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드디어 마주한 '서울의 봄'

12.3, 그리고 4.4 11시 22분.

by 무딘날

2022년 10월 29일, 나는 집에서 혼자 이른 시간에 잠들고자 누워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실시간으로 이태원이라는 키워드가 떠있어서 들어가 보니 어떤 개인 트위터(현 X)계정으로 연결이 되었다. 그와 더불어 수많은 계정에서 이태원이 태그된 채로 여러 사진들이 한참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백화점의 마네킹 같은 것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거나, 옆에 아무런 조치도 없이 산처럼 쌓아둔 사진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사진을 적나라하게 올리지 말라느니, 트리거가 된다느니 하며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네킹 같은 뻣뻣한 것에 민간인들이 급하게 압박이 없도록 옷들을 풀고 가슴을 눌러대며 CPR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 내가 본 '그것'은 길거리에 방치된 10.29 참사 희생자들의 시신이었다.



나는 그 비현실적인 모습들이 개인들을 통해 전파되는 걸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었다. 밤새 잠에도 들지 못한 채 인터넷을 방황했다. 어떻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말이 되나? 그런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더욱 내가 그런 감정을 가진 것은 그 작년까지만 해도 내가 홍대나 이태원에 안전 질서를 위해 투입되던 의경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인파가 몰릴 가능성이 큰 행사가 있는 곳은 언제나 전날이나 그날 새벽에 지도와 근무도가 정리되어 나온다. 이태원의 경우는 2020 / 2021 둘 다 할로윈 당시 통제 대상 지역이었다. 복잡할 수 있는 교통을 통제하고, 사람들이 몰리는 구간에서 형광봉을 들고 인파를 관리했다.


그것이 국가 행정력이 행해지는 방식임을 나는 몸으로 알고 있었다. 심지어 내가 하던 때는 인파가 국가적으로 통제가 이루어지던 코로나 시기였다. 코로나 때 감축한 인력으로도 그곳은 철저한 통제 대상이었다.


그런데 왜 내가 전역하고 갑자기 올해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그 충격은 밤새 나를 짓눌렀다. 나는 그렇게 끔찍한 참사의 현장을 인터넷에서 배회하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다음날은 이제 이것에 관해 정부와 지자체의 상황 브리핑이 나오고, 책임자들은 책임을 지고, 언론들은 참사를 보도하며 추모를 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런데 조선일보를 비롯한 몇몇 주요 언론, 또 각종 극단적인 유튜브들에서는 내가 어제 본 그 지옥을 온갖 자극적인 워딩을 써가며 "문란한 청년들이 놀다가 죽었다"라는 식의 보도를 하고 있었다. 응급처치를 위해 옷의 압박을 푼 것은 "옷을 벗어젖히고 서양 축제를 즐기는 것"이 되었고, 죽어도 싼 비생산적이고 무식한 것들이라고 많은 미디어가 퍼뜨렸다.


행정부는 추모의 판에 희생자들의 이름을 전부 지워버린 채 그 사람들의 하나하나가 기억되지 못하도록, 혹여나 사람들이 희생자들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더 나아가 희생자라는 표현을 쓰지 말라는 공문을 참사 다음날 공공기관들에 내려보내며 책임을 회피하고 사안을 축소시키기에 급급했다.


지자체장은 원래 행해지던 그 행정절차의 부재를 '갑작스러운 인파의 몰림'에 의한 우발적인 사고라고 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행정력은 그날 용산의 다른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누군가에게는 악의적인 음모론자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하면 합리적 의심, 남이 하면 음모론이라며 내로남불하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상식'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날 밤에 실시간으로 중계된,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한 것들이 왜곡되고, 당연하게 이루어졌던 국가의 책무들이 부정당하는 그 상황이 너무나 억울했다.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제삼자보다도 먼 나도 이렇게 억울한데 당사자들은 오죽할까? 내가 당사자라면 과연 살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수천번도 더 들었다. 심지어는 더 미친 인간들은 그 유가족분들을 '자식 팔아 세금을 빨아먹는 기생충'으로 만들었다.

이태원의 해맑은 청춘들은 행정의 실종으로 내일을 잃었고, 어른의 무책임으로 오늘마저 부정당했으며, 언론의 야만으로 어제까지 난도질당해야 했다. 이러한 일들에 부당함을 느낀 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이들의 모든 행동을 목격하자. 그리고 기억하자. 이 추운 겨울 속에서 죽어가는 눈빛으로라도 미약한 감시자가 되자.



