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명산을 가다-월출산
남도의 들판이 푸른 일색의 팔레트로 단장하는 오월, 눈부시게 각혈하듯 타오르는 영산강. 그 강물을 먹고 솟은 섬 하나 월출(月出). 섬이라기보다는 아득히 망망한 대지에 솟은 한 점 꽃망울…. 여전히 바람 따라 쏴아아 머리를 젖히는 푸른 보리밭.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라던 피천득의 ‘오월’을 보리싹처럼 씹으며 남도행 열차에 오른다. 넉넉히 광주를 거쳐 영암까지 닿는 데는 하루를 넘겼다. 서둘자면 낮 시간 3번 다니는 영암행 고속버스를 탈 수도 있었지만. 여전히 ‘그곳은 먼 곳’이라 생각해도 답답할 것이 없다. 5월 월출산으로 가는 길, 하루쯤 내 인생을 길 위에 흩뿌려놓아도 아까웁지 않으니까.
기적도 없이, 그렁거리는 열차의 육중한 소리가 사각의 도시를 뒤로 하고 멀어져 가자, 역시 살아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즐거운 것. 오후 무렵 출발한 열차가 남녘의 들판을 달릴 즈음이면 하늘은 빨갛게 물들 테다. 십여 년도 더 된 일이다. 월출산은. 여전히 그곳은 먼 곳이라서.
나른한 볕 사이로 일갈하는 바위산
영암(靈巖), 그네들 말투처럼 진한 햇살들이 얼굴을 비벼댄다. 햇살과 함께 온 건 때 이른 더위. 철퍼덕거리며 온몸 구석구석으로 파고드는 계절의 냄새. 은근히 달궈진 바위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남도의 늦봄. 어쩌면 월출산(809m)은 그 나른한 볕 사이로 일갈하는 하늘의 우렁찬 포효일지도.
일기예보에서는 오후 무렵부터 비가 쏟아질 것이고, 그렇지만 5mm 내외의 작은 비라 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함께 월출산을 오르기로 한 전판성 전남주재기자와 성송은(이츠아인글로벌 대표)․남철호(이츠아인 익스트림팀)씨, 밤새 서울에서 차를 달려 내려온 서성식(한국안전등산연구원 원장)씨는 오전 내 슬렁슬렁 준비를 마치고 점심 무렵이 지나서야 산 발치에 들어섰다.
전판성 기자는 영암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로 월출산이라면 손바닥 보듯 하는 지역전문가다. 그는 지난밤 서울에서 내려온 취재팀과 소주잔에 회포를 풀며 지난날 아프리카에 등산을 갔던 경험담을 맛깔나게 들려주었는데, 두 글자로 줄이자면 ‘워메~’로 요약되곤 했다.
전체 면적 56.1㎢로 전국 국립공원 중 가장 작은 월출산과 그가 보고 온 광활한 대지 아프리카. 문득 우리가 오르고 있는 산의 모습이 꼭 지평선 한가운데 단단히 웅크리고 있는 한 마리 코뿔소를 닮은 것 같다.
월출산은 관리공단에서 등산로로 개발해 놓은 곳도 천황사, 도갑사, 금릉경포대 계곡을 들머리로 하는 3곳뿐이라 어느 쪽으로 올라도 하루 산행이면 충분한 거리다. 하지만, 역시 옛말 틀리지 않은 것인가. 산의 규모와는 다르게 해발에서 꼬박 제 높이를 올라야 하는 월출산은‘809’라는 숫자를 우습게 보고 덤벼드는 사람들을 나가떨어지게 하곤 한다. 특히 천황사 쪽 들머리는 평균 경사 27도로 전국 등산로 중 가장 가파른 길로 악명 높다. 뿔처럼 솟구친 바위벼랑들의 경사가 그만큼 세기도 하지만, 등산로를 개발하며 바위 사이로 계단을 놓아 만든 길이 많은 탓이다.
입장료 폐지 이후 야영장 한편에 만들어놓은 시인마을을 지나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들었다. 천황야영장은 새로 나무데크를 깔아 가족단위로 찾아와도 그만인 듯하다. 군데군데 나무그늘 사이로 드리운 그늘은 코와 귀와 눈을 편안하게 하는 3박자를 골고루 갖추었다. 오후 시간인데도 작은 배낭을 메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많다.
