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파고를 앞에 둔 사회가 마주해야 할 방향.
거대한 파도를 마주하였을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가장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방법은 바로 정면으로 다가가 그 파도를 직접 넘어서는 것이다. 당장은 얌전해 보이는 그 해수면의 일렁임으로 급히 뛰어들지 않으면 순식간에 물거품의 잔해가 된다. 그 이유는 바로 해저 깊이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다.
만약 해저의 지형이 평탄하게 유지되어 있다면, 파도의 변화도 일정하기 때문에 파도가 다가오는 걸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해저의 높낮이가 변하는 순간, 그 높은 파고를 구성하고 있던 해수가 속도의 급격한 변화로 응집력을 잃고 부서지기 시작한다.
높이 올라온 파고가 부서지면 그 아래의 것들은 휩쓸리는 수밖에 없고, 참혹한 물보라는 우리의 생존확률을 극도로 낮춘다. 이는 현재 우리 사회가 마주하고 있는 양극화와 침체, 그에 따른 불확실성의 일렁임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를 시사한다.
그동안의 사회는 깊고 평탄한 지형 위에 흘러가는 해수와 같았다. 해수면에서는 거친 파도와 참혹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서 다소 날카로워 보이지만, 그 아래로는 수많은 가능성의 흐름들이 잠재되어 있었다.
해수면의 전투 이후 내려앉은 잔해들은 그 깊은 바다의 영양분이 되었고, 저마다의 생태계가 난류와 한류 사이에서 충돌하면서도 어우러지는 과정을 거쳤다. 난류와 한류가 얽히는 과정에서 풍요로운 생태계가 만들어지듯, 냉전의 고요한 총성 아래에서도 사회는 무한하게 발전해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어두컴컴한 해저 아래에서조차 앞으로 가다 보면 더 좋은 해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며 말이다. 하지만 점차 깊이를 가늠조차 못 할 것 같던 밑바닥은 지면으로 이어지며 그 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앞에서 '확실한 실패'와 '실패 이후의 불확실한 미래'에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
예상보다도 훨씬 빠르게 바닥을 드러낸 원인에는 부의 양극화라는 높은 파고가 있다. 파고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마루가 높이 올라갈수록 주변의 물은 줄어들어 골을 이룬다. 모두가 어느 정도는 평탄한 해수면에서 경쟁을 하며 자원을 누려야 하는데, 현재는 모든 자원이 높게 형성된 파고로 휩쓸려 극심한 불균형을 띠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서 저소득층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마찰을 겪으며 파도의 충격을 몸소 받아내게 되었고, 초고소득층은 어찌 보면 잠잠해 보이는 마루 위에서 안정감을 누리고 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순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결국 이 두 부분의 속도차이가 극심해지면, 그 순간 잠잠해 보이던 파고는 자잘한 유리조각처럼 부서져 내리기 시작한다. 그 아래로 떨어지는 유리파편들은 지면에 갈려나가는 물보라들을 덮치며 그 아래에 끼어있는 이들은 한낱 거품처럼 꺼져버리게 된다. 높은 파고 위에 있던 이들은 자신들이 누리던 높이를 잃고, 그 아래에 휩쓸리던 이들은 재기불능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은, 그 높은 파도가 부서지기 전에 두렵더라도 다가가서 그 위로 넘어가는 것이다. 누군가는 미친 짓이라고 할 수도 있는 그 행동을 당장 해야만 생존이 가능하다. 파고의 아래에서 그 흐름의 위로 넘어가면 지면이 드러나며 흘러나올 충격을 전체 바다로 분산시킬 수 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충격이 될 뻔한 에너지가 우리 사회 각각의 동력으로 변환된다. 이는 부의 양극화라는 파도 아래 흐르고 있는 수많은 한류와 난류들, 국민연금, 건강보험, 의료대란, 정치양극화, 교육문제, 지역소멸 등 극도로 갈라진 양면이 조화롭게 섞여야만 가능한 일이다. 나뉘어 있는 때에는 그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것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면 풍요로운 생태계를 이루는 거름이 된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는 그 일렁임에 대해 두렵다기보다는 안일함이 더 큰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파도가 지나가도 잠깐 몸이 들떴다 말겠지 하는 안일함, 혹은 부서지더라도 난 그 물보라의 위에 있을 것이라는 오만. 한 번도 파도가 부서지는 걸 보지 못하기라도 한 듯 행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역사에 대한 지나친 몰이해나, 너무 잘 알고 있다 생각해서 그 파도를 타고 혼자 살아보겠다는 자만이 지배하고 있는 것 아닐까 싶다.
만약 도저히 그 파도를 넘어갈 수 없고 부서져야만 한다면, 아마 우리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이 깊은 잠재력을 가진 바다를 품고 살지는 못 할 것이다. 그 해류의 폭풍에서 겨우 살아남은 이들이 지상으로 흘러들어서 거대한 사회적 영양분을 잃고 담수화되어 작은 연못과 강을 이루고 살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도 살아남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다를 포기하고 말 그대로 '우물 안 개구리'로 살기를 자처하는 것은 과연 옳은가. 또 그 우물 안에 사는 것이 우리 세대가 아니라 미래 세대라면 그 세대는 어떠한 희망을 품고 살 수 있을까. 확실한 실패를 다른 세대에게 전가하고 도망가는 사회에 신뢰를 품을 수는 없다. 무턱대고 신뢰하라며 주는 뇌물에 속을 만큼 정보가 통제된 사회도 아니기에, 그런 식의 것들보다 미래의 열려있는 길과 그곳을 걸을 시간을 주어야만 한다. 불확실한 망망대해라도 나아갈 시간과 길만 있으면 어떻게든 그 사회는 발전한다. 침체라는 밑바닥이 완전히 드러나기 전에 어서 선택의 기로에서 벗어나 행동으로 옮겨야만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