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명산을 가다-파주 감악산
연일 푸근한 날씨 탓에 군데군데 유빙이 떠다닐 것이라 기대했던 임진강은 여전히 꽁꽁 얼어있다. 마침 입춘이라 했는데도, 강의 저쪽은 여전히 민통선. 산 중턱쯤에서 바라보이는 북녘 땅은 공제선의 잿빛 띠에 가려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찍지 마세요. 아저씨, 찍지 마세요!”
초병은 카메라를 들고 깔깔대며 포즈를 잡는, 말도 안 통하는 중국 관광객들에게 손사래를 치며 울상을 짓고 있다. 철책 너머에 흐르는 것은 그저 임진강일 뿐인데도, 그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같은 아우성을 겪어야 할 것 같다. 서울역에서 출발한 열차가 임진강역을 지나 도라산역까지 운행하며 평일에 이곳을 찾는 외국 관광객들이 꽤 된다는 것이 역무원의 설명이었다.
분단이 아니었다면, 열차는 신의주를 지나 시베리아 벌판을 내달리고 있을 것이다. 허나 광장 한 귀퉁이에 재현된 낡은 증기기관차는 여전히 얼어붙은 임진강 같다. 고작 뒤에 매달린 녹슨 객차에서 배어나는 ‘철마돈까스정식’ 냄새에 놀이기구를 타고 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 뿐. 심장이 터지게 내쳐 달려야 할 바퀴달린 것들이 맥박조차 없이 제자리에 머무르고 있는 풍경은 그래서 답답하고 처량하다. ‘여기까지 오는데 50년’ 자유의 다리에 새긴 동판이 선명한 가운데 임진강으로 부는 봄바람은 얼음장을 만나 다시 시린 김을 뿜어내고 있다.
경기도 파주시, 양주시, 연천군. 한북정맥 끄트머리가 임진강으로 꼬부라져 들어간 변두리쯤. 쉽게 설명하자면 서부전선의 최전방에 걸쳐있는 감악산(紺岳山․674.9m)이 사람들에게 개방된 것은 불과 1980년대 말이다. 그래서 근현대에 들어서는 군사시설물이 촘촘히 박힌 작전지역의 한 야산에 불과했을지도 모를 터, 감악산에 올라본 사람이라면 이제와 돋을새김으로 이야기하는 ‘경기 5악’이라는 수식에 석연치 않은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그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보다도 훨씬 전의, 이제는 재조차 남아있지 않은 영광을 억지로 끄집어내려는 몸부림 같다고 느끼는 건 지나친 예단일까.
감악산이 옛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멀리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간다. <삼국사기>에 ‘검고 푸른 빛이 배어난다’는 뜻의 감악이라는 말이 처음 나오는데, 그때부터 조선시대까지 나라에서는 별기은(別祈恩)이라는 제사를 감악산에서 지내왔다. 어떤 이유에선지는 모르나, 감악산은 이후로 무속신앙에서 중요시되는 신산(神山)이 되어왔고, 민간에서도 봄․가을로 산에 올라 굿을 하며 신이 사는 산으로 믿어왔다.
신이 사는 산, 사람들은 산신을 맞는 굿을 하는 것을 두고 ‘산을 쓴다’고 말했는데, 산을 쓰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믿어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는 큰 행사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지금도 여전히 양주지역의 무속인들은 감악산 산신을 주신으로 모시며, 얼마 전까지 민간에서도 정화수를 떠놓고 치성을 드릴 때 집안의 신과 감악산 산신을 위한 물을 따로 떠놓고 지냈다고 하니 산은 ‘그저 솟은 것’ 이상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감악산이 지역의 신산으로 자리 잡은 데는 파주와 양주 일대가 예로부터 사람이 살기 적당한 땅으로 지금의 경기 북부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온 영향이 크다. 한탄강과 임진강 일대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왔다. 연천군 전곡리 선사유적지와 주변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고인돌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데, 적어도 농경사회의 시작 이전에 채집과 수렵생활을 하던 인간이 모여 살았다는 것은 자연 환경이 그만큼 풍요로웠다는 반증이다.
딱히 넓은 평야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고만고만한 산이 솟은 가운데 가장 높은 감악산은 예부터 사람들에게 신성시되어왔다. 하지만 인간이 무엇을 신으로 섬기려고 한데는 그만큼 의지하고 살아가고픈 고단한 무엇이 있었을 테다. 삼국시대부터 임진강을 경계로 한 감악산 주변은 고구려와 신라의 분쟁이 끊이지 않는 치열한 격전지였기 때문은 아닐까. 기록된 역사 그 이전을 보더라도, 땅이 풍요로웠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로 미루어보건대 평화로운 날만큼 피 흘리는 날도 많았다고 미루어 볼 수 있다. 산이 곧 신이 된 것은 인간의 불안한 삶을 기댈 무엇이 필요했으며, 옛 사람들은 그것을 자연에서 찾은 것이다.
