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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오늘에게 빚진다. 오늘은 어제의 덕을 본다.

<폭싹 속았수다 : 2막>

by 무딘날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을까.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을까.
네, 그렇게 될 거예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 가족의 모습을 돌이켜보면, 정말 눈 뜰 겨를도 없이 바빴다. 썰물에 우리 가족의 모든 것이 쓸려나간 듯 멍하니 슬퍼하다가 바로 장례식 문제, 일 문제, 세금 문제... 뭐 하나 쉬이 넘어갈 수 없는 문제들이 밀려들어왔다. 밀물은 그곳에 무슨 생명체가 사는지 사정을 봐주지 않고 차오른다. 그저 그 조수간만의 차에 적응하여 당장 다음 일을 준비하며 사는 것만이 그 틈바구니에서의 생존방식이다.


그런데 그런 우리 가족들의 모습을 보며 혀를 끌끌 차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떻게 가장이 이렇게 됐는데 밥도 잘 먹고 눈물도 더 흘리지 않고 있느냐고, 냉혈한이냐고 말이다. 예림이가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문명화가 덜 되어서 형제자매들이 죽는 거를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진화가 덜 되었다는 식의 논리를 펼치는 장면을 볼 때 그때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났다. 저런 속편한 소리도 살 만한 이들의 사치라는 걸 아는 사람만 아니까. 아침 드라마에서 머리띠를 졸라 매고 이불에 엎어져서 한 주 한 달을 내내 병이라도 앓는 듯이 우울과 근심을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장면인지는 겪어 본 사람만이 아니까.


요즘 사람들이 '경제적 자유'라고 추종하는 바가 아마 이런 삶을 바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돈이 너무나 풍족해서 내가 하고 싶은 행동만 속편하게 하고 살 수 있는 삶. 돈에 시달리면서 억척스러워지지 않을 수 있는 삶. 내가 그 놈의 돈 때문에 가족이든 친구든 누군가에게 야속함을 느끼거나 야박해지지 않을 수 있는 삶. 그게 뭐라고, 정말 그게 뭐라고 소리가 절로 나오는 돈, 돈, 돈. 매번 사람을 미안하게 하고, 매번 사람을 옹졸하게 만드는 그것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백만번도 더 스스로를 꼬고, 타인을 꼬아 본다. "부자는 꼬이지 않아서 사람들이 친절하고, 빈자는 이기적이고 억척스러우며 영악하다."라는, 좀만 생각해보면 우습기만 한 이 말이 댓글이든 어디든 속속들이 나오는 것도 이런 삶을 이겨내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자기 스스로가 꼬여서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조섞인 한탄이나 다름 없다.


하지만 너무 그런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갖지는 않으려고 한다. 세상에 그냥 부자는 없다.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듯, 엄청난 부에는 이유가 따른다. 정말 죽어라 열심히 일해서 돈 버는 사람이 승리하는 사회가 정말 좋은 사회일 것이지만, 우리 사회는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너무 큰 공백이 존재했다. 그래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부자가 파다하다. 여관에서 손님들 가방이나 털어대는 도둑 부부든, 제주도에서 가장 먼저 창씨개명을 한 매국노든, 혹은 불법과외 학생들을 등쳐먹는 술집 마담 출신 인물이든,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을 편가르고 촌지를 받아쳐먹던 교사든, 국민의 삶이 아닌 올림픽 업적 쌓기에만 급급한 행정가와 정치인이든... 뭐든 이익만 되면 장땡이라는 식으로 산 것들이 있다. 최선을 다해 일한 사람들 속에 몸을 숨기고, 말하자면 끝도 없이 나올 금수들이 지금은 마치 '원래' 부자인양 떵떵거리며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고 산다. 사회 윤리라는 개념이 없이, 처벌받지만 않으면 이득만 좇는 인간들이 존재하는 나라이니 전세사기니, 주가조작이니 판을 치고, 법적으로 처벌도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교통경찰들이 교통 위반, 음주운전 단속 눈 감아주고 벌금을 몰래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던 일이 파다하여 '교통경찰해서 건물 하나 없으면 등신 소리 듣는다'는 말이 횡횡하던 그 시절에도 곧고 옳게 자기 일을 하며 산 경찰분들은 존재한다. 나는 그런 분들처럼, 적어도 그런 추악함에 빚지고 살지는 않는다는 자부심으로 하루하루에 매진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은 결코 할 수 없다. 애순이와 관식이도 할머니의 쌈짓돈으로 애순 어머니의 삶을 보상받지 못하였다면, 둘 다 온몸이 다 부서질 때까지 허드렛일로만 뒹굴다가 바다 속으로 스러졌을지도 모른다. 금명이는 가난에 승복하지 않고 바른 길을 택했지만, 억울하게 도둑으로 몰려 고초를 겪는다. 서로 아무리 행복한 오늘을 보낸다고 한들, 가난은 그 일상 속에서 내일을 앗아간다. 끝없이 오늘이 내일에게 빚을 지며 부채가 쌓여가는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그 논리를 반대로 뒤집는다. 오늘은 올바른 어제의 덕을 보고 산다고. 자신의 할 도리를 다 하고 올곧게 살고자 노력한 광례의 삶, 과거는 그 덕을 애순이와 관식이의 오늘 '배'라는 형태로 남긴다. 그리고 타인의 슬픔을 같이 힘들어 해줄 수 있는 애순이의 삶은 금명이의 오늘에 '인복'의 형태로 남긴다. 그들은 앞선 이의 고된, 그렇지만 옳은 삶이 보상받을 수 있다는 자그마한 희망 덕분에 힘든 오늘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의 삶을 통해서 항변하고 싶다. 그들의 행복의 밑천은 돈만은 아니었다고, 오늘이 있게 해 준 어제의 덕이라고.


한 번 고마운 사람에게는 간쓸개 다 줄 것처럼 하면서, 백만번 고마운 은인에게는 낙서장 대하듯 한다는 그 말이 그저 흘려보내고 못 본 척했던 미안함들이 사무치게 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낸 수백만번의 어제들에게도 난 낙서장 대하듯 하지 않았는가 고민해본다. 내일 한 번 고마울 것에 마음 졸이면서만 살지는 않았는지 돌이켜 본다. 나에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를 두려워하고 대비하는 것에 앞서 오늘을 살아내고자 하는 용기이며, 오늘을 어제로 당당하게 남길 수 있는 자신감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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