王자를 새긴 채 국민의 영업사원을 자처하던 자가 속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정말 완벽한 ‘제왕적 대통령제’를 실현할 인재였다.


국방부에서 일하던 이들을 대책도 없이 내몰고 꾸역꾸역 자리를 차지하고는 뒷수습시켰다. 장소의 입지를 봐준다는 책사가 드나들었다는 것은 기록이 사라져 이제는 헛소문이 되었다. 공관사업의 사업권을 특정 사업체에 몰아주고, 국고를 알뜰하게도 비워갔다. 어떤 교수는 용이 산다는 그 동네의 풍수를 칭찬하며 참으로 우스운 방식으로 그를 옹호했다.


바이든을 날리면이라고 우기며 전 국민 청력 테스트를 시키고, 약속했던 행차길의 귓동냥은 심기가 불편해 그만두었다. 외치를 한다며 미리 채운 물 잔은 아무도 채워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실질 없는 가치외교에는 누구도 뒷일을 책임져주지 않았다.


모든 국민은 허리띠를 졸라매라 하고, 예비비를 추가에 추가까지 해가며 나다닌 해외 순방에서는 사치품 매장에 ‘국가 기밀’로 호객을 당하며 드나들었다. '긴축'재정이라는 미명 하에 국가의 기반이자 미래인 학도들의 피와 같은 지원금을 '카르텔'이라며 가벼이 삭감했다.


자신과 그 주변에 퍼져있는 수많은 의혹에 대한 수사를 이례적으로 많은 거부권으로 방탄하고, 타협이라는 말은 애먼 곳으로 사라진 듯이 귀를 막고 상대를 탄압했다. 총선 참패라는 국민의 질타가 오기 전까지 야당과의 접촉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노동계, 의료계 등 그 대상이 누구든 가리지 않고 탄압했고, 그렇게 포용해야 할 모든 국민들을 극단으로 치닫게 했다. 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반국가세력이라는 딱지까지 붙여가며 말이다.


참 하나하나 언급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하나의 갈등이 운을 떼기도 전에 새로운 갈등을 연달아 일으켰다.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오염된 것이 정말 정치인가?


아니다. 문제는 정치를 해야 함에도 정치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오늘 문형배 소장 권한대행이 직접 읊어주었다. 정치로 풀어야 하는 일은 정치로 풀어야 하는 것이라고. 시스템을 망가뜨리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나대던 코끼리는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그들은 단 한 번도 정치를 한 적이 없다. 그가 한 것은 오로지 일방적인 통치였다. 그리고 자기 말에 따르면 정당하다는 그 ‘통치’ 행위로 인해 결국 오늘 부로 대통령직을 파면당했다.


민주사회에 들여서는 안 될,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기본 헌법 자체도 모르는 무지한 통치자를 정치가라고 꾸며준 것은 누구인가.


진짜 오염된 것은 정치가 아닌 것을 정치라고 말과 글로 호도한 자들이다. 중앙일보에는 4.3의 앞전에 이승만의 철인 통치를 찬양하며 '이승만이 잊히는 것이 안타깝다'는 서울대 전 총장의 글이 올라왔다. 한국일보에는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계엄을 일으켜 군인들의 총칼을 국민으로 향한 윤석열을 용서하라'는 또 다른 서울대 전 총장의 글이 올라왔다.


당신들은 지식인인가, 부역자인가. 아니, 당신들 자체가 이 사회를 오염시킨 주범이 아닌가.



그자들 모두 안고 같이 가시라.

외롭지 않게 다 데리고 가시라.

가시라. 얼른 가시라.

우리는 당신이 가고

이제는 더 이상 짧지 않을 서울의 봄을 맞이할 것이다.

지옥 같던 산의 불씨가 꺼지고, 꽃샘추위는 물러갔다.

파면이라는 단어가 퍼져 나오자 마법처럼 날이 풀려 따뜻함으로 가득 찼다.

기다리다 지친 꽃몽우리들도 천천히 그 꽃잎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피어날 즈음에는 앞날이 기대되는 날이 도래하길 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날이 따뜻하다. 이 따스함이 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