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저출산, 그 원인에 대한 고찰

개인의 지속가능성과 사회의 효율성 추구 관점에서 바라본 대한민국의 저출산

by 무딘날

한국의 저출산 현상과 인구 붕괴 문제의 심각성이 극에 달하고 있다. 현재까지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해 많은 예산을 편성하며 대처하려 했으나, 대부분 직접적인 재정 지원 정책이 기본 바탕이 되었고 이는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저출산을 유발하는 독립변수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이미 도출된 ‘저출산’이라는 결과값 자체만 다루는 정책들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많은 이들이 저출산이라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 근본 원인이 한국의 거대한 구조적 결함에 있다고 지적하며 이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구조적 결함을 지적하는 사람들조차 그 구조가 어째서 발생하며, 어떻게 유지되고, 왜 개선될 수 없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이에 나는 한국에서 특히나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는 이 착취적인 구조의 순환이 어떻게 유발되고 유지되는지를 개인과 사회의 연결성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어 보고자 한다. 또한 그 요소를 파악한 이후에는 왜 한국에서만 이토록 급격하게 인구 붕괴가 가속화되고 있는지를 ‘효율성’ 개념을 바탕으로 설명할 것이다.


먼저 개인과 사회가 연결성을 갖는 방식을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지속가능성은 다르게 말하면 존재의 영속성에 관한 이야기이며, 미래의 가치를 현재로 어떻게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한 개념이다.


흔히 이 개념은 기업 가치를 평가할 때 쓰이기도 한다. 기업 가치 평가의 가장 기본적인 가정은 ‘이 회사가 지속 가능하다’는 것이며, 재무 가치를 따질 때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것 또한 미래 가치를 현재로 끌어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 기준은 실제로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가치’라는 추상적 개념을 가시화하기 위한 것이며, 여러 문제점이 있음에도 대다수가 그 측정 방식에 동의하기에 성립된다. 이는 개인이 사회와 연결되는 과정에서도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이 요소를 통해 연결성을 설명하려면 ‘인간은 왜 사회를 유지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사회 유지의 관점을 많은 철학자가 사회계약론 등 다양한 측면에서 다루지만, 나는 ‘그 사회의 가치를 개인이 어떻게 평가하느냐’로 이 문제를 해석하고자 한다. 이미 만들어진 사회 속에서 개개인이 자신의 삶을 꾸리기도 벅찬데, 굳이 이 사회가 지속되도록 노력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혹은 동시대 집단이 기여하지 않아 사회가 무너진다 해도 그것은 어차피 나의 생애가 끝난 이후일 텐데 말이다.


이 두 지점을 연결하는 기초적인 매개체는 ‘가정’이다. 사회의 지속가능성은 개인과 별개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지속가능성이 모여 이루어지는 개념이다. 그리고 개인의 지속가능성은 존재의 지속성으로부터 나오며, 개인은 자신의 지속성을 ‘가정’이라는 개념을 통해 확장한다. 즉, 개인이 자신의 삶을 넘어 미래 가치까지 높게 평가할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은 가정을 형성함으로써 얻는 ‘대물림의 가능성’에서 나온다.


개인의 삶은 유한하기에 가정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사회적 존재로서 영속성을 가질 수 있고, 그 영속성이 바탕이 되어야만 미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인간이 미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핵심 요인은 ‘미래에 얼마나 더 나아질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이며, 이것이 개개인의 동기부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은 개개인이 존재의 영속성을 꿈꿀 수 없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미래 가치를 평가하거나 스스로 동기를 부여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현재의 개개인들은 존재의 지속가능성을 꿈꿀 수 없게 되었는가? 왜 가정을 이루고 아이 키우기를 꺼리는가? 이는 거시적 측면과 미시적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이를 종합하여 안정성, 확장 가능성, 상대성의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거시적으로는 과거와 달리 성장 동력이 고갈되어가는 사회적 상황이 있다.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을 겪으며 성장의 가속도가 감소하는 지금의 사회는 탄성을 잃은 고무줄처럼 늘어져 버렸다. 물리적 성질을 보강하며 힘을 가해야 탄성이 유지되는데, 추가 조치 없이 임계점을 넘어선 자극만 지속함으로써 회복력을 잃은 것이다.


그 결과 사회는 우리에게 ‘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부여했다. 이러한 거시적 상황은 개개인의 인식에 영향을 미쳐 미시적 문제를 심화시킨다. 미시적 문제들은 매우 다양한 형식으로 나타나지만, 근본 원인은 개인과 사회의 분리에서 나온다. 이는 기존 공동체의 해체와는 다른 의미다. 혹자는 만연한 개인주의나 기술 발달에 따른 네오 모더니즘을 언급하지만, 나는 개인주의가 조직을 해체하기보다 다변화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본다. 따라서 내가 말하는 분리는 개인주의보다는 고립주의와 비관주의의 혼합에 가깝다. 앞서 설명했듯 개인과 사회의 연결성은 개인이 지속가능성을 품을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며, 이는 개인이 인식하는 안정성, 확장 가능성, 상대성으로 설명된다.


