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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삐 산다고 방황 안 하는 게 아니야

by 무아제로

피아노, 독일어, 운동을 3주간 정지하고 있다.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고,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서 미아처럼 멀고 먼 과정에 떠있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보다 강인했고 밖에선 누구보다 열심히였다. 나는 아버지처럼 열심히만 살지 말아야지, 했는데 지금에야 생각해보니 그렇게 사셨던 것은 삶의 방향을 모르셨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장례식 마지막 날 새벽 4시에 아버지 친구가 술에 취해 내게 말했다. "왜 저렇게 열심히 산지 아냐. 열심히 하는데 뜻대로 안 되니까 방황한 거야." 나는 뒤통수를 맞았다. 아버지도 방황한 삶이었구나. 내가 누구를 닮았나 했더니 아버지를 닮았구나. 나도 이것저것 해보지만 별로 성과가 없다. 미약해도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인지, 늘 마음을 따르며 살아야 하는 것인지, 늘 갈등 중이다.


20대 막바지에 걸쳐있는 나는 존재하지 못하고 산재해 있다. 여기저기. '나'가 아닌 '남'으로. 나이고 싶지만 남에서 빠져나오려고 발악해보지만 자꾸만 발목을 잡힌다. 내가 짊어져야 할 짐으로부터. 나는 자유롭고 싶지만 자유로울 수 없는 환경이라면 여기를 벗어나야 하는가, 아니면 여기서 뛰어야 하는가.


벤야민이 그랬던가. 그때그때의 일보만이 진보이며 2보도 3보도 n+1보도 진보가 아니라고. 맞다. 나는 간과하고 있다. 여기서 뛰어야 저기서 뛸 수 있다. 여길 못 뛰는데 저곳을 어떻게 갈까. 여긴 로두스가 아니지만 로두스라고 믿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오직 나로서 살면 타인은 지워진다. 타인이 없다면 사랑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살 가치가 없어질 것이다. 타인은 지옥이지만 천국일 수도 있는 법이다. 항상 변한다. 내가 되었다가 남이 되었다가, 사랑했다가 서운했다가, 있음이 있어야 없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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