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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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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준 Jun 10. 2024

그 섬의 ‘바보’를 따라간 하루

반핵의 선봉에서 고산의 알피니스트로 살다 간 박주훈

태안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안면도와 육지를 잇는 유일한 다리, 연륙교를 지나며 눈발은 더욱 거세졌다. 차들은 언덕을 넘으며 제 힘을 쓰지 못했다. 그날도 눈이 내렸다. 박주훈이 히말라야 로체샤르의 3000m 아래 절벽으로 사라져 가던 2003년 10월 5일, 기자는 그 산과 마주한 촐라체 북벽에 매달려 그의 부고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고향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던 사상 초유의 반핵운동이 승리했던 1990년 11월 10일에도 그 섬에 첫눈이 내렸다고, 박주훈을 기억하는 안면도 사람들은 바로 어제의 일처럼 이야기했다.   

박주훈(1968~2003)이 만년설에 묻힌 지 10년, 안면도의 핵폐기장 개발 계획이 이제 사람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져 가고 태안해변의 기름때가 씻겨가듯, 그의 이름 또한 썰물처럼 져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기자는 태안을 찾았다. 

산악계에서 박주훈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는 많지 않다. 그가 산에 다녔던 날들이란 불과 6~7년 남짓. 기자는 그가 처음 선인봉을 찾았던 날 설우길에서 함께 줄을 묶었던 기억이 있다. 아직은 ‘초짜’였던 박주훈은 모든 게 서툴기는 했지만 몸은 날렵해 선배들로부터 단박에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얼마 뒤 청화산악회와 서울시산악조난구조대에 들어가 대원으로 활동하며 국내외의 산들을 헤집고 다녔다. 에베레스트에 다녀온 박주훈을 다시 구곡폭포에서 만났을 때, 그는 이제 기량이 아닌 경험으로 산을 오르는 한 사람의 알피니스트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과거에 대해 입 밖에 내질 않았다.      


안면도 반핵항쟁의 중심에 서 있던 박주훈

1990년 11월 8일의 안면도 반핵항쟁은 환경운동계에서는 세계적으로도 전무후무한 ‘승리의 역사’로 꼽힌다. 지역 주민들의 힘으로 단 3일 만에 정부 정책을 백지화했으며, 그전과 이후로도 이런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포화상태에 이른 핵폐기물 처리에 고심하던 정부는 몇몇 곳들을 핵폐기장 후보로 선정하고 그 첫째로 안면도를 발표했다. 1989년 안면도를 국민관광지화하겠다는 정부의 발표와는 전혀 상반되는 이 소식에 섬마을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했다. 관광지가 되면 외지인들도 더 많이 찾아와 사람들의 삶이 더 풍요로워질 것이라는 희망이며, 대덕연구단지에 이은 과학연구단지를 지을 것이라는 말이 돌며 은밀히 정부에서 땅을 매입하던 것이 모두 거짓이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당시 1만 8천여 명이던 안면도 주민 중 1만 7천여 명이 거리로 나섰다. 어린아이와 노인을 제외하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 모두가 한 목소리로 고향을 지키고자 일어선 것이다. ‘제2의 광주항쟁’이라는 수사와 함께 불릴 정도로 지역주민들의 참여가 가장 많았던 투쟁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박주훈이라는 스물세 살의 청년이 있었다. 

안면도에서도 가장 남쪽, 태안군 고남면 장곡리 장삼포 해수욕장 인근이 박주훈의 고향이다. 이날 예비군 훈련을 받기 위해 낡은 프라이드 승용차를 몰고 서울에서 고향을 찾았던 박주훈은 훗날 자신의 삶과 고향의 모습을 바꿔놓을 엄청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던지게 된다.      


환경운동의 전무후무한 역사로 불리는 ‘11.8 항쟁

박주훈의 행적을 쫒기 위해 먼저 찾은 곳은 지역신문인 <태안신문>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신문웅 편집국장으로부터 몇 가지 중요한 정보들과 함께 지금 태안의 현실을 들을 수 있었다.  

“11.8 항쟁 때 나왔던 ‘안면공화국’이라는 말도 박주훈 씨가 처음 생각해 낸 것이라고 하지요. 차라리 핵폐기장이 안 들어오는 대신 중앙정부의 지원을 못 받아도 섬에서 그들끼리 사는 게 낫다는 생각까지 했으니까요. 그렇게 한 마음으로 단결이 잘 되던 사람들이었지만, 2007년 기름유출사고 이후 민심이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사고 이전의 50%밖엔 회복이 안 됐다고 보고 있죠. 그전 연간 2천만 명이 다녀갔는데 2013년 방문자가 1천만 명 수준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방제를 위해 국립공원 내 보호구역에 뚫었던 임도가 지금은 태안해안길로 거듭나 이나마 관광객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완전히 이미지가 회복되려면 앞으로 10년은 더 내다보고 있고, 때문에 관광과 수산업이 주업인 지역 주민들로서는 가계경제의 축소가 결국 공동체의 붕괴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다들 삶이 궁핍해지니 마음도 각박해지곤 하는 거죠.”

