할 지명들을 짚어가며 이야기를 끌어갔다.      


피크 헌팅에서 등로주의로의 변환점지리산

“사진은 곧 기다림이죠. 왕시루봉에서 17년을 지냈는데, 거기 살려고 올라갈 때도 스스로 한 가지 약속을 했어요. 아침엔 해 뜨는 자리에 있어야 하고, 저녁엔 해 지는 자리에 깨어있어야 한다고요. 산에 살면서 사진에 위배되는 것은 안 했어요. 라면을 하나 끓여 먹어도 사진을 찍기 위해서 먹는 거라고, 그래서 술도 안 먹고…. 어쩌다 만나는 사람들이 길을 물어봐도 한 번만 알려주지 두 번 세 번은 대답을 안 했어요. 내 사진과는 무관한 행위라고 생각했거든요.”


요즘도 종종 몸에 두드러기가 나는데 그게 전에 산에서 먹었던 상한 음식들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하는 사진가 임소혁. 먹을 게 떨어져도 필름이 떨어지기 전에는 산을 내려오지 않던, 그래서 산을 오를 땐 마음이 급해 지나치고 산을 내려올 땐 필름이 없어 한 번도 지리산 자락의 사찰은 찍지 못했다는. 당연히 사진에 효과를 주는 필터를 쓰지 않을뿐더러 여태껏 선글라스도 써본 적 없다. 자연의 색을 늘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자연을 취해서 보는 것이 싫어 사진 찍기 전에는 술도 마시지 않았다. 자신이 세운 일정한 경계, 그 화두. 거기에 닿기 위해서는 결사를 멈추지 않았던 청교도 같은 삶을 두고, 불가에선 계(戒)라고 한다던가. 옹고집이라고 한다던가. 이로 인해 그가 겪었던 일화들 또한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이었다. 


“노고단에 방송 안테나 기지가 있는데, 제가 맨날 그 앞에서 사진을 찍으니까 이 사람들이 공단에다가 신고를 한 겁니다. 웬 사람이 매일 불법야영을 한다고요. 그런데, 나는 아직 원추리가 덜 피어서 더 찍어야 한다고 버텼어요. 결국 나중엔 제 뜻대로 됐죠.” 


하지만 한편으론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세상과 늘 충돌해야만 했던 삶의 상흔도 있었다. 


“처음에 곡성에 폐교를 빌려 지리산 갤러리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와서 한다는 말이 왜 지리산이 여기에 있느냐는 거예요. 궁여지책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했지만, 늘 마음 한쪽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그만큼 잘 꾸며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어요. 그런데 결국 지자체에서 도움을 받기 위해선 군수나 면장이 바뀔 때마다 찾아가 시시덕거리고, 기웃거려야 하고, 그래야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이내 거길 떠났죠.”


이후 그는 산청으로 와 지자체의 도움을 얻어 중산리 버스 종점 앞에 다시 지리산 갤러리를 열었다. 그런데 관광버스를 타고 오는 등산객들은 산에서 내려와 마시는 막걸리에나 관심이 있을 뿐 늘 허름했던 그의 갤러리 문을 열고 들어오지는 않았다. 임소혁 씨는 당시를 두고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라고 말했다. 


“창문으로 내다보면 황금능선이 보였어요. 그래서 구름도 찍곤 하다가 결국 아무도 찾지 않는 속에 문을 걸어 잠그고 산으로 가는 날들이 늘어났죠. 그런데 이번엔 동네 사람들이 탐탁지 않게 여긴 겁니다.”


어쨌든 토박이들은 외지에서 온 사진가의 존재를 인정하기 싫었던 것인지, 그는 갤러리 뒤에 자라던, 누군가 비료를 주며 키워왔다는 감나무에 열린 감을 몇 개 따먹은 죄로 사람들과의 골이 깊어져 다시 산 곁을 떠나야만 했다.    


“지리산과 일평생을 보냈잖아요. 그런데 왜 나는 지리산 사람들과는 어울리질 못했을까, 나로서는 흠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자리 잡은 곳이 지금 살고 있는, 지리산이되 지리산 같지 않은 이곳이었다. 집을 가꾸며 틈틈이 마당에 돌을 깔고, 가구를 맞추고, 잔디를 심어온 그는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았는데, 그래서 여기선 좀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이제 서울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젊을 적에는 꼭 아무도 못 찾아오는 저 꼭대기에만 살아야 하는 것 같았어요. 개 두 마리 데리고. 중산리에 살 때만 해도 더 올라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제 위험을 무릅쓸 나이가 아니잖아요. 과용을 해서 높은 곳에 올라갈 것이 아니라,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역광 인생’ 세상과의 충돌을 넘어

풍경사진의 기본은 역광이다.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 거기서 산의 윤곽과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지기에 산을 찍는 사진가는 태양이 눈부시다고 등을 돌리고 설 수가 없다. 장마를 살아내야만 가을을 맞고, 설경을 얻으며, 만개한 봄의 향연을 기다릴 수 있으니까. 그렇게 살아온 한평생이었다. 


“여기 사니까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어요. 그래서 더 좋아요. 이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나에게 할애하려고요. 이제 일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아침에 눈뜨자마자 돈과 씨름하는, 그런 인생에 대해 이제 잊었어요. 올해 고추 200주를 심었어요. 보통 50근 따면 성공이라는데 우리 집은 80근이나 나왔어요. 파니까 70만 원 벌이가 되더라고요. 어떨 땐 사진 한두 장 팔면 되는 돈인데 싶으면서도, 그러길 싫어서 농사짓는 거죠. 전에 사진 찍는 노 선배가 그러더군요. 비로소 눈이 트이니 몸이 말을 안 듣더라고. 아직 눈이 트인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지리산을 떠날 재주도 없고요.” 


문득 20여 년 전 새해 첫날, 눈이 많이 내렸던 흐린 겨울 속 길을 잃고 올랐던 첫 번째 지리산행이 떠올랐다. 반야봉에 쳐 있던 노란색 퀀셋 텐트, 그리고 그 앞에 꽂혀있던 빨간 피켈. 그때 길을 묻는 나에게 퉁명스러운 대답을 던졌던 한 사내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어쩌면 나는 휘몰아치는 설연 속에 몰입해 있던 그 사내의 ‘사진에의 복무’를 방해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제 머리가 희끗해가는 어느 사진가의 작업실에 놓인 낡은 피켈에서 다시, 확인한 것이었다.             

2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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