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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카이브 Oct 26. 2023

광야에서 벗어난 에스파, 그래서 그 다음은?

* 본 포스팅은 재업로드입니다. 



에스파가 광야에서 돌아왔다. 데뷔 전부터 일관된 컨셉을 고수한 '광야 속의 여전사'는 과감히 버리고 한결 가벼운 차림의 '하이틴'을 장착했다. 이미 세계관 영상을 통해 KWANGYA에서 REAL WORLD로 복귀가 예고되어 이들의 광야 탈출은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긴 했으나 어쩌면 현 시기에서 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늘 호불호가 강했던 컨셉인 데다 야심차게 발표한 전작 <Girls>의 부진한 성적, 그리고 그 사이에 완벽히 입지를 다진 '뉴아르(뉴진스, 아이브, 르세라핌)'까지.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동기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고집된 세계관을 밀어붙이기엔 이들의 명예가 실추될 위험이 다분했다. 그렇기에 이번 앨범은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컨셉을 차용해야만 했고, 음악적으로도 SMP를 버리고 힘을 덜어내야만 했다. 그래야만 애매해진 입지에 다시 발을 들이고, 대중성을 잡으면서도 그들의 컨셉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즉, 에스파의 이번 앨범은 두 가지 안을 절충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작년 10월 발매된 <Girls> 이후 10개월 만의 컴백인 이번 앨범은 에스파에게 Tipping Point가 되어야 했다. ‘NEXT LEVEL’로 4세대의 포문을 열며 대중에게 확실한 각인을 했던 그때와 지금의 판도는 많이 달라졌다. 아니, 완전히 뒤바뀌었다.


4세대 걸그룹 중 에스파가 돋보였던 시기는 냉정하게 말해서 그들의 경쟁상대가 거의 없었다. '뉴아르'는 데뷔 전이었고, 그나마 스테이씨의 <ASAP>가 흥행하면서 함께 거론되었지만, 대형 기획사와 중소 기획사의 주목도 및 영향력은 압도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렇기에 에스파의 매니악한 컨셉과 SMP를 마음껏 선보일 수 있었고, 이들의 단독 질주를 막을 자는 없었다.


그러나 단독 질주의 성과가 너무 좋았던 탓일까, 그 사이 가요계에는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현 4세대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아이브, 르세라핌, 뉴진스'가 차례로 데뷔하며 시작과 동시에 판도를 흔들었다. 결국 4세대는 '뉴아르'라는 수식어로 통용되는 결과를 낳았고, 이 현상은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야심차게 4세대의 문을 열었던 에스파는 어느덧 문지기로 남아 그들이 상승을 지켜보는 역할로 자리했다. 거기다 최근 SM의 경영권 분쟁에 따른 'SM 3.0'의 첫 결과물이 에스파에 적용되는 상황이었다.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여러모로 신경 쓸 부분이 많았던 앨범이었다. SM은 에스파의 이번 앨범을 통해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다는 걸 'SM 3.0'으로 증명해야만 했고, 에스파는 이번 앨범을 통해 여전히 굳건한 4세대 걸그룹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앨범이 <MY WORLD>이다. 총 6곡이 수록된 EP로 특이하게도 6번 트랙을 제외한 모든 곡의 비디오가 존재한다. 선공개 곡인 'Welcome To MY World (Feat. nævis)'와 타이틀 곡인 'Spicy'는 뮤직비디오로, 그 외에 'Salty & Sweet', 'Thirsty', 'I'm Unhappy'는 모두 2분 안팎의 트랙 비디오로 구성되었다. 이번 앨범에 얼마나 힘을 실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Welcome To MY World (Feat. nævis)

몽환적인 기타 리프와 후반부의 웅장한 오케스트레이션이 돋보이는 곡으로 멤버들의 힘을 뺀 보컬이 더해져 더욱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곡을 선공개한 이유는 KWANGYA와 REAL WORLD의 중간 지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감히 REAL WORLD로의 복귀를 예고했지만, 여전히 1번 트랙에 자리한 ‘nævis’라는 이름은 그들이 여전히 광야를 놓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상 이 곡은 nævis의 피처링이 없었어도 되는 곡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피처링으로 사용하고, 1번 트랙에 배치하여 존재를 확실히 하고, 뮤직비디오에서도 보여주었던 이유는 KWANGYA와 REAL WORLD와의 절충하기 위한 구실이자 컨셉의 유지 때문이다.


