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을 살면서 의외였던 것 >
2014년, 교환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떠나는 유럽으로의 출국을 앞두고 가장 많이 들었던 조언은 '김치와 라면을 많이 챙겨갈 것'이다. 외국 여행을 가는 많은 사람들이 짜고 느끼한 외국 음식을 먹다 질려버린다고 한다. 어떤 이는 1주일도 채 되지 않는 여행 기간에도 한식을 너무나 먹고 싶어, 현지 한식당을 찾아가 한 병에 1만 원이 넘는 소주를 털어 넘겼던 기억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런데 좀 찜찜하다. 라면은 부피가 커서 많이 넣기가 힘들고, 김치는 중간에 터지기라도 하면... 생각하기도 싫었다. 비슷한 이유로 된장, 고추장도 위험했다. 결국 여행용 조각 김치 1묶음, 라면 5개 정도만 들고 부다페스트로 향했다.
한 학기 동안 머물, 도심 한복판에 있는 5층짜리 건물 바로 옆에는 슈퍼마켓이 있었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아시아마켓이 있었고 몇몇 한국 음식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김치를 사기 위해선 가는데만 1시간 반이 걸리는 한인마트를 가야 했다. 때문에 종종 '김치 원정대'를 조직하는 사람을 헝가리 교환학생 커뮤니티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조각 김치가 다 떨어졌을 때,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다. '정말 김치가 꼭 필요할까?' 생각해 보니 한국에서도 딱히 김치를 찾지 않았다. 피클을 비롯해서 다른 많은 절임 음식들은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현지식으로 식사를 해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여기에는 약간 지역 운도 있는데, 헝가리는 동양계 민족인 '마자르족'의 후예라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친숙한 음식이 많았다. 헝가리 전통 스튜인 '굴라쉬'는 빨간 국물과 고푹 고은 고기가 마치 육개장을 먹는 것과 같았고, 동유럽에서 많이 먹는 돼지고기튀김 '슈니첼'은 돈까쓰보다도 맛있었다.
사 먹는 것에 질려 밥을 짓고, 요리를 시작했다. 마트에서 파는 식료품만으로 거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었다. 혹시 몰라서 가져온 햇반은 여행을 갈 때만 쓰고 집에서는 냄비로 밥을 지었다. 한 번은 동남아시아 쌀을 쓰는 바람에 밥알이 흩날리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지만, 볶음밥으로 해 먹으니 오히려 좋아. 정육점에서 고기를 살 때는 글자는 몰라도 생김새만 보고 잘라달라는 손짓을 했다. 처음에는 사태로 구이를 해 먹는 경악스러운 일을 벌이기도 했지만, 고기를 공부하기 시작하고부터는 요리에 맞는 적절한 고기를 고를 수 있었다.
볶음밥, 파스타, 수프... 이런 식으로 돌려가며 밥을 해결하니 한식에 대한 생각은 거의 들지 않았다. 가끔 한식이 당기는 날에는, 최대한 비슷한 재료를 사용해서 원본을 흉내 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양배추 김치... 아니 겉절이인데, 하필 그때 배추가 마트에 없어 양배추에 고춧가루와 여러 조미료들을 버무려 먹었다. 나름 비슷한 맛이 나서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결국 귀국하는 날까지 한인마트는 구경도 하지 못했다. 약간의 자부심(?)과 함께 내가 음식을 크게 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보니, 딱히 국물요리를 먹지 않아도 상관없는 식습관이 큰 원인이었다. 찌개를 안 먹어도 되니 장류가 필요가 없었고, 그러면 김치 말고는 거의 모든 재료는 현지 조달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지에서는 현지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이후에도 길게는 2주 가까이 해외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지만, 여행 중 한식을 찾아먹은 적은 없다. 20대 중반이 되어서까지 2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 본 적 없는 사람 치고는 꽤나 현지 음식을 잘 먹는다고 자부한다. 이제 10년이 다 되어가는 추억 덕분에 김치가 없어도, 한식을 먹지 않아도 꽤나 잘 살 수 있다는 의외의 사실을 성찰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