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봉당 해종 스님과 수행자의 육바라밀
닭목령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했다. 결국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길을 따르니 그가 그려준 약도보다도 훨씬 많은 시간을 길에서 허비해야만 했다. 후회가 들었다. 역시 기계는 믿을 게 못된다. 하나 매번 속으면서도 그걸 미리 깨닫지 못하는 게 중생이라. 어쨌든 모든 물질문명은 나보다 지혜로우며 바른 길을 인도할 것이라 사람들은 믿는다. 어쩌면 그래서 세상은 늘 아수라다.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 곰자리 토굴. 백두대간이 머리 위를 스치듯 지나는 그곳은 영봉당 해종스님이 25년 넘게 살고 있는 보금자리다. 사람들은 토굴(土窟)이라 하면 동굴을 연상하지만 그저 흙으로 지은 집이다. 지난 1992년 네팔 안나푸르나 4봉(7525m)을 오르며 일약 산악계에 이름이 알려진 그는 이미 이른 겨울이 찾아온 그곳에서 여전히 시린 공기에 둘러싸여 있었다.
수행자의 누더기 속엔 자유가 있더라
“배고파 죽는 줄 알았네. 왜 이렇게 늦었어?”
점심 무렵 도착한다 호언을 했는데 이미 시간은 두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스님이 내온 밥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방이 따뜻해 벌레가 많으니 섞이지 않게 알아서 잘 먹으란다. 반찬은 북엇국과 배추김치 총각김치 갓김치 풋고추에 된장이다. 당신 어제도 술 마셨지? 기자들이란 매일 술 먹는 일이 잦을 테니 해장하라고 북엇국 끓였다고 했다. 방 안을 살핀다. 나는 왜 선방에 텔레비전이나 낡은 라디오라도 하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을까.
“심심하지 않으십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여기 새도 있고 나무도 있고 바람도 있고 벌레도 있는데 뭐가 심심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배고픈 자에겐 먹을 것만 보인다. 제일 심심한 자가 텔레비전을 찾는 거다. 궁금한 것들을 챙겨 와야 했으나, 처음부터 따져 묻고 싶지도 않았다. 고요한 호수에 던진 돌멩이 같은 질문에 물 흐르듯 스님의 법석은 끝없이 펼쳐졌다.
“스님은 왜 스님이 되셨나요?”
본래 독실한 크리스천 집안의 장남이었다. 17세 되던 해 우연히 한 스님을 만났는데, 스님이 되면 뭐가 좋습니까 물으니 평생을 자유롭게 살고 평생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 듣고 3일 만에 해인사로 들어가 입산했다. 부모가 나를 낳고 어떤 기도를 가장 많이 할까. 건강, 출세보다 가장 인간답게 사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승려가 된다는 건 삭발과 염의에 갇히는 일이 아니라 보다 큰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권력자의 옷 속엔 업이, 수행자의 누더기 속엔 자유가 있다고 스님은 덧붙였다.
“그럼 히말라야에는 왜 가셨나요?”
수행을 하며 3년은 만행(卍行)을 하려고 했다. 지금이야 3년이면 지구를 한 바퀴 돌겠지만 그때만 해도 세상은 드넓어 갈 곳을 정해야만 했다. 첫 목적지는 일본이었다. 햄버거 집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공사판에서 벽돌을 나르며 틈틈이 경비를 모아 89년 봄 그 품 안에 뛰어들지 않고서는 못 견딜 것 같던 히말라야로 갔다. 칼라파타르(5643m)를 오르다 죽을 듯한 고소증에 시달렸으나 정상에 서자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제야 알았다. 속았구나. 고소에 속았구나. 로부체에 앉아서 눕체 로체 로체샤르 남벽에 지는 화려한 석양과 그 뒤에 숨은 듯 솟은 우주 만물의 어머니, 검은 사가르마타를 보며 지혜보다는 덕이구나, 덕은 늘 물러나 있구나, 수백 권 책을 읽는 것보다 저 산의 덕을 깨달아야겠구나 생각했다. 히말라야는 보는 곳이 아니라 부딪치는 곳이라 생각이 들었다. 오르다 죽어도 피아(皮我)가 죽지 자아(自我)가 죽나.
스님은 수행자의 육바라밀이 히말라야에 있다고 했다. 첫째가 보시, 베푼다는 뜻이다. 고소캠프에서 알파미로 공양을 해도 셰르파나 대원이나 똑같이 먹으니 평등공양이요, 무얼 해도 했다는 관념 없이 무의식 속에 행동하게 되니 정신을 바치는 것이다. 카라반 중엔 주민에게 무엇 하나라도 줄 마음이 드니 그 또한 보시요, 산은 내 모든 걸 바칠 수 있는 곳이라. 둘째는 지계, 룰을 지킨다는 뜻이다. 히말라야에서는 연기도 못 피운다. 산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삭발과 염의에 갇힌 지계가 아니라 산 정신과 합일되는 정신적인 아주 큰 계를 그곳에선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셋째는 인욕, 참는다는 뜻이다. 고소에서 걸음을 옮기면 욕이 튀어나온다. 육체와 정신의 고통이 극에 달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자기를 진정으로 다스리는 것이 곧 인욕이다. 넷째는 선정, 무념무상이라는 뜻이다. 무념무상 속에서 산과 내가 하나가 된다. 그게 안 되면 등반은 이미 접어야 한다. 다섯째는 정진, 나아간다는 것이다. 멈추지 않고 끝없이 걷지 않으면 정상은 없다. 비단 걷는 것뿐이랴. 여섯째는 지혜라. 산을 오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구와 공부를 해야 하는가. 한 줄기 바람에서 날씨를 예측하는 것은 지식만으로는 될 일이 아니다. 맑은 정신으로 내면의 궁금증과 끝없이 싸워야 한다. 한 발이 만보, 일념이 만념이 되도록 진중해야 하는 곳이 히말라야니라. 스님은 선방에서 하는 수행은 극한 상황이 아니더라, 처절한 내면과의 싸움을 하고 싶더라 말했다.
