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2>: 서사는 ‘주입’되지 않고 ‘발굴’된다

대중의 ‘맥락 재창조’가 완성하는 새로운 도파민의 시대

by 무딘날

미디어의 역사는 ‘의미’를 둘러싼 권력 투쟁의 과정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작가와 감독으로 대변되는 창작자는 신과 같은 지위를 누리며 이야기의 속도와 결말, 캐릭터의 도덕성을 독점했다. 관객은 창작자가 정교하게 설계한 의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릇에 불과했다. 그러나 흑백요리사의 흥행 방식은 이 견고했던 ‘서사 주권’의 벽이 무너졌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오늘날의 수용자는 더 이상 완성된 이야기를 듣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파편화된 정보를 직접 조립하고, 맥락을 비틀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창조적 소비자’로 진화했다. 넷플릭스 예능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의 폭발적인 성공은, 바로 이 서사의 주권이 창작자에게서 ‘맥락을 재창조하는 대중’에게로 완전히 넘어갔음을 증명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 변화의 핵심은 ‘도파민 설계’의 방식에 있다. 과거의 리얼리티 쇼가 출연자의 구구절절한 사연이나 성장 배경을 1화부터 친절하게 설명하며 불필요하게 감정 이입을 강요했다면, <흑백요리사>는 이 모든 빌드업 과정을 과감히 생략하거나 압축했다. 김학민 PD가 이종범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듯, 제작진은 시청자의 뇌리에 즉각적으로 꽂히는 ‘설명이 필요 없는 한 장면의 임팩트’ 기획의 최우선 순위에 두었다. 여러 후킹(Hooking) 장치를 뿌려두고, 대중들에게 선택권을 쥐어주는 방식이다.


그 대표적인 장치가 바로 ‘블라인드 심사’다. 미식 전문가들이 안대를 쓰고 입을 벌려 정체불명의 음식을 받아먹는 기괴하고도 강렬한 이미지는 그 자체로 수많은 밈(Meme)의 재료가 되었고, 시청자로 하여금 “도대체 무슨 맛이길래?”, “저 셰프는 누구길래?”라는 원초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제작진은 서사를 주입하는 대신, 시청자가 스스로 서사를 찾아 나서게 만드는 ‘도파민의 뇌관’만을 건드린 것이다. 이 ‘불친절한 임팩트’는 특히나 맛과 향을 알 수 없는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 역설적으로 수동적 관찰자인 시청자를 무한한 상상력을 펼치는 능동적 탐구자로 전환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트리거가 당겨진 순간, 시청자는 프로그램 밖의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유튜브, SNS, 과거 방송 클립, 블로그—로 뛰쳐나갔다. 흥미로운 점은 프로그램 내에서의 분량보다, 시청자들이 외부에서 발굴해 온 정보들이 결합될 때 비로소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완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단순한 권위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대중이 스스로 정보를 찾아 그 권위를 ‘검증’하고 ‘재해석’하는 ‘서사 발굴’의 과정이었다.


임성근 셰프의 사례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프로그램 내에서 그는 특별한 서사 없이 자칫 ‘독불장군 안하무인 빌런’으로 비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클리셰릉 비틀고 확실한 실력으로 증명하는 임팩트를 보이자, 대중들은 그 장면에서 매력을 느끼고 과거 <한식대첩> 등 타 방송에서의 활약상과 유튜브 채널을 발굴하고 공유했다. 그리고 이 정보들을 결합하여 그를 ‘유쾌하고 허세 넘치지만 실력은 확실한 캐릭터’로 재정의했고, 프레임 바깥에서 강력한 서사가 완성됐다.


후덕죽 셰프 역시 마찬가지다. 제작진은 그에게 ‘전설’이라는 자막을 달아주었을 뿐이지만, 대중은 그의 경연 과정에서 드러난 ‘어른다움’에 반응하며 인터넷 깊숙한 곳에 묻혀 있던 호텔 신라 시절의 일화와 업계 내 위상을 스스로 찾아내 공유했다. “이 사람이 진짜다”라는 여론과 서사는 제작진의 편집이 아닌, 커뮤니티의 집단적 정보 수집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재발굴’의 흐름은 손종원, 샘 킴, 정호영 셰프에게도 이어졌다. <흑백요리사> 내에서는 진지하고 날 선 모습만 보였던 이들이, 과거 <냉장고를 부탁해> 등의 예능에서 보여준 김풍 작가와의 케미나 인간적인 매력, 의외의 허당미가 다시 소환되면서 입체성을 얻었다. 시청자들은 방송이 보여주는 모습과 자신들이 찾아낸 과거의 모습 사이의 ‘갭(Gap)’을 공유하고 즐기며, 그들만의 놀이 문화를 형성했다.


결국 <흑백요리사>의 성공 요인은 제작진이 100을 다 보여주려 하지 않고, 10의 강렬한 자극(장면)만 던져준 뒤 나머지 90의 서사를 대중에게 위임한 데 있다. 이러한 발굴의 과정이 이전에도 있었던 뻔한 것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단순히 발굴을 넘어 더 쉬워진 2차 창작의 과정으로 무한하게 공유된다는 것이 큰 차이를 만든다. 셰프들의 이야기를 제작진이 편집하여 떠먹여 줄 때보다, 시청자가 직접 찾아내어 커뮤니티에 “내가 찾은 정보임”이라며 전시하고 공유할 때 훨씬 강력한 바이럴 효과와 생명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대중의 주권 행사는 단순히 캐릭터 발굴에 그치지 않고, 프로그램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의식마저 재구성했다. 수용자들은 제작진이 깔아놓은 ‘계급 전쟁’의 판을 수동적으로 소비하지 않았다. 시즌 1부터도 그랬지만, 그들은 무조건적으로 약자(흑수저)를 응원하는 ‘언더독 서사’를 거부했다. 대신 시즌 2의 송훈 셰프나 시즌 1의 에드워드 리 셰프가 보여준 끊임없는 도전과 정체성 탐구, 그리고 팀전에서 보여준 리더십에 열광하며 ‘계급’이 아닌 ‘능력’과 ‘태도’를 중심으로 서사를 다시 썼다. 이는 수용자가 창작자의 의도된 위계 구도를 해체하고, 자신들만의 시대정신인 ‘납득 가능한 능력주의’와 ‘프로페셔널리즘’으로 작품을 재창조했음을 의미한다.


결국 <흑백요리사>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서사의 주권이 이제 ‘편집하는 자’에서 ‘검색하고 재창조하는 자’에게로 완전히 이동했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을 쥔 대중은 더 이상 주어진 이야기를 듣는 청자가 아니다. 그들은 파편화된 정보(장면, SNS, 과거 영상)라는 레고 블록을 직접 조립하여 자신들만의 맥락을 형성하는 데서 효능감을 느낀다. 이제 콘텐츠의 성공은 제작자가 얼마나 완벽한 세계를 구축하느냐가 아니라, 대중이 뛰어놀 수 있는 ‘빈칸’과 ‘놀이터’를 얼마나 매력적으로 제공하느냐에 달려 있다. 한 장면의 임팩트가 대중의 리액션을 낳고, 그 리액션이 모여 거대한 서사가 되는 시대. 바야흐로 서사는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발굴되고 재창조되는 ‘집단지성의 밈(Meme)’이 되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금감원의 조치는 ‘서학개미 탄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