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계 대신 나침반을 들었습니다.

우리 집 영어 시계는 조금 천천히 갑니다.

by 문장 가이드 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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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따라 해 봐. 애-플!"

두툼한 코팅 용지로 만들어진 단어 카드 한 장을 들고 아이 앞에 앉아 있던 그날 오후를 기억합니다. 선명한 사과 그림 아래 'Apple'이라는 글자가 적힌 카드였어요. 세 돌이 막 지난 아이에게 '사과는 영어로 애플'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제 열정과는 달리, 아이는 제 입 모양과 단어 카드 사이를 멍하니 오갈 뿐이었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제 목소리가 조금씩 커질수록 아이의 미간은 좁아졌고, 급기야 "싫어"소리와 함께 카드를 밀쳐내고는 다른 장난감을 향해 달려가 버렸습니다.

허탈하게 거실에 남겨진 저는 생각했습니다. '고작 단어 하나 알려주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나는 왜 이렇게 조급해하고 있지?'

그날 밤,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며 SNS를 열었습니다. 피드에는 36개월 아이가 막힘없이 알파벳 송을 완창 하는 영상, 영어원서로 빼곡한 아이의 책장을 찍어 올린 사진 같은 '성공 인증글'들이 별처럼 쏟아졌습니다. 그 반짝이는 별들 아래, 단어 카드 한 장에 실패하고 좌절한 제 모습은 한없이 작아 보였습니다. 남들은 저만치 앞서 달려가는데, 우리만 뒤처지는 것 같은 불안감, 제 손에 들린 것은 아이의 손이 아니라, 남들과의 격차를 재는 '속도계'였음을 그때 알았습니다.

며칠 뒤였습니다. 무릎에 아이를 앉히고 아무 생각 없이 영어 그림책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커다랗고 빨간 사과 그림이 나오자, 아이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그림을 콕 짚으며 외쳤습니다.

"아뿨!"

정확한 '애플' 발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 눈을 보며 환하게 웃는 아이의 얼굴, 그림을 발견한 기쁨으로 반짝이던 그 눈빛 속에는 지난번 단어 카드 앞에서 느꼈던 저항감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띵' 하고 울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아, 이거구나.'

아이에게 필요했던 건 정확한 발음을 강요하는 '교육'이 아니라, 그저 그림책을 함께 보며 웃는 '즐거운 순간'이었던 겁니다.

그날 이후, 저는 과감히 속도계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손에 작은 '나침반' 하나를 쥐었습니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은 단 하나, '아이가 영어를 좋아하게 되는 길'이었습니다. 'Apple'이라는 단어 하나를 더 외우는 것보다, 사과를 깎아 함께 먹으며 'Yummy!' 하고 웃는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 알파벳 포스터 앞에서 글자를 가르치는 대신, 아이가 좋아하는 공룡 책을 펼쳐놓고 'Wow, a big T-Rex!'라고 함께 감탄해 주는 것. 그것이 우리 집이 가야 할 유일한 방향이었습니다.

혹시 지금, 조급한 마음에 아이를 재촉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남들의 속도에 불안해하며 우리 집만의 페이스를 잃어버리진 않으셨나요?

괜찮습니다. 우리 집 영어 시계는 조금 천천히 가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니까요. 아이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나는 방향으로 핸들을 돌린다면, 우리는 이미 가장 올바른 길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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