뮤직비디오에서도 이들의 REAL WORLD 복귀는 대놓고 드러난다. 항상 가상세계에서 전투복을 입고 싸우던 에스파는 이번엔 숲 속에서 편안한 차림으로 뛰어논다. 몽환적인 트랙에 맞게 색감 역시 약간 희미하게 연출하며 몽글몽글한 느낌을 자아낸다. Nævis로 추청되는 희미한 빛은 뮤직비디오 내내 그들을 주위를 배회하고, 마지막에서 그 빛과 교감하는 에스파 멤버들과 그 끝에 자리한 nævis의 모습을 통해 이들의 REAL WORLD 복귀는 암시된다. 그만큼 뮤직비디오는 ‘발끝의 경계를 넘어 It's a new world 마주하는 You and me’라는 가사를 그대로 시각화한 내용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다.


사실 이 곡은 ‘nævis를 REAL WORLD로 초대한다는 내용인 동시에, 리스너들을 aespa만의 음악 세계, 즉 ‘MY WORLD’로 초대한다는 의미’를 지녔지만, 리스너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저 현실과 타협한 에스파가 리스너의 세계로 결국 넘어왔다는 느낌이 더욱 강하게 든다. 이들의 REAL WORLD 복귀 의도가 무엇인지 알기에 더욱 그렇다.



Spicy

하이틴 그 자체이다. 뮤직비디오를 보기 전 노출된 썸네일만 봐도 알 수 있다. 특히, 뮤직비디오 초반부는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이 유독 연상되는 비주얼이었다. 확실히 이전 광야 노래들보다 힘이 빠진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 ‘힘이 빠진’ 느낌은 비주얼과 메시지에 크게 작용하는 듯하다. 여전히 강렬한 사운드와 다이내믹한 비트, 그 위에 얹어진 멤버들의 힘 있는 보컬은 전작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힘을 뺐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광야가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선공개 곡과 달리 광야와 관련된 모든 것을 금기한 타이틀 곡은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찢는 사운드가 많았다. 강렬한 신스 베이스는 여기저기 스파크가 튀어오르는 듯한 느낌을 주어 여름 컨셉에 맞는 시원함을 주긴 한다. (많이는 아니지만) 또, 장난스러운 멜로디의 포스트 코러스는 곡의 무게감을 한결 덜어주고, 윈터, 닝닝, 카리나가 번갈아 가면서 부르는 코러스는 각 파트 별로 다른 감상을 선사한다. 1절 코러스를 맡은 윈터는 힘있는 보컬로 기선제압을 하고, 닝닝은 2절에서 곧 다가올 브릿지로의 진입 전 살짝 힘을 덜어내고, 마지막 3절을 맡은 카리나는 그녀 특유의 날카로운 보컬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Salty & Sweet

앞선 두 곡과는 정반대의 분위기이다. 'Salty'하고 'Sweet'한 묘약같은 매력으로 상대를 매료시키겠다는 가사와 일치하게 연출되는 매혹적인 트랙 비디오는 ‘SM스럽다’는 감상평을 자아낸다. 거친 신스와 베이스 사운드를 중심으로 기계음 같이 믹싱된 보컬은 기존의 AI 분위기를 연상케 했고, 이는 트랙 비디오에서도 드러난다. 1절로만 구성된 트랙 비디오는 짧지만 인상적인 비주얼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달라지는 화면 비율과 그에 따른 노이즈 낀 연출이 기억에 남는다. 찰나의 순간이라 아무 생각 없이 보면 넘어갈 수도 있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넣은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으리라 본다. AI스러운 음악과 비주얼을 자랑하는 이 곡은 ‘SMP’ 그 자체이다.



