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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 사람들

산의 안과 밖, 경계 없는 경계

외산(外山) 박영배 형을 기리며

by 이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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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영준




“산 안에 있으나, 산 밖에 산다.”


우이동 저잣거리에서 불콰해지면 늘 입버릇처럼 내게 하던 박영배 형의 말은, 어릴 적엔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다만 스스로 외산(外山)이라는 호를 붙여 자신을 불렀던 형은, 삶으로 그 말을 살아내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짐작을 했을 뿐이다. 나는 문득 형의 말에서 스스로를 바라보는 대자적 존재와 산이라는 즉자적 존재의 관계성에 대한 어떤 화두 같은 게 담겨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형은 늘 인수봉의 어느 그늘 아니면 우이동의 허름한 쪽탁자 앞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무슨 산악단체의 큰 행사라거나, 형이 누군가에게 어쩔 수 없는 어른 노릇을 해야 하는 자리에서는 영 찾아볼 수 없는 존재이기도 했다.


내가 영배 형을 처음 알게 된 건 선배들의 입을 통해서, 그리고 책에서였다. 설악산에 처음 갔던 그날 입을 쩍 벌리고 올려다보았던 토왕성폭과 적벽을 형이 처음 올라갔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이르기까지 잠시 어떤 행운이 따랐으며 또한 수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는 것, 박인식의 『사람의 산』을 읽으며 형이 아이거 북벽과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 젊은 날을 보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형이 여초 김응현 선생에게 서예를 사사를 받았다는 것도, 어느 날 결혼을 하여 딸 하나를 두고 있다는, 내가 서른 살이나 차이 나는 사내에게서 꼭 알아야 하지 않아도 될만한 시시콜콜한 것들도 등산잡지에서 읽게 되었다.


그러던 중 형을 만나게 된 건 내가 한국산악회에 입회하면서부터였다. 그해 겨울 설악엔 1미터 쯤 되는 폭설이 내렸고, 그날은 산악기술위원회가 동계훈련등반을 하러 가던 날이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시외버스와 7번 버스를 겨우 갈아타고, 소공원에서부터 비선대 산장까지 한참을 러셀을 하고 나서 자정이 넘어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거기 나의 전설 박영배 형이 있었다.


형은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아우라가 있었다. “산은 즐기는 것이 아니야, 추구하는 것이지.” 다음 날 양폭산장의 끓는 구들에서 나는 결국 먼저 쓰러졌으나 이 한마디는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나의 평생을 지탱해 온 산상의 수훈이었다.


참으로 상상하기 힘든 일이겠지만, 우리는 사실 둘이서 바위도 자주 하고, 하강을 하고 내려와서 노래방도 자주 갔다. 자주까지는 아니고, 우이동 원석이네서 막걸리를 마시다 문득 흥이 오르면 그랬다. 형은 늘 ‘천년바위’라는 노래를 불렀다.




‘삶은 무엇인가요/부질없는 욕심으로/살아야만 하나/이제는 아무것도 그리워 말자/생각을 하지 말자/세월이 오가는 길목에 서서/천년바위 되리라’




형이 우이동 봉황각 뒤로 이사 오던 날, 나는 기술위원 황영순 형과 그 집에 도배를 하러 갔었다. 거긴 토왕성폭을 오르고 이은상 회장에게서 받은 기념패와 그날 토왕성폭 정상에 서던 장면을 찍은 사진 하나, 그리고 ‘외산’이라 쓰인 족자가 하나 걸려있었다. 그날 수고했다고 형은 나에게 살레와 것을 모래내금강에서 베껴 만든, 토왕성폭을 오를 때 쓴 녹슨 바트호그(Wart hog) 하나를 주었다. 나는 여전히 ‘외산’이 궁금하였고, 그게 무어냐고 형에게 묻자, 내일 붓 하나를 사들고 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음날 형이 나에게 주문한 것은 ‘일(一)’ 하나를 그어보라는 것이었다. 이미 막걸리 두어 병을 마신 형의 글은 줄곧 똑바랐고, 나는 의기양양 붓을 들었으나 삐뚤빼뚤 줄 하나 제대로 그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떨리는 나의 손끝이, 산 안에 있으나 산 밖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영배 형은 산으로 갔다.




박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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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서울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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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전문등반 시작

1969년 크로니산악회 창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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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인수봉 크로니길 개척․서울근교 113개 코스 암벽순례

1977년 설악산 토왕성폭 초등

1978년 설악산 적벽 초등․제주도 성산 일출봉 초등

1979년․1980년․1981년 스위스 아이거 북벽 등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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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등산학교 수료

1982년 알프스 그랑드조라스 북벽 등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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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1986년․1988년․1990년 네팔 동계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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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등산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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