사람들은 그날 안면도의 일을 ‘11.8 항쟁’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박주훈과 함께 ‘11.8’의 주역이었던 최규만 당시 고남면투쟁위원장과 ‘설진’이라는 법명을 쓰던 최일권 씨가 지난해 각각 위암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20주년을 기념해 세우려던 기념탑도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는 소식도 함께. 신문웅 국장으로부터 박주훈의 영결식 때 그렇게 슬피 울더라는 한 사람의 소재를 받곤 취재팀은 눈 내리는 연륙교를 넘었다. 신 국장은 아마, 그가 가장 절친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길이 260여 미터의 왕복 2차선 다리로 육지와 연결되는 안면도는 전국에서 6번째로 면적이 넓은 섬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래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섬이 아닌 곶이었다. 하지만 바닷길을 이용해 호남지방에서 올라오는 곡식들이 거센 파도에 수장되는 일이 잦자 조선 인조 때 안면곶의 좁은 목을 잘라 수로를 내 지름길을 만들며 안면도는 섬이 된다. 연륙교 아래의 바다는 어쩌면 우리나라 최초의 운하인 셈이다. 이로 인해 바닷길은 200리가 단축되었지만 순식간에 섬사람이 된 주민들의 불편은 커지고 섬과 육지를 잇는 다리는 사람들의 숙원이 되었다. 결국 1966년 안면도 주민들은 스스로 바다를 막아보겠다며 나서 돌을 등에 지고 물막이 공사를 진행했지만 거센 조류 탓에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연륙교는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1977년 마을 주민들이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해 풍어제를 공연, 대통령상을 받자 당시 도지사가 주민들에게 “소원을 말해보라”라고 했고, 주민들은 연륙교 건설을 이야기해 3천만 원을 지원, 1982년 비로소 다리가 놓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읍내로 들어서 박주훈의 친구가 일한다는 모 은행에서부터 취재팀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외근 중이라 오늘 안에 보기 힘들다는 대답이었다. 결국 무작정 박주훈의 고향마을로 찾아가 보는 수밖에 없었다. 고남면으로 가는 언덕에는 박주훈 추모비가 서 있었다. ‘물처럼 맑은 영혼과 불처럼 뜨거운 가슴으로 이 세상에서 잠시 바람처럼 머물고 간 사람’이라는 게 그의 이름을 설명하는 수사였다. 언덕엔 짠 바다내음이 물씬 풍겨왔다. 

고남면사무소 직원들은 박주훈을 알지 못했다. 다만, 부면장과의 면담에서 그의 고향마을 이장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당시 장례식은 면민장으로 치러졌지만, 이후로 고인에 대한 추모행사는 별도로 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다시 장삼포로 차를 몰았다. 장곡 3리 한석순 이장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93 가구가 모여 사는 장곡 3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업과 어업으로 살아가는 작은 어촌마을이었다.      


사람들의 가슴엔 여전히 그가 살아있었다

“주훈이는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남한테 뒤지길 싫어하고, 또 늘 어려운 일에 앞장서던 사람이었죠. 핵폐기장 반대할 때 목숨을 걸고 뛰었어요. 당시 도지사가 심대평이고, 과기부 장관이 정근모였습니다. 쟁쟁한 사람들과 맞선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한석순 씨는 평소 박주훈의 이타주의적 성격이 히말라야에서도 똑같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당시 황선덕이 주춤하고 뒤로 밀리니까 주훈이가 도와주러 따라 올라가다가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고, 이 뒤에 선산에 무덤이 있는데 유품만 묻었어요. 꽃다운 나이에, 그래도 반핵운동 한 게 국가에 공익이 된 일이라고 저희는 생각하죠. 히말라야에서 죽었단 말 듣고 청년회를 조직해서 면민장으로 장례를 치러줬죠. 핵폐기장 반대 당시 우리는 어떤 보상을 바라고 한 게 아니에요. 보상도 폐기장에서 3~4km 반경만 해준다고 했죠. 단지 대대손손 살아오던 땅에서 그대로 살아가기를 바랐던 거죠. 주훈이는 일부 주민들 사이에서 찬성과 반대로 갈등이 심화될 때 ‘내가 죽어도 사수하고 죽겠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끌어 모았어요. 최규만이나 최일권과는 죽기 전까지도 의형제처럼 지냈어요. 결국 셋 다 죽었지만. 그래서 세 사람 비석이라도 한데 모아서 영혼이라도 모여서 소주 한잔 했으면 하는 게 바람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 박주훈의 부모가 아직 살아있다는 생가로 향했다. 부친 박갑순 씨는 마을에서 염전을 운영하는 한편 인근 중학교에 국어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던 선생님이었다고 했다.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생활을 하며, 마을에서는 인텔리로 존경받는 분이라는 것이 한석순 씨가 해준 말이었다. 박갑순 씨는 항쟁 당시 ‘5.16 현대장 사건’으로 맞아들 박주훈이 구속되자 지도부를 찾아와 “나에겐 아들이 하나 더 있으니 데려다 쓰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또한 만날 수 없었다. 마침 마을 어른들끼리 모여 관광 갈 일이 있어 거기 따라나섰다는 것이었다. 마을 중심에서 한참이나 외떨어져 있는 박주훈의 집은 아담했으며, 그 앞엔 이제는 문을 닫은 염전 터에 무성한 해초들만이 얼어붙어 있었다. 취재팀은 다시 발길을 돌려 다음 약속인 변광인 안면도항쟁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찾아갔다. 변 씨는 당시 안면도반대투쟁위에서 대변인 역할을 했었다. 

