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좋아하는' 동성 >
졸업한 친구들을 만나면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조그만 위화감이 느껴진다. 투명한 물 위에 한 방울의 잉크가 떨어진 느낌. 각자가 걸어가는 길이 다르기에, 뿌려지는 잉크의 색도 저마다 다르다. 아직은 조그마한 차이지만 언젠가 그 색들이 우리의 것이 되어버리라는 생각에 조금은 씁쓸하다. 그러나 모두가 사회의 색으로 전부 변해버리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색을 유지하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 공간을 글로 남겨둔 사람들이 있다. 글 속에서 자신의 찬란한 색을 발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동경의 대상이다.
'철인 황제'. 황제의 의무와 철학자의 사유라는 두 페르소나를 지켜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첫 번째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는 끝내 전쟁기지에서 병사할 정도로 황제로서의 책임에 충실했다. 로마를 위해 적을 죽이고, 정치의 안정을 위해 반란을 진압해야 했던 잔인함은 그의 성품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괴리감을 해소하며 자신을 지킨 것은, 인간과 삶에 대해 사색하는 철학가가 되는 시간이었다. 스스로의 본질을 지켜낸, 철학자로서의 모습을 우리는 <명상록>이라는 책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전쟁이라는 부조리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사유의 동기로 삼아 자신의 색을 더욱 빛냈다. <명상록>이 주는 철학의 깊이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위대하면서 동시에 불쌍한 이 인물의 글을 읽으면 저절로 경외심이 든다.
이제는 법조인이 아닌 작가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 것 같은, 문유석 전 판사의 글을 보면서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 대한 마음은 일을 시작하면서 더욱 커진 것 같다. 회사에서 쓰는 딱딱한 용어와 획일적인 보고서에 길들여진 결과, 일상 속의 글에서도 부드러움이 사라짐을 느꼈다. 그가 매일 마주했던 글은 회사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엄격한 법조인들의 문서다. 딱딱한 법률용어가 난무하고, 때로는 한 문장이 한 페이지가 넘을 정도로 일반적인 글과 괴리가 큰 판결문.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글을 써야 하는 직업임에도 그는 '개인'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았다. 그가 쓴 <판사유감>이나 <개인주의자 선언>에서는 딱딱한 문체도, 판사라는 엄격함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블로그나 브런치에서 보았음직한 '퇴근하고 싶은 직장인', '안타까운 사연을 바라보는 따스함'이 들어있다. 옅은 미소를 띠다가 가슴이 찡하기도 하면서 페이지를 넘겼다. 판사 문유석과는 전혀 다른 빛을 낼것만 같은 인간 문유석의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이유에는 내가 그렇게 되고 싶어서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수십 년 계속될(가능성이 높은) 회사 생활. 만사를 버텨내면서 딱딱해질 문구, 메말라질 감정으로 나의 전부를 채우고 싶지 않다. 결코 되고 싶은 사람으로 변해버리지 않기 위해서 글쓰기를 이용한다. 한 가지 더 소망해 보자면, 훗날 내가 써 나간 글이 '나'를 지키고 싶은 또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