첫째로 개인 지속가능성의 출발점은 ‘현재의 안정성’이다. 현재가 안정되어야 인간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으며, 사회는 이를 보장할 의무가 있다. 사회 유지를 위해 개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요가 착취적이지 않은 포용적 방식으로 발현될 때 개인은 안정성을 느낀다. 포용적 사회의 핵심은 개인이 높은 수준의 ‘선택의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이다. 이는 기회비용 측면에서 실패 가능성과 뒤따르는 비용, 성공 보상으로 분석할 수 있다.


사회는 실패 가능성을 직접 낮추기보다 실패에 따른 비용을 최소화하는 데 집중해야 하며, 성공 보상을 지나치게 차별적이지 않은 수준에서 가시화해야 한다. 직접적인 방식을 피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이 간접적인 유도를 통해 자신이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임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선택이란 개인이 스스로 감당할 수 있다고 받아들일 때 진정한 자유로움을 갖는다. 이렇게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해질 때 개인은 존재 유지에 안정감을 느끼고, 자신을 넘어 타인을 향해 자아를 확장하며 건강한 사회적 상호작용과 안정성 획득에 기여한다. 이 단계가 ‘개인의 내적 동기부여 과정’이다.


이것이 보장될 때 개인은 자아를 사회적으로 확장하는 ‘미래로의 확장 가능성’ 단계로 진입한다. 이 단계는 개인이 ‘사회적 존재로서’ 동기부여가 되는 ‘외적 동기부여 과정’이며, 그 구체적 구현이 ‘가정’이다. 부모는 대개 자녀 양육 과정에서 자신의 고난과 열등감을 투영하여 자녀가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라거나,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으로 자녀가 자신처럼 살기를 희망한다. 이는 상당 부분 ‘자기애’의 영역으로, 가정 형성은 자신의 자아가 다른 존재로 확장되는 과정이다. 결국 사회란 가정이라는 ‘영속적인 개인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 안정성이 해소되지 않는 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는 계층조차 유일한 안정성만을 목표로 삼으며 획일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 두 측면은 주로 ‘상대성’에 의해 평가받는다. 부의 양극화와 기술 발전으로 타인의 삶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상대성의 부정적 측면이 부각되었다. 바람직한 사회라면 상대성이 착취와 차별이 아닌 개인 간의 차이로 존재해야 하며, 이를 통해 다원주의 사회로 발전할 수 있지만, 현재는 계급적 척도로써 작용하는 점이 문제이다. 상대성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려면 개인의 자아 인식이 확고하고 그 확장이 다양성을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만 가정에 대한 인식은 ‘생존 비용을 증가시키는 집단’이 아닌 ‘삶을 풍요롭게 발전시키는 공동체’로 재정립될 수 있다.


저출산의 원인은 결국 내적 자아를 건강하게 확립하기 위한 사회적 안정성의 결여에서 시작된다. 현재의 개인들은 자유로운 선택보다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불가피한 선택을 강요받는다. 자유로운 선택에 따르는 막대한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일부 상위 계층뿐이기 때문이다. 확정성의 세계에서 불확실성의 세계로 패러다임이 전환되면서 성장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모호해졌고, 자본주의의 효율성 측면을 부각해 이 불안정성을 가려왔다. 그러나 효율성에 대한 잘못된 환상은 개인들의 집단적 실패를 가속화했다.


여기서의 핵심적인 문제는 효율성이라는 함수가 비용을 줄여준다는 오해, 혹은 개인의 비용 절감이 사회 전체의 효율성 증대라는 과대해석에서 발생한다. 최근의 플랫폼 산업이나 숏폼 콘텐츠 유행은 이러한 오해를 활용하지만, 실질적으로 사회적 비용을 줄이지 못했다. 단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비용을 전가하고 있을 뿐이다.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 법칙처럼, 효율적인 결과물을 얻었다고 믿는 순간에도 총 에너지는 보존되며 무질서도가 높은 다른 형태의 에너지 낭비가 일어난다. 즉, 효율성을 추구하며 절감했다고 믿은 모든 비용은 다른 영역과 계층으로 전이되었을 뿐이며, 현재의 암울한 결과는 그 전이된 비용이 가시화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한국에서 이 추세가 가속화되는가? 나는 그 원인이 한국의 기형적이고 극단적인 효율성 추구에 있다고 진단한다. 효율성은 자원 최소화로 최대 성과를 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인적 자원이 주를 이루는 한국은 시간과 노동력 최소화에 방점을 찍어왔다. 노동력 투입 최소화는 개인이 가져갈 수 있는 성과가 한정됨을 의미한다. 또한 성과를 내기 위해 과정을 극도로 단순화한 산업화 방식은 ‘한강의 기적’을 낳았으나, 그 과정에서 누적된 문제들이 병목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큰 성과는 소수에게 편중되고 부족했던 물리적 자원은 더욱 한정되었다.


