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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에 대한 새로운 시선. 추래한 나를 인정하는 용기.

<아사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다크소울>

by 무딘날


'성장이란 무엇일까'는 항상 고민하게 되는 주제이다. 사람에 대한 불신에 휩싸여서 가면을 쓰기 시작하는 걸 보고 누군가는 "이제 좀 성장했구나?" 이러기도 하고, 누구는 남한테 막 대하던 사람이 마음을 바꾸고 선행을 베풀면 "이제야 정신차리고 성장했네?"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그래서 '성장했구나'라는 말 속에 그 사람이 생각하는 주관적인 성장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대게 어떤 사람이 '성장'이라는 단어를 입밖으로 꺼낼 때는 '이제야 좀 내가 생각하는 <잘 사는 삶>에 가까워지고 있구나?'라는 사고를 내포한다. 사람들, 특히 어느 정도의 오만함을 안고 사는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대부분 자신이 하는 행위, 자신이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모든 말과 행동의 기저에 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이상과는 빗나가게 사는 사람들은 '어리숙한 사람'이라 규정짓는다.


가족을 이루고 책임을 지는 삶을 살면서 스스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혼자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 싶은 삶을 꿈꾸는 사람은 아직도 어린 티를 못 벗은 아이로 치부한다. 정작 자유롭게 사는 사람 중 타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자아의 실현을 원하는 사람들은, 반대로 그런 사람들을 보며 '아직도 짓눌려 사는 삶에 머물러 있구나?'하고 보기도 한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 각자의 주관성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성장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오염되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각자의 삶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채, 어떤 길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내게 성장에 대한 재미있는 논의를 하게 만들어 줬던 영화, 그리고 게임이 있다. 하마쿠치 류스케 감독의 <아사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미야자키 히데타카 감독의 <다크 소울> 이 세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세가지 작품을 관통하는 성장에 대한 하나의 관념은 '성장이란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용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보통 성장이라는 것은 특정하게 현재 머물고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작품들에서는 결국 틀 안에 갇혀있을 수 밖에 없는 나의 부박한 세상을 제대로 인지하고,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원점으로 다시 돌아올 줄 아는 용기를 가지는 것을 성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가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성장'을 논하고 있다.


아래는 영화 <아사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먼저 <아사코>를 먼저 보면, 이 작품은 짧게 말하면 아사코라는 여자의 불륜 이야기이다. 바쿠라는 자신의 전 남자친구가 있는데 어느 날 그가 훌쩍 사라져버렸고, 이후에 그 전남친과 똑닮은 남자와 만나 결혼을 한다. 그런데 이 여자 앞에 갑자기 사라졌던 그 전 남친이 다시 나타난다. 아사코는 난 이제 예전과 다르다며, 결혼을 한 여자다라고 마음을 다잡지만, 중간에 결국 그 바쿠라는 남자를 따라 도피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내 아사코는 그런 선택을 하게 된 어리숙한 자신을 인정하고 남편에게로 돌아간다. 남편은 그런 아사코를 받아는 주지만 평생 용서하지 못 할 것이라는 말을 남긴다. 아사코는 그런 남편의 말을 듣고 알고 있다며 받아들인다. 이후 남편은 마지막 장면에서 더러운 강물이 세차게 바라보며 더럽다는 말을 남기고, 그 옆에서 아사코는 그렇지만 아름답다는 말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이며 영화는 끝이 난다.


내용으로만 보면 한심한 여자의 불륜 미화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영화를 보게 되면 구성과 연출들을 통해서 단순히 자극적인 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아사코의 모습을 통해 결국 사람이란 자신만의 한심한 모습, 변할 수 없는 무언가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수많은 일들을 겪으며 마치 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그 결과 우리 스스로가 성숙하고 변하였다는 착각 속에 빠져서 살아간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변했다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피상적인 것들일 뿐, 우리 안의 본질적인 성향과 모습들은 그대로 남아있다. '성장'이라고 부르며 우리가 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과정은 하룻밤의 행복한 꿈처럼 번뜩이며 흘러가지만, 막상 눈을 떠보면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단순히 변하지 못하는 나의 추한 본질을 숨기기에 급급하며 혼자 만족을 하고 살아갈 뿐. 아사코가 언젠가 깨지기 마련인 형태만을 따라서 바쿠를 쫓았던 것처럼 말이다.


앞서도 말했듯, 이 영화에서 인간의 성장이란 스스로가 원래의 자신으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성숙하지 못한, 변하지 못하는 자신의 본질적인 추악함과 더러움을 인정하고, 그 불변성으로 인해 벌어질 수 밖에 없는 주변의 불가피한 일들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 또 그것들에 어떻게 더 잘 대처해야 할까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 그것이 곧 성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여러 부분에서 성악설의 아이디어와도 맞닿아있다. 많은 사람들이 성악설을 논할 때 큰 착각을 하는 부분이 있다. '인간은 원래 악하니까 그냥 받아들여라'라는 식의 논리를 내세우는 것.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악의적이고 자의적으로 자신의 윤리적, 지적 게으름을 정당화시키는 말이다. 성악설의 근간은 인간은 태생적으로 이기적이고 악함을 품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선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 한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추함에 대한 인정과 더 나아지기 위한 부단한 노력. 그것이 있어야만 인간으로서 성장할 수 있다. 세차게 흐르는 더러운 강물처럼 끊임없이 자신의 더러움으로 주변을 상처입히고 피해를 주는 것을 멈출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씻어내고 치워가며 자신을 인식해가는 삶. 그 삶의 현장을 더럽지만 아름답다고 이 영화도 인물들의 입을 빌어서 말해주고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도 이와 비스무리한 이야기를 메인으로 다룬다. 많은 분들이 각 장면이나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상징을 상세하게 해설해주시지만, 결국 이 영화의 가장 큰 테마는 '우리 시대의 동화'라고 생각한다.