얼마쯤 오르다 전판성씨가 길을 버리고 수풀을 헤치며 일행을 안내한다. 산죽밭 사이로 사람들이 잘 다닌 흔적이 없는 곳을 따라가니 너른 공터와 함께 커다란 바위 하나가 버티고 서있다.
“이곳이 월출산 바우제를 지내는 곳입니다. 제단을 삼는 용바위는 정확히 천황봉과 마주 보고 있지요.”
그의 말대로 ‘용바위’라 불리는 제단은 정상 천황봉과 일직선으로 놓여있었다. 영암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산악회인 영암산악회가 바위산인 월출산을 기릴만한 장소를 찾다가 이곳을 발견했고, 1980년 10월 30일 군민의 날을 기념해 바우제를 지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국태민안과 산악인들의 안전을 기원하며 지내기 시작했지만, 용바위에는 기복신앙의 한편으로 돈을 바위에 난 구멍에 올려놓으면 좋다는 말이 전해져 동전이 수북이 쌓이는 날이 많다고 한다.
다시 길을 따라 10여분을 오르니 한창 공사 중인 천황사 터가 나왔다. 지난 2001년 화재로 불탄 절은 포클레인을 동원해 한창 재건이 진행 중이고, 금박을 입힌 불상은 비닐로 만든 가건물 안에 연등 몇 개 달아놓고 앉아 있었다. 지난 시간 동안 이유 없이 ‘천황사’라고 불려 왔지만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절의 본 이름이 ‘사자사(師者寺)’로 밝혀졌다고 한다. 이 계곡 어디에서건 풍채를 자랑하는 사자봉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이 맞다는 것이다. 절터에서 얼마간 올라간 공터에는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사자사 목탑지가 전라남도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 이름에 얽힌 내력을 뒷받침하고 있다.
예부터 바위로 이루어진 산은 화기(火氣)가 많다고 전해오는데, 월출산도 예외는 아닌지라 천황사 화재 말고도 월출산을 대표하는 절집인 도갑사 대웅전도 신도의 실화로 불에 탄 적이 있다고 한다. 한창때는 아흔아홉 개 암자가 산 구석구석에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 이름이 알려진 월출산 절집은 이 천황사와 건너편 도갑사뿐이다.
“전에 월출산 구석구석을 돌아보다가 한 노인을 만나 폐사지를 찾는 법을 배운 적이 있어요. 돌무더기가 쌓인 곳 주변에 산죽이 많이 자라고 있으면 암자 터라고 하더군요. 스님들이 뱀이나 산짐승을 쫒기 위해 절 주변에 산죽을 심었다는 거예요. 산죽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를 동물들이 싫어하니까.”
전판성씨의 말을 듣고 보니 그저 스치며 지나던 돌무더기들이 사뭇 다른 느낌으로 보이고 아흔아홉 개 암자라는 말도 과장만은 아닌 것 같다.
새롭게 놓인 월출산 명물 구름다리
산길은 구름다리에 닿기 전 호남지역 암벽등반의 요람으로 불리는 시루봉과 매봉을 지나가게 되어있다. 마침 휴일을 맞아 시루봉에는 여러 팀이 암벽등반을 하고 있었다.
“본래 시루봉은 주능선상에 있는 시루떡같이 생긴 봉우리를 두고 불러왔는데, 이곳은 월출산에서 암벽등반을 할 정도로 산이 알려진 이후에 붙은 이름인 것 같아요. 주능선에 있는 다른 바위들도 최근에 와서 사진 찍는 사람들이 붙여 부르다 보니 그렇게 된 것도 있고….”
