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레 흐르는 악(惡), 그 속에서 흔들리는 삶.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 하마구치 류스케

by 무딘날

물이 아래로 흐르듯,

악도 그렇게 자연스레 흐른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대한 질문


악(惡)은 정말 존재하지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를 둘러싼 이 폭력과 부조리는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해 ‘악은 하나의 실체로서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답한다. 대신, 영화는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물이 자연스레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악도 그런 자연스러움에 저항하지 않고 타인을 밀어내며 흐르는 모든 과정, 그 자체라고 말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나가노현의 작은 마을 하루사와에서, 주민들은 자연의 순리를 이해하고 그 일부로 살아간다. 타쿠미는 마을의 심부름꾼으로, 매일 아침 숲의 샘에서 물을 긷고, 장작을 패고, 딸 하나와 조용한 일상을 보낸다. 그의 입에서 반복되는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대사는 영화를 관통하는 메타포이다.


자연의 내음 아래에 평온함을 유지하던 이 마을에 도쿄의 연예기획사가 글램핑장 건설 계획을 들고 나타나면서 균열이 시작된다. 코로나19 보조금을 활용하려는 이들의 계획은 '재난 자본주의'(disaster capitalism)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논리가 합리적이고 ‘자연스러운’ 시장 경제의 흐름이라 주장하지만, 그 흐름의 끝에는 오염될 계곡물과 파괴될 생태계, 그리고 삶의 터전을 위협받는 하류의 존재들이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의 진짜 질문이 시작된다.


나에게서 밀려난 무언가를 보며 “어디론가 가겠지”라고 생각하는 그 무심함이야말로 우리를 끝없이 아래로, 악(惡)으로 흘려보내는 원동력이 아닐까.


우리는 흐르고 흘러서 그 끝에 치인 누군가가 썩어 문드러진 사슴의 유해처럼 될 것을 알면서도, 혹은 모르고 싶은 채로 그 흐름에 몸을 맡긴다. 이 거대한 흐름에 잠시 저항이라도 하려 하면, 그 자체로 상처를 입게 된다. 이는 권력과 자본, 그리고 폭력이 사회의 상류에서 하류로 어떻게 ‘자연스럽게’ 전가되는지에 대한 헤게모니의 작동 방식을 은연 중에 드러낸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이 ‘자연스러운 악의 흐름’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단순한 환경 영화의 서사를 넘어, 자연스러움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폭력을 은폐하는지, 그리고 그에 대한 저항은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하는지를 영화적 시선으로 그려낸다.


비껴서는 카메라와 불안의 미학으로 그려내는 저항적 시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카메라는 관객을 편안하게 두지 않는다. 많은 영화평론가분들이 지적하듯, 하마구치는 의도적으로 불편하고 탈중심적인 프레이밍을 사용한다. 관객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부여하는 안정적인 중심 구도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인물을 프레임의 가장자리로 밀어내고, 풍경의 일부처럼 작게 담아낸다.


이 탈중심적 시선은 관객으로 하여금 화면 속 ‘다른 중심’을 찾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게 만들며, 결과적으로 “메시지에 대한 의심이자 악에 대한 의심”을 증폭시킨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불안정한 카메라 워크와 예측 불가능한 롱테이크는 관객이 안전한 관찰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마치 “자연스러운 총성에 빗맞은 존재”가 되어 사건의 한가운데로 내던져지는 경험을 하게 만든다. 우리는 더 이상 안정된 시선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선악을 규정할 수 없다. 대신 스크린 앞에 피투된, 영화가 만들어내는 불안과 모호함 속에서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모든 것들을 의심하는 존재가 된다.


특히 글램핑장 설명회 장면은 이러한 저항적 시선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카메라는 양측의 입장을 공평하게 담아내는 대신, 어색한 침묵과 미묘한 표정의 변화, 초점을 잃은 시선들을 길게 비춘다. 여기서 개발 논리의 허구성과 마을 주민들의 숨겨진 이해관계를 동시에 목격하게 되며, 단순한 선악 구도를 해체하고 악의 구조적 작동 방식을 인식하게 된다. 관객들로 하여금 고정된 관점을 거부하고 스스로 유동적으로 의미의 흐름을 추적하도록 만든다.


악이란 없다. 그것은 어쩌면 평범함이다.


