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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맘의 수요일 식물원

한 손에는 삼각김밥을 들고 이야기 숲으로

by 무아과

날씨가 좋고 별일 없는 수요일이면 동네 식물원에 아이를 데리고 간다. 봄, 여름, 가을은 아침마다 영유아들을 위한 야외 놀거리, 책, 미술 활동 등이 마련되어 있고 작은 화분을 심어갈 수도 있다. 이곳에서 알게 된 친구들도 있고 아이의 친구들을 이곳에서 만나기도 한다. 샨띠를 키우는 3년 동안 이렇게 동네 곳곳에서 다른 아이와 엄마 아빠 혹은 베이비시터들을 알게 되었다. 딸 샨띠가 4개월 남짓 되었을 때였을까? 동네 축제의 비영리 단체 부스에서 샨띠처럼 까무잡잡한 또래 아기를 데리고 있는 갈색 머리의 워킹맘이 세입자들의 권리 보호 서명을 받고 있었고 우린 자연스레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만난 미국 친구 레이첼도 딸 아마라의 어린이집 오전반이 끝나면 휴무일인 수요일마다 식물원에 오는데, 이제 낮잠 잘 안 자는 아이를 이 날만큼은 재우기 위한 중대한 임무를 위한 나름의 코스를 찾았다며 내게 동참을 권했다. 샨띠는 이제 1~2주에 한번 꼴로 낮잠을 자고 그날 이미 8시 넘어서 일어난 터라 난 별 기대가 없었지만 오랜만에 그저 그들이 반가운지라 동행했다. 레이첼은 우리에게 아이 어린이집 근처 일본 마트에서 사 왔다며 삼각김밥을 권했는데 나도 마침 전날 한국 마트에서 사 온 삼각김밥이 있어 괜찮다고 했고, 그가 매번 실패한다는 삼각김밥 비닐 벗기는 걸 도와주려 했으나 웬일인지 나도 실패해 버렸다.


식물원 북쪽에 나름 그늘이 있는 작은 언덕배기 숲길이 하나 있는데, 덜컹거리는 흙길 한 바퀴를 돌며 이야기 한마당을 해주고 나면 자기는 운동하듯 숨이 차지만 아이가 잠이 든다고 했다. 이야기 숲에 진입하기 전 레이첼은 비장한 표정으로 한 손으론 입에 삼각김밥을 욱여넣고 한 손으로는 유모차를 밀며 ‘So,’ 하며 이야기 시동을 걸었다. 인스타그램 등에서 볼 수 없는 이 현실 육아의 뒷모습에 난 자지러지게 웃었다. 난 이미 마음의 평화를 위해 낮잠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은 지 오래되었지만 아이의 낮잠은 엄마에게 이토록 절실하다. 아무튼 평소보다 더운 봄날에 울퉁불퉁한 언덕길을 유모차를 밀며 레이첼의 위치 헤이즐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아마라와 샨띠가 숲에서 위치 헤이즐을 따다가 길을 잃어서 엄마를 찾고 있었다고 했나? 그래서 엄마 냄새를 찾아 헤맸다. 이렇게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그가 숨이 찰 때쯤 내가 바통 터치해 그 이야기는 미역국과 마쪼볼 수프를 먹기 위해 엄마들을 집에 숨겨놓은 호랑이 이야기로 변주되어 미국과 한국 전래동화 짬뽕 리믹스가 되었다. 숲길을 한 바퀴 다 돌았을 때쯤 샨띠는 오히려 신이 나서 유모차에서 내려 걷게 되었지만 다행히도 아마라의 눈은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다. 몇 보 길을 다시 돌려 충분히 아이가 잠이 들 때까지 확인을 마친 후 우린 숲을 빠져나와 조용한 그늘 자리로 이동했다. 레이첼은 휴무인 수요일을 자기 자신을 위한 날로 정했다고 한다. 아이가 어린이집 오전반에 있을 동안 나름 자기 자신을 위한 활동을 하고 아이 픽업 후 식물원에 와 이야기숲 코스로 아이를 한바탕 재우고 약 한 시간 남짓의 낮잠 시간 동안 식물원을 산책도 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저녁에는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요가수업도 가는 게 요즘의 새로운 수요일 일정이라 한다. 아마라가 자는 동안 샨띠는 혼자 춤을 추고, 오랜만에 만난 우린 이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결국 1시간이 채 안되어 샨띠는 아마라를 깨웠고 우린 거의 져가는 벚꽃 정원으로 향했다. 그곳엔 마침 아이와 함께 온 또 다른 육아 동지들이 있어 함께 피크닉을 했다. 아이들은 일제히 신발을 벗고 뛰어다니며 어른들에게도 신발을 벗으라 했다. 샨띠는 다른 일행의 더 큰 아이들이 앞 구르기를 하는 걸 유심히 보다가 ‘엄마, 떼굴떼굴 구르는 거 도와줘!’라고 하더니 이내 스스로 터득해 신이 나서 떼굴떼굴 굴러다녔다. 아마라는 화장실에 가고 싶어 했고, 당장 근처 화장실에 가긴 늦어 샨띠의 휴대용 변기에 지퍼백을 둘러 소변을 보았다. 이미 늦은 오후가 되었는데, 레이첼은 저녁에 회사 행사가 있어 가야 하는 걸 깜빡했다며 부랴부랴 아마라를 유모차에 태워 정원을 떠났다. 한 손에는 아마라의 오줌이 가득한 지퍼백을 들고 한 손으론 유모차를 밀며 바삐 떠나는 그의 뒷모습. SNS에선 누구도 볼 수 없지만 난 항상 주변에서 보는 현실 육아의 모습이다. 그래도 회사 행사에서 기어이 일찍 빠져나와 요가 수업에 갈 거라며 우리에게 육퇴 후 동참을 권하던 그는 결국 행사 가장 앞자리에 앉는 바람에 일찍 빠져나오진 못해 요가 수업은 가지 못했다고 한다.


자긴 창의적인 쪽과 거리가 멀어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부럽다고 이야기하던 레이첼에게 언젠가 얘기해주고 싶다. 이야기 숲에서 헉헉 유모차를 밀어대며 아마라에게 이야기를 만들어 대는 그가 내겐 누구보다 창의적인 스토리텔러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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