이는 한국의 문화적 측면에 영향을 주었다. 첫째로 극심한 경쟁 문화다. 세계 최고 수준의 서울 집중도는 물리적 자원의 한계를 극명히 보여주며 부동산과 일자리 문제를 심화시킨다. 한국의 도시 집중화가 특히 해결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것이 특정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 취업, 육아, 노후 건강 관리까지 전 생애주기의 인프라가 오로지 서울에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단계에서도 서울을 떠나서는 필수 요소를 누릴 수 없는 구조이기에, 한 영역의 해결책이 제시되어도 다른 영역의 결핍이 두드러지는 총체적 난국에 처해 있다.


둘째로 사회적 성취를 지나치게 집단주의적이고 계급적으로 형성하는 문화다. 한국은 구시대적 집단주의와 개인주의가 모호하게 결합하여 다원주의로의 확장성을 잃었다. 서구의 개인주의가 투쟁과 학습을 통해 개인의 권리와 책임을 조화시킨 것과 달리, 한국의 개인주의는 급격한 성장과 인터넷 보급을 통해 충분한 학습 시간 없이 유입되었다. 그 결과 자아 인식조차 전통적 인적 종속에서 벗어나지 못해 집단으로부터의 인정이 자기표현의 목적이 되었다. 이는 미디어나 SNS를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개인을 노동력으로 보는 구시대적 인식과 출산을 비용으로 보는 개인주의적 인식이 충돌하며 개인과 사회의 연결성은 끊어지고 고립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은 세대와 성별 문제에도 적용된다. 세대의 경우, 나는 이를 ‘끼인 세대 콤플렉스’라 부르고 싶다. 이들은 전통적 가치와 현대적 가치의 괴리를 직격으로 맞으며 부모 부양과 자녀 양육의 이중 부담을 짊어지고 있다. 극단적 효율성 추구 속에서 이전 세대보다 더 많은 노력을 투입하지만 경제 성장 둔화로 더 낮은 보상을 받으며 번아웃에 시달린다. 국민연금에 대해 ‘안 내고 안 받겠다’는 의견이 많은 것은 사회적 지속가능성이 이 세대에서 단절되었음을 보여주는 현대판 고려장과 다름없다. 완충 역할을 해야 할 사회가 포퓰리즘에 기대어 이 세대를 방치한 결과, 이들은 시간 탄력성을 잃고 현재 유지 전략만을 택하게 되었다.


성별 측면 또한 가부장적 잔재와 고갈된 자원을 둘러싼 경쟁 갈등이 혼재되어 있다. 여성은 가정과 직장 사이에서 이중 부담과 경력 단절 위협에 시달리고, 남성 또한 남성성을 강요받으며 군 문제나 육체 노동에 대한 존중 없이 치열한 생존 경쟁에 내몰린다. 자원이 고갈된 상황에서 남녀는 더 이상 협력 대상이 아닌, 서로의 이득을 박탈해야 하는 배타적 경쟁 관계로 전락했다.


많은 학자가 파괴적 창조를 말하지만, 이는 성장이 담보된 시대의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 기술적 예측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당위적 논의와 이 당위를 현실화시킬 수 있는 실질적 대안이다. 회복 탄력성을 잃은 상황에서 구조를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진정한 변화를 원한다면 사회가 파괴 이후를 감당할 동력을 갖추게 하는 ‘비파괴적 창조’의 과정이 필요하다. 기존 구조를 무너뜨리는 데 드는 사회적 비용은 기득권층조차 감당하기 어렵기에 사회는 관성에만 의존하고 경직될 수밖에 없다. 비파괴적 창조는 완전한 파괴의 불가능성을 인정하고 그 틈새를 활용한다. 기존 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공존하는 과도기에서는 파괴와 창조 사이의 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모든 학술적 의미의 파괴는 실제 사회에서 불완전한 형태로 나타나 잔여 불안정성을 남기며, 이는 기득권뿐 아니라 모든 계층의 생존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파괴의 이상보다는 공존과 전환의 실천적 통찰을 통해 인구 붕괴라는 거대한 흐름에 맞서야 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AI 시대의 착각: 창의적 관점만 있으면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