“핵폐기장 반대할 때 만난 인연 말고는, 사실 다들 생업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박주훈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습니다. 최규만 위원장과는 한 몸처럼 다녔다는 것 정도요. 그런데도 고인이 대단하다고 느끼는 건, 이곳 안면도가 원래 NGO 활동이 발달했던 곳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의식도 깨어있다고 보긴 어려운 상태죠. 11.8 항쟁을 통해 안면도가 폐기장에서 제외되는 선언을 얻어내기는 했지만, 사실 싸움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어요. 정부에서 지역주민 간의 갈등을 유발해 조직을 와해하고자 했기 때문이죠. 당시 고남면 사람들 중엔 찬성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나중에 양심선언을 통해 그 찬성표들이 매수되고 조작된 것이라는 게 밝혀지긴 했지만, 어쨌든 그런 와중에도 주훈이는 지역에서 조직을 갖추는 데에 끝까지 노력하고 또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그만큼 고인이 평소 생활을 열심히 했다는 반증이죠. 박주훈은 환경이나 반핵에 대한 의식보다는 그저 고향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현대장 사건’ 때에도 몸을 아끼지 않고 뛰어들었죠.”

파출소를 불태우고 관공서를 점거한 끝에 연륙교를 폭파하고 총을 들자는 계획이 나왔을 만큼 치열했던 1990년 11월 8일의 시위를 통해 이틀 만에 정부의 백지화 발표가 나왔지만, 안면도 사람들은 이후 2005년 경주 방폐장 건설이 확정되기 전까지 여전히 가슴 졸이는 날들을 보내야 했다. 특히 백지화 발표 이후에도 뒤로는 계속 마을 주민들을 회유해 핵폐기장 건설이 추진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밝혀낸 사람이 바로 박주훈이었다. 1993년 5월 16일, 서산의 ‘현대장’이라는 여관에 머물며 주민들의 동태를 파악해 오던 공무원들의 방을 급습, 폐기장 유치에 찬성한 사람들의 연명부와 원자력환경연구센터의 핵폐기장유치 관련 서류를 압수해 언론에 공개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찬성 연명부에 등재된 사람들이 매번 접대와 뒷돈을 받았으며, 명단에는 갓 100일 지난 아이나 이미 사망한 사람들까지 포함돼 있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며 정부 정책은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당시 폭력과 고성이 오가기도 했던 탓에 박주훈은 바로 다음날 자수와 함께 구속되고 함께 했던 사람들 또한 기소됐다.

“그 이후에 주훈이가 산 사람이 되고, 자기 앞에 놓인 길을 걸어갔다는 게 기특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가 역할을 했던 만큼 지금의 안면도가 풍요로워졌는지, 주민들이 박주훈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2010년 20주년 행사를 하고 나서 이듬해 충남도에서 1억 원을 받아 기념탑도 만들고, 우리 역사를 지역의 상징, 안면도를 환경운동의 메카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들은 말이지만, 주훈이가 석방되고 나서도 고향에 자주 오고, 다른 형태로의 주민운동을 계속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늘 그 필요성에 대해 주장했답니다.

어떻게 보면 2003년 주훈의 사고로 인해 그의 이름을 헛되이 하지 말자는 생각들이 다시 살아난 것이 이런 사업들의 시작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를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건 제2의 박주훈을 이어나갈 사람들이 지역에 더 많아져야 하고 의식이 그만큼 성장해야 하는 문제인 거죠.”