영화의 제목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서구 기독교의 ‘선의 결핍(privatio boni)’ 이론과 불교의 공(空) 사상이 만나는 지점에서 그 깊이를 더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서구 철학이 악을 선의 부재 상태로 이해했다면, 모든 존재의 무상성(無常性)과 상호의존성(相互依存性)을 강조하는 불교적 세계관에서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 영화에 “분명한 악역이 없다”는 점은 바로 이 철학적 사유를 반영한다. 도쿄의 직원들은 무지하고 서툴 뿐, 본질적인 악인은 아니다. 마을 사람들 역시 순수한 자연의 수호자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분을 삶의 일부분으로 치환하며” 살아가는 각자의 이해관계를 가진 존재들이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이를 '당연함', '자연스러움', '현실적 인식'으로 여긴다. '현실은 녹록치 않다.'는 인식으로 타자를 파괴하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포장한다. 하류로 유해 물질의 전가를 지속하듯, '나만 아니면 된다'며 반대 논리를 일축하고 ‘자연스러운 시장 논리’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욕망을 인정해야하는 것은 맞지만, 그 욕망이 타인의 삶을 파괴한다면 그것은 결국 욕망의 억제와 맞닿아있게 된다. 논리의 기반이 욕망의 제로섬 게임이 되는 순간 그것은 욕망이 아닌 폭력으로 변질된다. 하마구치는 여기서 자연 자체를 신성시하는 생태 파시즘에서 벗어나, 입장이 다를 뿐인 이해관계가 자연스러운 폭력으로 변질되어 가는 모습을 전시한다.


결국 영화가 말하는 것은 악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악이 우리 곁에 머무르는 ‘과정’이다. 감독이 긴 호흡의 롱테이크와 일상의 시간을 지속적으로 전시하며 즉각적인 도덕 판단을 유보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저 현상의 흐름을 경험할 뿐이다. “악의 느낌, 자연의 느낌, 곧 이는 느낌일 뿐,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인식이 영화적 시간을 통해 체화되는 것이다. 음악감독 이시바시 에이코의 음향 설계 또한 이러한 경험을 심화시킨다. 이성적 판단에 앞서 우리는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윤리적 책임을 느끼게 된다. 대사 없는 긴 시퀀스 동안 펼쳐지는 자연의 소리와 음악의 층위는 언어 이전의 감각적 차원에서 자연을 마주하게 하고, 잊혀졌던 우리의 윤리적 감수성을 일깨워 내적 혼란을 가중시킨다.


하늘로 향하는 처절한 격류. 그 흔들림.


영화의 마지막, 타쿠미의 딸 하나가 실종되고, 그를 찾아 나선 타쿠미와 도쿄 직원들의 행방이 모호해지는 결말은 거대한 충격과 함께 심연과 같은 질문을 남긴다.


타쿠미의 마지막 행동은 폭력인가, 구원인가, 아니면 '당연한' 자연의 순리인가?


하마구치는 여기에 대해 어떠한 명확한 답도 제시하지 않는다. 이 열린 결말이야말로 영화 전체가 구축해온 저항의 정점이다. 영화는 인과관계에 기반한 전통적 서사를 해체하고 관객을 혼돈 속에 남겨둔다. 이 혼돈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연스러운 흐름’에 내재된 폭력성을 온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하나의 실종과 타쿠미의 폭력적 행동은 더 이상 아래로만 흐를 수 없다고 외치는, 시스템의 순응을 거부하는 거대한 격류의 발생이다. 그것은 아래로 흐르던 물길을 거슬러 오르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다. 어쩌면 그 ‘거부’는 더이상 존재할 영역을 잃어버린 존재들의 불가피한 행동양식일지도 모른다.


이 마지막 시퀀스에서 우리는 마침내 이 영화의 카메라가 왜 그렇게 불안하게 흔들리고, 왜 인물을 비스듬히 비껴서 담아냈는지를 깨닫게 된다. 내내 어딘가 비스듬히 빗겨있던 영화 속 카메라가, 끊임없이 불안하게 흔들리던 그 시야가, 인간을 온전하게 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던 그 프레임을 벗겨내고 하늘을 거슬러 올려다본다. 아래로만 향하던 ‘자연스러운’ 흐름을 거부하고 수직으로 솟구치는 이 마지막 시선은, 기존의 지배적 시각 체계에 균열을 내는, 그러나 날아오르지는 못한 채 땅에 붙어있어야만 하는 미약한 혁명을 보여준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악은 흐르지 않는다’는 수동적 부정이 아니다. 오히려 악의 흐름을 가시화하고, 그 거대한 흐름 앞에서 우리가 어떤 저항을 할 수 있는지 묻는 가장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영화적 실천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관객 각자가 “자연스러운 총성에 빗맞은 존재”가 되어, 일상의 안온함 속에 숨겨진 폭력과 부정의에 새로운 감수성을 획득하도록 이끈다. 영화는 명쾌한 해답 대신, 우리 삶을 지배하는 ‘자연스러운’ 모든 것들에 저항하고 격류를 일으킬 것인가를 묻는, 묵직하고도 아름다운 질문을 남긴 채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 질문이야말로 이 시대에, 영화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저항의 형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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