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나는 회사와 고객 사이의 통역사입니다

딱딱한 보고서와 말랑한 온라인 콘텐츠 사이를 조율하는 방법

by 설묵

SNS와 관련된 여러 활동이 좋은 성과를 내면서, 내부에서도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전보다 협조적으로 변한 다른 부서의 태도가 피부로 와닿았다. 장비나 예산 등 내부의 지원도 조금씩 생겨났다. 그러나 이러한 내부 관심은 양날의 검으로 작용했다. 좋은 점도 있지만, 오히려 힘들어진 점도 있었다. 다른 부서와 트러블이 생기는 빈도와 수위가 높아진 것이다.


이쯤에서 잠시만 '보고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겠다. 거의 모든 공공기관에서 보고서를 작성하는 방식은 '개조식'이다. 사전에서는 개조식을 '글을 쓸 때 앞에 번호를 붙여 가며 짧게 끊어서 중요한 요점이나 단어를 나열하는 방식'이라고 정의한다. 예를 들기 위해 기획재정부의 2023년 예산안 보도자료 일부를 가져왔다. 기획재정부 홈페이지에서 누구나 볼 수 있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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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라는 관점에서 보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명확한, 좋은 보고서의 전형적인 예시이다. 문제는 우리 부서에서 만들어야 하는 것은 보고서가 아닌 '온라인 콘텐츠'라는 점이었다. 보통 이런 내용은 카드 뉴스로 제작을 하게 되는데, 카드 뉴스에 개조식 표현을 그대로 적는 것은 전혀 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이다. 우선, 하고자 하는 말을 한눈에 들어오게 정리를 하다 보니 '제고', '및' 같은 어렵고 짧은 표현이 많아지게 된다. 용어의 어려움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딱딱한 어투다. SNS가 가진 친절하고 친근한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못한다. 한마디로 '톤 앤 매너'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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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뜬금없이 보고서 이야기를 한 이유는, 보고서에 익숙하신 분들을 상대로 카드 뉴스를 컨펌받는 일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높으신 분들의 관심이 많아지면서, 콘텐츠의 결재선이 늘어난 것이다. 이전에는 팀장급에서 끝나는 콘텐츠에 대한 컨펌이 실장급, 본부장급까지 올라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분들께서 보시기에 카드 뉴스의 말랑한 문체는 공공기관에 어울리지도 않았고, 당신들께 익숙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내부 컨펌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실제로 콘텐츠를 보게 될 고객의 입장을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둘 사이의 간격을 조리 있게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우선 기획 단계에서 내부 보고가 필요한 경우에는, 두 가지 버전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실무진과는 '어떻게 구독자들을 끌어들일 콘텐츠'를 만들지 고민이 담긴 보고서로 대화를 했고, 보고용으로는 이 콘텐츠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를 중심으로 철저한 개조식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예를 들면, 다른 부서의 실무자와는 카드 뉴스의 구성안을 보여주고 대화를 하고, 협의가 완료되면 추가로 1페이지 보고서를 작성하여 '추진 배경 : SNS 콘텐츠 제작을 통한 정책 대상자들의 관심 환기' 등의 내용을 작성해서 그 실무자에게 전달하는 식이었다.


기획에서 무사히 통과한 콘텐츠의 경우에도, 컨펌 단계에서 갑자기 팽팽한 줄다리기가 시작된 경우가 많았다. '0과 ㅁ를 잘 만들어서 ~~를 돕겠습니다'라는 내용이 돌아올 때는 'ㅇ 및 ㅁ의 원활한 추진으로 ~~ 에 기여'라는 식으로 딱딱하게 바뀌곤 했다. 콘텐츠를 만드는 입장에서는 개조식 표현이 늘어나면서 생기는 이질감에 곤란해했다. 반면 다른 부서에서는 우리가 다시 글을 수정하면 또 결재를 거쳐야 한다는 점을 어필했다. 윗선에서 검토한 버전과 다른 내용을 낼 수는 없으니 말이다. 때문에 토씨 하나, 글자 하나를 가지고도 서로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는 일이 많았다.


또 하나, 예상조차 하지 않았던 문제점이 있었다. 컴퓨터와 모바일 화면용으로 제작한 콘텐츠이지만, 내부 보고 과정에서는 인쇄물로 출력하는 경우가 많아 색감이 달라졌다. 세상에, 빛의 3원색과 색의 3원색이 다르다고 초등학교 때 배운 내용이 여기서 나올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밝기와 색감은 안드로이드와 아이폰이 다르고, 기기마다 설정에 따라 또 달라졌다. 꼼꼼하신 본부장님 밑에서 '색이 너무 어둡다, 바꿔달라'는 명을 받고 돌아온 실무자의 말에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한 적도 있다.


무작정 우리의 입장만을 요구할 수는 없다. 홍보팀과 같은 지원부서의 입장에서는 현업부서와 원만한 관계를 맺는 것도 몹시 중요하다. 그들의 협조가 없다면, 우리는 일을 하려고 해도 홍보할 '그 무엇'이 없어져버린다. 그렇지만 정말로 모든 것을 개조식 보고서 투로 작성하게 되면, 재미없는 공공기관 SNS 중 하나로 남아버릴 것이다. 유연한 대응이 필요했다. 모든 부서와 공평하게 협의를 하기 위해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우선, 오탈자를 제외한 수정 횟수를 최대 3회로 제한했다. 실제로는 3회를 넘어가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원칙을 세워두었기에 끝없는 수정이 일어나는 경우를 미리 방지할 수 있었다. 단어를 개조식으로 고칠 경우에는 '의미의 변화가 있는지 여부'를 우선적으로 살폈다. 규정과 관련된 내용은 정말로 토씨 하나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기에, 개조식으로 작성되었더라도 그대로 반영했다. 그러나 단순한 수사와 표현에 대해서는 우리의 입장을 강하게 어필하였다.


또 다른 타협으로, 콘텐츠 성격에 따라 피드백의 수용 정도를 조절했다. 전문적인 자료의 성격이 강하거나, 대상자에게 정확한 설명이 필요한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현업 부서의 입장을 따랐다. 반면 우리가 설정한 핵심 타깃(2030)을 대상으로 친근하게 안내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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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팀에 있으면, '보도자료는 중학생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쉬운 글'이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 개인적으로 SNS, 특히 카드 뉴스와 같은 말랑말랑한 콘텐츠는 '초등학생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더 쉬운 글'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가벼운 콘텐츠들의 목적은 모든 정보의 전달이 아닌, 흥미 유도나 핵심 내용에 대한 안내에 있기 때문이다. 정보가 필요하거나, 콘텐츠의 내용에 흥미가 있는 사람이 더욱 자세한 정보를 찾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이 되어야 한다.


전혀 다른 두 세계와 소통해야 하는 나의 역할은 일종의 '통역사'가 아닐까? 개조식 보고서에 익숙한 내부 직원들과, 쉽게 풀어쓴 단어를 좋아하는 구독자 사이의 간격을 좁혀주면서 말이다. 만들어야 할 콘텐츠가 많아 바쁠 때면, 문구에 대한 고민 없이 개조식 어투를 그대로 쓸까 타협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본다. 일상 속에서 저 단어들을 내가 쓰는지. 적어도 모든 국민들에게 알려야 한다면, 최대한 쉽고 익숙한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홍보팀을 겪은 내가 가진 신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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