변광인 사무국장에게 소개받아 찾아간 다음 장소는 작은 꽃집이었다. 박주훈의 장례식 때 조화를 담당했다는, 그의 초등학교 후배의 집이었다. 하지만 그는 “선배라서 나는 잘 모르고 친구들을 소개해주겠다”며 다시 이상범 씨를 소개해주었다. 시끄러운 기계음 너머로 들려온 이 씨의 목소리는, 서산에서 일을 하고 있어 퇴근 후에야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차를 몰아 서산시 대산읍에 도착하자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안면도의 타잔’ 히말라야에서 사라지다

“주훈이요? 고집이 세죠. 의리 빼면 시체고, 성질은 있어요. 삐쩍 말라서, 수영도 잘하고 달리기, 야구도 좋아하고….”

돼지국밥집에서 작업복 차림으로 만난 이상범 씨는 술잔을 털어 넣으며 느릿한 충청도 말씨로 잠시 기억의 저편에 머물러있던 친구 박주훈을 불러냈다. 한잔 두 잔 취기가 오를수록 선명해지는, 그런 기억이었다. 박주훈과는 같은 곳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까지 같이 다녔던 둘도 없는 친구라고 했다. 

“맞아요. 새벽 2~3시에도 보자고 하면 바로 나왔으니까, 의리는 대단했죠.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주훈이가 친구들에게 5만 원씩 걷자고 해서 설날 마을 경로당에 맥주 한 박스씩 보내드리고, 초등학교 후배들 졸업할 땐 공책 한 권씩 돌렸어요. 폐교될 땐 마지막이니까 10만 원씩 걷어서 두 권씩 돌리고 두 아이에겐 장학금도 줬죠. 그게 스물세 살 때입니다. 그런 게 의리죠. 바보죠. 너무 착하니까 단순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뭐든 ‘그려~’ 하고 다 믿어버려요. 속이 없죠. 우리가 농담으로 말해도 다 믿어버리니까. 순진한 섬놈이죠. 그런데 11.8 항쟁이 국가와 싸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긴 전쟁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 정도로 주훈이는 마음먹으면 해야 되는 성격이었어요. 주훈이네 집안은 본래 부농이었대요. 들은 말로는, 큰아버지가 6.25 때 월북을 했고, 그런 이유로 연좌제 때문인지 나라에 뺏긴 게 많아 집안에 반골 기질이 생겼다고 하기도 하고요.”

기자는 박주훈이 산을 만나게 된 경로가 궁금했다. 

“안면도에는 다람쥐가 안 살아요. 어릴 때 주훈이가 부모님 따라 오서산에 있는 절에 다녀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다람쥐 봤다고 자랑하곤 했죠. 그런데 주훈이가 그렇게 산에 미치게 된 데에는 계기가 있었어요. 서울생활을 다시 시작하며 통나무집 짓는 법을 배우겠다고 설악산 아래 통나무학교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암벽을 오르고 있는 사람들을 본 겁니다. 그리곤 바로 거기 미쳐버렸죠. 그 딸이 초등학교 때 암벽대회에 나간다고 저보고 구경 오라 해서 보러 간 적도 있어요.”

“히말라야에 가기 전에 고향에 내려와 소주 한잔 하면서, 주훈이가 로체샤르 사진을 보여주며 여기가 내가 갈 산이라고 했죠. 그 얼마 전에 주훈의 매형이 똑같이 산을 오르다가 사고를 당했었어요. 유독 느낌이 안 좋아서, 주훈아 이번엔 안 가면 안 되냐고 말렸는데,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 이번만 다녀오고 안 간다고, 마지막이라고 하고 갔어요.”

“TV에서 보고 알았죠. 설마 했는데, 방송 나오고 곧 전화가 오더라고요. 장례식도 엄청났어요. 마을 사람들이 면사무소에서부터 상여를 메고 갔으니까. 그 뒤로 매년 청화산악회 사람들이 기일마다 오더라고요. 처음에 몇 년이면 잊히고 안 올 것 같았는데, 정말 매년 왔어요. 주훈이 부모님들이 고마워하죠. 기자 양반, 이거 제목을 달거들랑 안면도 타잔이 히말라야에서 사라졌다고 써 주쇼.” 

플랜트 현장에서 고공작업일을 하고 있는 이상범 씨는 박주훈이 출소 뒤 잠시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며 작업복 주머니에 있던 건축용 수평계를 꺼내 들었다. 

“주훈이가 용접 일을 잘했어요. 그래서 ‘너네는 판사, 검사, 의사, 나는 용접사다!’ 그러곤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죠. 어느 날은 이 수평계를 똑바로 놓고 그럽디다. ‘친구야,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돼’라고.”

박주훈의 두 친구는 오늘 같은 날은 마셔야 한다며 여전히 눈발 흩날리는 소읍의 골목으로 사라졌다. 눈은 녹을 줄 알면서도 여전히 바보같이 내리고 있었다. 하나 사람들의 기억 속에 쌓인 눈은 결코 녹지 않는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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