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기억나는 한 끼 >
고단했던 수요일. 이날만큼은 요리를 하기 귀찮았던 부부의 마음이 통했다. 밖에서 저녁을 먹고 가기로 결정했다. 무엇을 먹을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 보면, 열에 아홉은 파스타를 찾게 된다. 만들기 쉬우면서도 맛있게 만들기 어려운 음식. 시판소스가 주는 인공적인 맛이 아닌 재료 본연의 맛이 어우러진 파스타 맛집들을 찾아다니는 것이 우리의 즐거움 중 하나다.
이날의 약속장소이기도 한, 아내가 다니는 회사 근처에는 제법 근사한 맛집이 있다. 파스타가 너무 좋아 이태리 유학까지 다녀온, 100% 생면을 사용하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식당이다. 단 하나의 문제는 당일 예약을 받지 않는 점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식당 앞으로 향했다. 역시나 좌석은 만석이었고, 뒷 타임에도 예약이 가득 차 있었다. 다른 맛집을 찾아보자는 마음으로 근처 골목을 배회했다. 10여분 정도 걸었지만, 평소에는 골목마다 보이던 파스타집이 오늘만큼은 오리무중이다. '이렇게 포기해야 하나...'라는 불안감이 싹트는 도중, 하얗게 도색된 2층 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미국 휴게소를 연상시키는 파란 타원형의 입간판. 그 속에는 하얀색으로 쓰인 'SPAGHETTI'가 선명했다. 건물이 참 사진 찍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이런 음식점을 가면 정작 음식은 별로라 실망한 경우가 많았다. 과거의 경험들은 이번에도 위험하다는 신호를 싸함이라는 감정으로 보내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배고픔이라는 생존욕구가 이겨버렸고, 식당의 문을 열었다.
자리에 앉고 주문서를 펼치니, 먹을 수 있는 파스타는 단 4종류였다. 음식의 가짓수가 적으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인 것 같아 조금 안심했다. 각자 뇨끼와 라자냐를 시켰다. 이윽고 피클과 함께, K-파스타집의 국룰이기도 한 식전빵이 나왔다. 식빵도, 치아바타도 아니었다. 서버가 직접 모닝빵을 꺼내 발뮤다 토스트기에 데운 것이다. 어떤 파스타집에서도 볼 수 없던 장면이다. 배고프기도 해서 태연하게 먹었지만 내심 불안함이 커져만 갔다. 안타깝게도 잠시 후 이 불안함은 현실이 되었다.
먼저 뇨끼가 나왔다. 뇨끼보다는 수제비에 가까운 덩어리들이 크림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한 입 떠먹고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분명 뇨끼는 '감자'와 밀가루 등을 섞어 반죽하는 요리인데, 감자의 맛도 향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필이면 지난주에 방문한 파스타집이 뇨끼로 유명한 맛집이다. 오죽 자부심이 넘쳤으면 가게 이름에도 뇨끼가 들어갔던 곳이다. 오늘은 실패했다는 생각을 하며, 라자냐는 이보다는 괜찮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어렵게 짜내보았다. 이어서 나온 라자냐는 희망을 꺾는 정도를 넘어, 이 글을 쓰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어버렸다. 층층이 쌓인 라자냐의 모습을 미각으로도 재현하고 싶었는지, 밀가루와 라구 소스가 같은 자석의 극인 마냥 동떨어진 맛을 냈다. 라구 소스에서는 음식점에서 절대 느끼고 싶지 않은 시판소스 맛이 그대로 났다. 이 '먹을 것'을 고든 램지에게 먹여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생겼다. 그가 할 창의적인 악평과 접시를 던질 각도가 궁금했다. 나의 평가이자 실제로 느낀 점은, '코스트코에서 사 온 냉동 라자냐가 더 맛있었다.'
음식으로 분노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좀처럼 음식을 가리지도 않을뿐더러, 마음에 들지 않아도 '다음에는 오지 말아야지' 정도만 생각했다. 무던한 나조차 분노를 느꼈으니, 맞은편에 앉은 진짜 미식가께서는 어떨까? 아내를 바라보니 진작에 포크를 손에서 떼고, 나가자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는 식당을 나와 정확히 세 발짝 걸은 후부터, 집에 도착하기까지 끊임없이 식당에 대한 악평을 쏟아냈다. 몹시 배고픈 상황이었음에도 먹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맛이 없었고, 시판 소스 맛이 틀림없는데도 소스를 직접 만드는 파스타집과 가격대가 같았다. 조금 과장하자면 사기를 당한 기분이랄까? 우리와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영수증 리뷰를 적나라하게 쓸까 고민하다가, 법적 분쟁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아 그만두었다. 지금 편하게 악평을 쏟아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다녀온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영업이 종료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도에서 사라지기 전에 리뷰를 한 번 살펴보았다.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영수증 리뷰는 아예 쓰지 못하게 막아놨었고, 일반 리뷰에는 수많은 악평이 달려있었다.
최고의 음식을 맛본 경험은 하나를 꼽기 힘들 정도로 많지만, 최악의 음식을 떠올리면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잊을 수 없는 한 끼'를 생각하는 순간, 인스타 감성'만' 남아 있던 스파게티 가게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맛없는 음식을 단 한 번밖에 먹지 못했다는 것이 행운일까. 맛은 최악이었지만 배운 것은 많아 다행이다. 맛없는 음식 하나가 하루를 망친다는 것.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악평을 남기는 사람도 있다는 것. 그리고 분노라는 감정이 아주 훌륭한 글감이 될 수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