전판성씨는 월출산의 지명들이 예부터 내려오는 것과는 다르게 전해지는 곳이 많아 더 늦기 전에 원류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농이 늘고, 노인들이 돌아가시면 이제 영영 그런 시도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래의 무엇이 잊힌다는 것은 여하를 막론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구름다리까지는 한참 가파른 경사를 올라야 했다. 작년 봄 보수공사를 마치고 새로 개장한 이곳은 월출산을 말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명물로 1978년 처음 생겨났다. 1972년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73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고도 바위가 많은 험준한 지형 때문에 등산로가 많지 않았던 월출산은 산길 대부분이 ‘개발’되었다고 할 만큼 사람의 손을 많이 탔다. 구름다리는 그런 개발사를 대표하는 흔적인 것이다. 처음 개설될 때는 매봉을 거쳐 천황봉까지 이어지는 3단으로 설계했지만 현재의 위치에 가설하고도 등산로를 잇지 못해 한동안은 건너갔다 다시 되돌아와야 하는 곳이었다. 이후 지역산악인과 군청에서 암벽에 계단을 놓아 정상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만들었다고 한다.
작년 6월 새로 개설된 구름다리는 폭 1m, 길이 54m로 지면에서 120m 높이에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다. 가족단위로 온 사람들은 단지 이곳까지만 올라 주변을 둘러보고 내려가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았다. 발아래가 울렁울렁거리는 구름다리를 건너면 매봉 정상으로 올라 천황봉까지 쭉 계단길이 이어진다. 하지만 일행은 물을 뜨기 위해 다시 구름다리를 건너와 바람폭포로 가는 계곡길로 내려서야 했다.
급경사에 골산이라 월출산 계곡에는 물이 흐르는 날이 많지 않다. 비가 와도 금세 흘러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월출산을 둘러 계곡마다 크고 작은 저수지들이 많다. 들판 한가운데 솟은 산에서 나온 물은 농사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수가 된다.
바람폭포까지는 20여분이면 됐다. 바람이 많이 불면 폭포가 거꾸로 올라가기도 한다는 이곳은 그래서 이름도 바람골이다. 폭포 위쪽에는 예전에 작은 대피소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헐려 없고, 그 옆에 수도꼭지를 달아놓은 샘터가 있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쉬어가곤 하는 곳이다. 찬물에 탄 시원한 냉커피 한잔 들이켜고 다시 광암터로 향한다.
광암터에서 장군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올라서는 동안 장쾌한 월출산의 바위벼랑들이 펼쳐진다. 결결이 늑골처럼 솟은 사자봉 일대의 바위능선은 사뭇 이곳이 펑퍼짐한 남도의 끝자락임을 잊게 만든다.
광암터에서 정상까지 이어진 능선은 조망이 트여 장쾌하지만, 키 큰 나무가 없다는 것은 월출산 역사의 단편을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하다. 한국전쟁부터 여러 번 불탄 산은 1960년대까지 아름드리 숯을 채취해 팔던 나무꾼들의 삶터였고, 이후 새로 심은 나무들은 아직 한 아름도 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통천문. 하늘로 통하는 그 문을 지나면 천황봉이다. 천황봉이라는 이름은 으레 일제에 의해 왜곡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하지만, 월출산 천황봉은 옛 기록에도 그대로 전하는 토종이다. 천황봉은 신라 때부터 나라에서 국태민안을 빌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온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전국 대사터 3곳, 중사터 24곳, 소사터 23곳 중 유일하게 구전과 기록만이 아니라 유물이 확인된 곳이기도 하다. 지난날 월출산 정상석을 세우며 발견된 유물은 12 지신상, 흙으로 만든 향로 등 제사용품으로 이곳 정상에 제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83년 정상부근에서 샘터가 발견되어 정상에서 사람이 기거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기예보는 나름 정확했는지, 정상에 도착하고부터 짖은 구름이 몰려오더니 금세 안개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느지막이 출발했기에 천황봉이나 구정봉쯤에서 비박을 하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일찍 궂어진 날씨 탓에 이곳에 짐을 풀기로 했다.
진달래 흐드러져 안개 사이로 빛나다
“우르릉 꽝!”
바위틈에 몸을 비벼 넣고 한 방울이라도 비를 덜 맞아보려고 하지만 속수무책이다. 바로 머리 위에 떨어진 낙뢰가 발 끝에 불을 번쩍이며 지나고 나서는 뿔뿔이 흩어져 있는 일행들의 안전이 어떤지 생각할 겨를도 없다. 수십 번 불이 번쩍이다 보니 아예 달관해 놀라지도 않는다. 낙뢰 속 정상은 위험했고,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그저 마음을 다잡는 것 말고는 없었다. 자다 깨기를 반복하며 부스스해서야 겨우 눈을 붙였지만 어느새 낡은 밝아버렸다. 그 와중에도 이른 새벽 천황사를 출발한 단체등산객들이 어느새 올라와 웅성 인다.