“정상에 서면 무얼 하십니까?”
깃발 들고 사진 찍지 이놈아. 고독이 닥쳐오더라. 절대고독과 절대평화가 동시에 오더라. 극(極)이더라, 일반인들은 죽음이 닥쳤을 때 자식과 처가 생각난다는데, 아무 인연도 없는 나는 오히려 편안하더라. 몇 번이나 절벽에서 몸을 던질까 했었다. 그러면 이 지루한 화두도 끊어질 텐데. 고독과 자유는 같이 오지 않더라. 나는 무언가 궁금한 것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듯했으나 정작 밖으로는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스님은 등산화 끈을 묶으며 오가피 밭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나섰다.
탁발은 공짜가 아닌 법, 히말라야 보시산행을 떠난다
어림잡아 1만 주는 되어 보이는 오가피나무들은 검은 열매들이 실하게 영글어 있었다. 스님은 오가피를 길러 약을 달여 한 해 동안 쌀 한 포대라도 신세 졌던 사람들에게 갚는다고 했다. 탁발은 절대 가만히 앉아 공짜로 얻어먹는 게 아니라고 스님은 말했다. 히말라야에 가고 싶을 때에도 오가피나 산약초를 뜯어다 부처님께 올리면 신기하게도 그게 딱 필요한 경비만큼 돌아온다고 했다.
“스님은 염불은 안 하십니까?”
사람들은 목탁치고 소리를 내야 염불 하는 줄 아는데, 그게 다 멋 부리는 일이니라. 염불은 부처를 생각한다는 말이다, 진정한 가치는 그 생각에 있다. 기도해 달라고 사람들이 돈 들고 찾아오면, 네가 해라 기도. 자기 기도 자기가 해야지 왜 남한테 돈 주고 시키냐고 한다. 물질이 풍요로우면 부패하게 돼 있는 게 사람이다. 언젠가 승려들 모이는 자리에서 자동차 없는 사람 손들어보라고 하니 나 혼자 뿐이었다. 선방에 누군가 찾아올 때 소나타보다 비싼 차 타고 오면 해머로 내리친다. 비단 불교뿐 아니라 모두 더 청빈하고 겸손해야 한다. 사상과 종교는 성직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권력이 깊어지는 시대일수록 가난과 겸손은 더 빛나기 마련이다. 영봉당의 눈은 빛났다.
곰자리 토굴의 부처님은 1년에 딱 한번 사월초파일에만 대중의 얼굴을 본다. 스님은 지난 5월 토굴을 개방하며 들어온 시주금 400만 원에 오가피를 가꾸어 판 돈을 보태 1만 달러를 마련했다. 산에 오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돈은 모두 태국 미얀마 국경의 난민촌 어린이들에게 돌아갔다. 한국 돈 1만 원의 가치는 그 아이들이 한 달 동안 먹고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양이다.
지난겨울 카트만두에 문 연 세종한국문화와 언어교육원도 스님의 그런 뜻이 담겨있다. 네팔사람들을 상대로 무료로 한국어 교육과 한국 문화, 컴퓨터 등을 알려주는 교육이 이미 두 차례 열렸다. 20여 년 히말라야를 다니는 동안 맨발의 포터였던 아버지와 다시 맨발의 포터로 살아가는 젊은 아들을 보며, 그들의 갈라진 발바닥의 세습은 무지에서 비롯되는 거라고 영봉당은 느꼈다. 배우는 것은 본인의 몫이더라도 세상이 그 기회마저 박탈할 수는 없다. 그래서 무학위자, 빈곤자, 무직자를 우선으로 한글을 가르쳐주고 한국 문화를 알려주고 컴퓨터 교육을 통해 뭔가 다른 세계를 찾아갈 수 있는 눈을 틔워 주려 한다고 그는 말했다. 다시 겨울학기가 시작되나 자원봉사 선생님이 부족해 강단에 서야 한다는 그는, 책이든 연필이든 돈이든 사람들의 나눔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히말라야 사람들이 장작을 연료로 사용하며 정글이 급속도로 파괴되는 것을 보곤 온돌학교를 열 계획도 세웠다. 열을 90퍼센트 이상 활용하는 우리의 온돌방 구조를 알려주면 가지치기나 간벌, 낙엽만을 가지고도 훨씬 더 따뜻한 밤을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숲도 건강해지고 사람도 건강해지는 것, 그런 히말라야 사람과 자연의 문제들에 공헌했을 때 산악인들의 영역도 더 넓어질 것이며 또한 산을 아끼는 사람들의 의무가 아니냐고 그는 되레 내게 물었다.
오르니 깨달았습니까, 과연 부처가 설산에 있습디까 묻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허공의 메아리였는지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괴로웠다. 스님은 줄곧 침묵했으나 이미 삶으로 그 해답을 살고 있었으므로. 언제든 곰자리 토굴을 다시 찾아오라고 했으나, 며칠 뒤 그는 히말라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