Thirsty

처음 듣자마자 대중성으로는 가장 반응이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화려한 사운드 대신 감미로운 선율과 보컬에 비중을 둔 선택은 대중에게 적중할 듯하다. 3번 트랙이 묘약같은 매력으로 상대를 매료시키겠다는 매혹적인 곡이었다면 이번 곡은 상대에게 목마른 감정을 감성적으로 풀어내어 전곡 재생 시 대비되는 잔상을 남긴다. 뮤직비디오의 경우 'Spicy'와 같은 하이틴으로 구성되는데, 과거 미국 드라마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인트로와 의상, 세트 등은 레트로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I'm Unhappy

트랙 비디오 중에 가장 반응이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공포영화 같기도 한 뮤직비디오의 인트로는 시작과 동시에 주목도를 상승시키고, 곡 컨셉과 조화롭게 몽환적이면서도 음침한 분위기를 이어간다. 미니멀한 트랙과 단조로운 보컬은 감상에 거부감을 없애고 친근함으로 다가오지만, 그 속에 담긴 메시지는 다소 심오하다. SNS의 속 자신과 현실에 괴리감을 느껴 더이상 남들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겠다는 내용의 가사는 뮤직비디오에서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약 2분 30초 동안 이어지는 ‘군중 속의 고독’은 곡의 메시지를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균등하게 배치된 파트 덕에 균등한 분량과 순서대로 이어지는 뮤직비디오는 시각적인 편안함을 제공한다. 그러나 짧은 분량 탓일까, 상관관계에 대한 설명은 없고 그저 고독함을 표현하기에 급급하다. 시니컬하게 부른 노래만큼이나 시니컬하게 표현된 비주얼이다.



‘Til We Meet Again

제목에서부터 팬송임을 드러내는 곡이다. 따뜻한 어쿠스틱 기타와 맑은 벨소리에 어우러진 아름다운 스트링 연주가 인상적인 발라드 곡으로 멤버들의 떼창으로 더욱 따뜻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마지막 트랙에 배치되어 함께 있지 않아도 언제나 음악으로 하나되어 이어져 있다는 메시지를 담아 팬들에게 전달하는 이 곡은 팬송으로 포장되지만, 한편으로는 곧 마주할 광야에 대한 암시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우릴 연결해 줄 테니'의 가사는 아이싱크를 연상케 하고, 다시 만난다는 메시지는 REAL WORLD로 넘어오면서 잠시 헤어진 nævis를 떠올린다. 이러한 복합적인 이유가 이 곡이 5번 트랙에 배치된 이유이다.




전체적으로 힘을 많이 뺀 앨범이다. 전체적인 구성은 [몽환 - 신나는 - 매혹적인 - 가벼운 - 몽환 - 몽환]으로 이어지고, 사실상 타이틀 곡과 3번 트랙을 제외하고는 전부 비슷한 결이다. 아마도 광야를 벗어나기 위한 시도를 앨범 컨셉과 타이틀 곡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닌 수록 곡에서도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음악이 무겁고 화려하면 아무리 메시지에 광야가 없어도 이미 각인된 에스파의 강렬한 광야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을 것이기에 조금 단조롭더라도 과감히 이러한 선택을 한 것 같다.


모든 곡을 감상하고 난 뒤의 든 생각은 ‘그래서 그 다음은?’이다. 다른 팀과 달리 시공간의 차원에서 확실한 세계관을 주장하던 에스파이기에 다음 과제는 어떻게 해결할까 싶은 의문이 들었다. 한 번 더 REAL WORLD 속의 앨범을 내자니 팀의 정체성이 희미해지고, 광야로 돌아가자니 날고 기는 동기들 사이에서 또 한 번 모험을 시도해야 하는, 여러 변수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번 앨범은 에스파의 과감한 선택과 그에 따른 성공적인 결말을 가져왔지만, NEXT에 대한 기대감보다도 우려와 찝찝함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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