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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따뜻하다. 이 따스함이 밉다.

산불 이재민 분들을 응원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by 무딘날

저번 주부터 이상하게 눈이 뻑뻑하고 목이 바짝 말랐다. 내가 어디 몸이 안 좋나, 하는 고민을 하며 약국을 들러 안약을 사고 눈에 넣었다. 나는 안약 방울이 눈앞에서 달랑달랑 거리는 순간의 두려움, 또 눈 속으로 스며드는 그 따끔거림이 참 싫다고 생각했다. 눈물 흘릴 일 없는 내가 그나마 흘리는 눈물이 안약 응어리라니. 그러고는 다시 할 일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그런 세상 편한 두려움과 사소한 아픔에 마음을 쓰고 있을 때, 같은 시간 동안 새빨간 화마에 휩싸여 삶의 모든 것,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분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나는 그저 목마름으로 치부하던 별 거 아닌 건조함은 누군가에겐 지옥을 남기고 있는 중이었다. 발생 당시에는 ‘또 이 맘 때라 산불이 나나 보다’라며 가벼이 여기고 내 일 아닌 양 고개를 돌렸다. 그 무관심과 무책임을 장작 삼아 그 끔찍한 불꽃은 크기를 키워간 것이었다.


가족들이 말도 못 하게 거대해진 산불 뉴스를 계속 보고 있어서 그제야 관심을 갖고 보았다. 나와 달리 가족들은 불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다. 나 혼자 동떨어져 살고 있을 때, 아래층에서부터 가스폭발로 불이 나서 빌라 전체가 불이 났다고 한다. 새벽 3시에 창문 밖으로 어둠을 깨고 솟아오르는 빨갛고 노란 광명을 발견하고는, 그 불꽃 속에서 헐레벌떡 빠져나와 “불이야!”를 처음으로 외쳤다고 했다. 나는 그런 아픔을 몰랐다. 지금도 잘 모르면서 아는 체나 하는 상태에 불과할 것이다. 10년이나 지난 지금도 새빨간 색감과 큰 소리로 부르는 소리에 심장 떨어질 것처럼 화들짝 놀라 살살 부르라고 타박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어찌 감히 이해하고 공감한다 하겠나.


그래서 산불을 보며 내가 느끼는 심각함과 가족들이 느끼는 심각함은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천지차이임이 분명했다. 검은 재를 날리며 불타는 집을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하는 그분들의 허탈감, 어찌 보면 자신의 무력함에 치욕마저 느껴질 그 순간들을 가족들은 자신의 기억에서부터 끄집어내고 슬퍼했다. 도깨비불로 바람에 날려가며 번지는 화마에는 그저 슬퍼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티브이로 지켜보는 우리나, 그 앞에서 불을 마주하고 있는 당사자분들이나, 심지어는 불을 끄러 간 소방관마저도. 마치 옛 제정일치 사회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이 하늘에 기도하는 수 밖에는 없었다. 제발 비를 내려달라고. 이 불을 제발 꺼달라고.


이제는 나의 무심함 마저도 증거로 남는다. 마치 알고리즘은 극성스러운 부모처럼 너는 제발 나쁜 것은 보지 말고 네가 좋아하는 것만 보라는 듯이 내 재생목록에서 차츰차츰 이웃들이 타 죽어가는 애달픈 현장을 지워버린다. 정치, 경제, 각종 시사 이슈와 재테크, 공부 영상이 올라오며 그 어마어마한 산불마저 내게서 덮어버리려고 한다. “니 삶이나 살아 이 등신아, 오지랖은” 마치 이런 말을 하는 것처럼 계속 내 시선에서 그들의 슬픔을 앗아간다. 이럴 때는 예전이 그립다. 관심사가 다른 것은 상관없이 한 자리에 모여 한 사건을 마주하던 때. 모두의 슬픔이 나의 슬픔으로 전염이 되어 그들을 응원하던 때. 내 관심사를 갖는다는 것이 타인을 난도질하지 않던 때.


어제는 비가 내렸다. 날씨가 조금 쌀쌀해졌다. 비록 많은 비는 아니어서 이 상황의 답이 되지는 못하였다만, 흉년의 농사꾼도 아닌 내게 이토록 반가운 비는 오랜만이었다. 제발 더 많은 비가 내리길. 지독한 산불이 가시기를. 이재민의 아픔을 정치와 사회가 포용하고 안아주기를. 그들의 미래를 재건해 주기를. 이 끔찍한 따뜻함이 쌀쌀하게 내려앉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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