취재팀은 서둘러 짐을 꾸려 안갯속으로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온몸은 축축해 떨려오고 젖은 배낭은 어깨를 짓누르는 여정, 막막한 구름 속의 행진, 하지만 답답하지는 않다. 오히려 오랜동안 잊고 지냈던 바위냄새 흙냄새에 대한 기억이 새롭게 살아나는 것만 같았으니까. 맑은 날이었다면 산행 전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돼지바위, 말바위, 삼장법사바위와 같은 익살스러운 모습들을 확인해 보려 애썼겠지만 오히려 시야가 가려진 가운데 보이는 것은 내 마음속의 풍경인 것이다. 천황봉에서 한참이나 급경사의 암반지대를 내려서고야 주능선에 닿았다. 사뭇 장쾌한 용마루를 상상해 본다.
“요새 들어 부쩍 꽃이 많아진 것 같아요. 그것도 꼭 기사에 적으시요.”
전판성씨는 주능선 등산로 한편에 잔뜩 이슬을 머금은 진달래를 카메라로 들여다보며 기자에게 당부한다. 그전에는 꽃 보기가 힘들었는데, 꾸준한 생태복원으로 등산로 주변에 각종 식물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이름을 아는 것이야 진달래뿐이었지만, 삭막한 바위벼랑 사이로 자란 연분홍 꽃잎들의 장관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풍경이었다.
다들 지난밤 흠뻑 젖은 탓에 본래 계획했던 도갑사 하산로를 변경해 금릉경포대로 내려가기로 했다. 금릉경포대는 구정봉 못 미쳐 바람재에서 왼쪽으로 길을 틀어야 하는 곳이다. 바람재가 가까워 올 즈음, 고도가 서서히 낮아지자 비로소 발아래가 트이며 푸른 팔레트 같은 영암벌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고생한 맛이 있네요.”
성송은 씨의 말처럼 산행이 쉬웠다면 이런 풍경을 마주할 수 있으랴. 자꾸만 구름에 가렸다 찰나 몸을 드러내는 바위 봉우리들의 수줍은 모습. 탁 터놓고 아예 처음부터 보여주었다면 감흥은 지금과 같지 않았으리라. 여전히 천황봉은 구름에 싸여 막막하지만 단지 809m의 낮은 산에서 보여주는 풍경은 이보다 더 다양하고 장엄할 수 없었다. 일행은 한참 동안이나 구정봉이 마주 보이는 바위턱에 올라 주변 사진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영암의 기원이 됐다는 동석(動石)이 있는 구정봉과 그 뒤로 켜켜이 펼쳐진 시루봉. 사진으로만 보던 억새밭은 저 너머에 있을 터. 오래도록 바람재에서 떨어지지 않던 발걸음을 느릿느릿 산 아래로 꺾는다.
어느새 콸콸 급류가 흐르는 금릉경포대 계곡은 올라온 길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지난밤 내린 비가 얼마나 많았는지 여느 이름난 큰 계곡과 다르지 않았다. 징검다리로 이어진 등산로는 한여름 큰 비가 내리면 조금 위험할 정도로 별다른 인공시설이 없었지만, 때론 발을 적셔가며 물을 건너는 하산길은 월출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아기자기한 경험이었다. 내리막으로 들어선 지 한 시간여 만에 산길의 끝이 보인다. 강진군 성전면인 이곳은 남쪽이라선지 동네 이름도 월남리, 월하리란다.
촉촉이 습기를 머금은 산 위로 언제 그랬냐는 듯 태양이 작열하기 시작한다. 이제 여름일 테다. 그리고 또 수많은 여름이 지나야 다시 월출의 용마루를 걷게 될지, 여전히 그곳은 먼 곳이라서. 못내 아쉬운 이들은 푸른 팔레트에 솟은 붉은 꽃망울 곱게 빻아 마음에 추억 하나 적어놓는다.
-2007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