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과 ‘자격증’은 파괴되어도 '공부'는 파괴되지 않는다
각종 미디어를 중심으로 "대학은 고장났다(College is broken)"는 구호가 떠돌고 있다.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이 대졸 공채와 별개로 고졸 천재들을 모셔간다는 소식은, 한국 사회를 지탱하던 학벌주의와 전문가의 권위가 AI라는 파도 앞에서 무너질 것이라는 막연한 공포를 자극한다.
하지만 이 '학벌 파괴'의 현상을 '공부의 종말'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한 착각이다. AI가 발전할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더 단단한 '축적된 지식'과 '지적 겸손함'이다.
많은 이들이 "이제 암기는 필요 없다. AI에게 창의적으로 질문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AI를 제대로 써보지 않은 사람들의 낭만적인 기대일 뿐이다. 창의적 관점과 비판적 사고는 결코 진공 상태에서 나오지 않는다. 내가 기본적으로 숙지하고 있는 '축적형 지식'이 있어야만 AI가 내놓은 답이 훌륭한지, 혹은 그럴싸한 거짓말인지 검증할 수 있다.
바이브 코딩이든, 회계 처리든, 법적 검토든 마찬가지다. 해당 분야의 지식을 머릿속에 쌓아 놓은 전문가가 AI를 도구로 쓰는 것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질문만 던지는 것은 결과물의 질과 양에서 차원이 다르다. AI 시대에 도태되는 것은 '지식을 쌓은 전문가'가 아니라, 지식에 매몰되어 창의적 관점을 잃은 사람들일 뿐이다. 지식 쌓기 자체를 포기한 사람은 AI의 오류조차 잡아내지 못하는 수동적인 사용자로 전락할 것이다.
구글이나 테슬라에 뽑혀가는 고졸 인재들을 보며 제도권 교육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성급하다. 그들은 대학교육이 필요 없을 만큼 이미 해당 분야에서 대졸자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은, 소위 '넘사벽' 수준의 천재들이다. 즉, 시스템의 결과가 아니라 돌연변이에 가깝다.
한국의 교육 현실에서 그런 고졸 천재가 자생적으로 탄생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가? 개인적으로는 아니라 생각한다. 대다수의 평범한 인재들에게 체계적인 교육과정은 여전히 전문가로 성장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사다리로 남을 것이다. 특히나 한국처럼 미래 설계에 있어서 확실성을 요구하고 보수적인 환경에서는 더욱 그렇다. 대다수의 부모와 자녀들이 실패는 없을 미래라며 속된 말로 ’안전빵‘으로 의대 입시에 몰두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런 나라에서 극소수 천재들의 사례를 들어 대중에게 "공부할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선동에 가깝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은 고등교육이 불필요하다고 향하지 말고, 교육방식의 변화를 이끌 계기가 되어야 마땅하다.
지금 AI 시대에 가장 필요한 자질은 명문대 졸업장이나 전문가 자격증을 넘어서는 '지적 겸손함'이다. "내가 서울대니까", "내가 전문가니까"라는 권위에 취해 내 관점이 무조건 옳다고 믿는 순간, 그 사람은 끝이다. 내 관점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나와 다른 수많은 생각들이 나름의 합리적 근거가 있을 수 있다는 개방성을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AI를 뛰어넘는 통찰을 얻을 수 있다.
AI 시대는 자격증과 학벌이라는 낡은 간판을 찢어버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무지(無知)한 창의성'이 아니다. 애초에 하나의 관점이란 오랜 시간을 거쳐 다듬어진 깊은 지식의 산물이다.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지식을 축적하되, 그 지식 앞에서 오만하지 않고 끊임없이 검증하고 배우려는 '겸손한 진짜 실력'만이 살아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