가장 인기있는 캐릭터 중 하나인 가오나시를 보면, 사실 상당히 기괴한데도 사랑을 받는다. 그 이유는 뭘까. 그것은 현실의 우리 모습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이 가오나시라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동화의 세상에서 순수하게 자신을 찾아나가는 여정을 걷는 치히로에게, 끝없이 속물적인 것들을 받쳐가며 애정을 갈구하는 가오나시는 그 세속적인 모습을 성장이라고 생각하는 보통의 우리들에게 큰 메시지를 남긴다.


치히로의 모습은 우리가 어린 날에 품고 있던 '당연한 것들의 가치'를 보여준다.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 타인에 대한 배려, 본질을 바라보려고 하는 마음, 권선징악, 노력은 보답받아야 한다는 믿음. 우리는 이미 어린 시절에 '동화'에서 사람이라면 따라야 한다는 당위적 가치들을 다 배워왔다. 하지만 그것들을 끊임없이 잃어가며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성장의 과정'이라고 합리화한다. "세상이 원래 그런 거 아니야? 원래 그런 건데 너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리숙해서 그래. 세상을 몰라서 그래. 현실 파악을 좀 해." 이런 식으로 우리는 점차 당연함을 잃어가며 살아간다. 그걸 성장이라고 부르며 마치 긍정적인 것이라 생각하게끔 만들면서 말이다.


그렇기에 치히로는 그 악독한 어른들의 세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이름을 되찾고, 자신이 들어가기 싫었음에도 어른들을 따라 들어가야 했던 초입문 앞으로 되돌아간다. 우리가 마땅히 있었어야만 하는 그 제자리로. 흔한 말로 초심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 그 당연함으로. 돌아가는 일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자라면서 알게 되고, 그렇기에 우리는 더 쉬운 길을 성장이라고 우기며 걸어나간다. 그러나 결국 이 영화에서는 당연함으로 돌아갈 줄 아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 진정한 성장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미야자키 히데타카 감독의 게임 <다크소울> 시리즈도 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RPG라고 부르는 게임들은 단순하게 말해 레벨업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성장을 하는 게임이다. 레벨업을 하지 않으면 물리칠 수 없는 불합리한 것들이 그 세상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레벨업을 성장의 과정으로 필수적으로 거치게 된다. 그리고 레벨업의 과정은 화려한 스킬들과 더 좋은 장비 등 수많은 자극들에 둘러쌓여있고, 우리는 그 자극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그 성장에 취하게 된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속된 말로 '사이다스러움'을 무한 레벨업을 통해서 얻는 것이다.


하지만 <다크소울>을 하는 유저들은 그 끝에 도달하고 보면 레벨업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떠한 갑옷도 입지 않고 맨몸으로 게임에 다시 도전을 한다. 물론 대부분 자신이 피지컬적인 성장을 한 것을 자랑하기 위함이 있지만, 그러한 게임 외부적인 동기를 떠나서 화려한 레벨업이 없이 더 고된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 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다크 소울>이라는 게임은 우리가 삶의 고난을 직면하고 헤쳐나가는 과정을 어떠한 RPG보다도 더 실증적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 게임 속에서 어떠한 사실관계도 명확하게 주어지지 않는 단서들을 접해가며 자신만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도 우리가 삶 속에서 만들어나가는 우리만의 가치관을 구축해가는 과정과 닮아있다. 아무 의미도 없을 수 있는 단서들조차도 스스로 계속 의미를 부여하며 우리가 나아가는 이 길의 가치를 직접 만들어가는 것이 말이다. 끊임없이 맨몸으로 도전하게 되는 그 과정을 보면, 결국 '역경을 헤쳐나가기 위해 해야 할 것들을 우리는 이미 처음부터 알고 있다'는 앞의 영화들의 메세지와도 일맥상통한다.


우리는 그 역경을 헤쳐나가는 법을 이미 알고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인간의 역사성에 따라 만들어진 그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가치들로 우리에게 가르쳐주듯이, 이미 앞서 내가 수많은 죽음을 경험하며 알게 된 함정의 위치와 보스들의 패턴, 아니면 다른 많은 사람들이 남긴 공략들과 영상들을 통해서 말이다. 그냥 몇번 구르고, 때리고, 욕심을 버리고 체력을 보전하며 당연히 해야 할 동작을 따르면 조금 더 힘들더라도 화려한 스킬이나 훌륭한 장비, 큰 레벨업이 없이 어떻게든 끝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그 당연한 것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몸과 마음이 준비되어있지 않고, 대부분은 화려한 형태에 의존하며 그 과정을 더 쉽게 헤쳐나갈 방법만 모색하게 된다. 우리가 그 쉬운 길을 가지 않으려면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용기가 필요하고, 그 당연한 가치를 안고 엔딩에 다다르면 그러한 자신에게 더 큰 자부심을 안고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이 성장이라고 이 작품 또한 말하고 있다.


결국 불가피하게 그 제자리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한없이 나약한 나 자신을 인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돌아갈 줄 아는 용기가 곧 인간의 진정한 성장이다.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삶에 진정한 가치를 스스로 부여할 수 있다고 말을 하고 있다. 이 성장에 대한 새로운 시선은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아직도 나 자신은 어떠한가를 고민하게 한다. 성장이란 무엇일까. 그 어려움을 과연 나는 용기있게 품고 갈 수 있을까. 앞으로도 계속 고민하게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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