감악산 정상에는 유래를 알 수 없는 몰자비(沒字碑)가 있다. 외형으로 미루어 학계에서는 ‘감악산신라고비(紺岳山新羅古碑)’라 부르지만 전해 내려오는 말은 빗돌대왕비, 설인귀사적비, 진흥왕순수비로 다양하다. 진흥왕순수비라는 의견은 북한산 비봉에 있는 비와 생김새가 비슷해 최근에 제시된 의견으로, 민간에 내려오는 이야기는 설인귀를 추모하는 내용이 적힌 비라는 것이 더 유력하다.
설인귀는 중국 용문에서 태어난 당나라의 장수로 알려져 있지만 본래 고구려인으로 중국에 귀화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보장왕4년(645)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할 때 공을 세워 당나라의 유격장군으로 발탁되었다고 하는데, 그가 침략자라면 왜 우리나라 산에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 비석이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
그동안 조사된 전설에 따르면 설인귀는 적성면 주월리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감악산 발치인 설마치고개와 설마천 일대에는 설인귀와 관련한 전설이 많이 남아있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뛰어나 세도가의 묏자리를 일구며 아름드리나무를 무 뽑듯 했다는 이야기나, 집채만 한 바위덩어리를 공깃돌로 가지고 놀았다는 등 그를 신격화하는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온다. 파주시에서 연구한 자료에는 그가 을지문덕 수하에 있던 장수로 살수대첩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후일 을지문덕의 미움을 사 중국으로 귀화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관직에 있는 사람이 감악산을 지날 때 말이 움직이지 않아 내린 후 비석을 향해 절을 해야 했다는 이야기나, 근대들어 정상에 군부대를 만들며 산 아래로 비석을 옮겨왔을 때는 부대에서 사고가 자주 일어나 비석을 다시 원래 자리에 옮겨놓으니 그런 일이 없어졌다는 말은 쉽게 흘려들을 만한 것이 아니다.
어쨌든 무엇이 진실이던 간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민중의 역사에 그의 존재가 굵게 새겨져있다는 것은, 감악산 정상을 임꺽정봉이라 부르며 의적의 이름을 자랑스레 기억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산을 통해 바라는 무엇이 분명히 있던 것이 아닐까.
감악산에 대한 이런 민간신앙뿐 아니라 국가에서도 이 지역은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신라는 임진강 일대를 차지한 553년 이후부터 계속 별기은을 지내왔는데, 이후에도 고구려의 침공은 집요하게 이어져 임진강 일대는 늘 긴장감이 흐르는 전방이었다. 자국의 승리와 사기 진작을 위해서라도 감악산을 신령한 산으로 추켜세우는 일은 필요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 천오백년이나 흐른 지금까지 감악산 곳곳에 팽팽한 긴장이 남아있어야 하는 것은 어떤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아픔만으로 산을 대하기에 파주와 양주뜰은 너무나 풍성하다. 역사에 기록된 인물만 보더라도 오늘날 파주라는 이름을 있게 한 파평윤씨의 고향인 것을 비롯해, 황희, 이율곡, 윤관, 허준 등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걸출한 인물들이 감악산을 바라보고 살아왔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런 흔적이란 맑은 날 감악산에 올라 내려다보이는 것에 대부분 묻혀버려 법륜사에서 오를 때면 늘 고개는 왼쪽으로 돌고, 산정에 어색하게 서있는 시멘트 성모 마리아상도 발치에 품고 있는 것은 항상 북녘의 바람이라는 것. 당장 산에 올라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눈앞에 두고도 달려가지 못하는 답답함뿐이라면 산은 내려와야 하는 것이 맞는 게 아닐까.
마침 월요일이라 임진강역에 정차한 열차는 도라산역으로는 출발하지 않는다고 했다. 열차가 다시 서울로 되돌아 간 선로에서 북쪽으로 난 철길을 넘겨본다. 자유의 다리 너머로 가만히 몸을 낮추니 그곳엔 고향을 떠나온 이들의 흔적이 침목 하나하나마다 기름때 쌓여 묻어있다. 초병은 다시 무어라 소리 지르며 내게 손을 흔들어 가위질을 한다. 내가 바라보는 그 모습을 검고 푸른 시선의 감악산도 보고 있는 것일까. 철커덩 철커덩 커다란 녹슨 쇠바퀴 하나가 철로에 쌓인 기름때를 지우며 서서히 굴러가는 모습을.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 천둥 같은 화산(火山)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 박봉우 시 ‘휴전선’ 중에서
-2007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