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패배를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할 때.
현대 민주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극단적 포퓰리즘의 부상, 정치적 양극화 심화, 선거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정치인들의 등장은 민주주의 제도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폴란드 출신 정치학자 아담 쉐보르스키(Adam Przeworski)의 민주주의 정의는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쉐보르스키는 민주주의를 간결하게 “정당이 선거에서 패배하는 시스템”으로 정의했다. 그는 현직 권력자가 선거에서 패배할 수 있고, 패배하면 평화롭게 물러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이 정의는 단순해 보이지만, 민주주의의 근본과 작동 원리를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
2025년 1월, 대한민국도 헌정 사상 초유의 위기를 경험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이어진 서울서부지방법원 습격 사태는 우리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 사건들은 단순한 정치적 갈등을 넘어 민주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다. 전조는 있었다. 극우 유튜버들을 아무렇지 않게 행정부와 정치권에 수용하는 행보, 극우 파시스트적인 언어가 남발하는 인터넷 커뮤니티 환경, '능력주의'라는 말로 호도하며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 못하고 타인을 혐오하는 바보들의 언어 폭탄. 이외에도 더 있지만, 이렇게 많은 것들이 뭉쳐져 터져버린 것이 불법 계엄과 법원 폭동이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리블랫의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를 보면, 현재 우리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너무나 전형적인 일임을 알 수 있다. 프러시아 보수주의 지도자인 에른스트 폰 하이데브란트가 "획일화된 대중에 의한 통치는 (...) 근본적인 자연법에 대한 공격이다!"라고 주장했다거나, 독일의 극단적 보수주의를 표방한 장군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민주주의를 "끝없는 테러"라고 묘사한 것은, 책의 말 그대로 자신들이 사회에서 가진 지배적 기득권을 잃을 것에 대한 공포심의 말로였다. 현대에 부활한 극우청년단인 자유대학연맹의 '과잠정치'와 '대중독재 프레임'을 짜고 있는 기득권 세력의 활보. 이를 통해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허상이 아님을 그대로 증명한다.
나는 이들이 왜 이런 선택을 할까의 답 중 일부를 저 책을 읽으며 생각을 해보았다. 이들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과거의 환상, 역사 속의 승리감이다. 흔히 현재 한국에서 극우세력으로 그려지는 집단 중 2030 남성층(물론 여론조사를 보면 20대 남성중 10% 수준에 불과한, 아주 소수의 세력임을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특정 세력의 프레임을 퍼뜨리는 커뮤니티나 미디어의 문제일 것이다.)을 보면 그렇다. 2030 남성층은 지금 경제 침체와 일자리 부족으로 인해 고통에 시달리는 계층이다. 그런데 이전 집권세력이였던 민주당이나 사회 주류 단체들은 이들의 고통을 사실상 방치했다. 실제로 방치했는가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방치한 것처럼 내비쳤다'는 것이 가장 심각한 부분이다.(이는 세심함이 부족한 정치권의 문제였을 수도 있고, 그것을 극대화한 미디어의 책임 또한 있을 수 있다.)
그러한 밑바탕에서 과거 남성 계층의 사회적 성공에 대한 2030 계층의 '능력주의적 선망'과 불확실성이 커진 경제 침체 상황 속 사회적 실패에 대한 '추락의 공포', 이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그리고 그 사이 존재하는 큰 괴리감이 그들을 극단으로 몰아넣었다. 또한 그 상황에서 '한국에서 희생은 언제나 젊은 남성의 몫'이란 2030 남성 커뮤니티 내의 인식이 반중, 반공, 여성 혐오, 좌파 혐오 등 혐오적, 감정적 측면을 자극하는 이슈를 통해 점차 그 극단층을 더욱 물들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민주주의는 지속가능할까. 그에 대해서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의 소수지배 이론을 연결하여 이해해보고자 한다.
쉐보르스키는 민주주의를 간결하게 “정당이 선거에서 패배하는 시스템”으로 정의했다.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현직에 재임 중인 자가 선거에서 패배할 수 있고, 패배하면 사무실을 떠나는 것이 민주주의다. 자유롭고 경쟁적인 선거가 없다면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정의의 핵심은 패배한 정당이 다음 선거에서 유권자의 마음을 얻을 전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현 집권세력이 선거에서 패배할 수 있고, 패배할 경우 평화적으로 권력을 이양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이는 민주주의가 단순한 선거 실시가 아니라, 그 결과에 대한 수용과 평화적 권력 이양의 제도화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쉐보르스키는 민주주의를 갈등 해결의 제도적 방식으로 이해한다. 그는 “민주주의는 적어도 정치적 자유를 유지하면서 갈등을 평화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방식”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갈등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물리적 폭력이나 내전보다 더 나은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더 구체적으로 그는 “민주주의는 규칙에 따라 갈등하는 메커니즘”이며, “서로 다른 가치와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들이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결론에 도달하고 이 결론이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구조”라고 정의했다. 민주주의는 단순한 이념이 아니라 제도적 장치, 특히 선거라는 핵심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하는 갈등 해결 시스템인 것이다.
그래서 쉐보르스키가 선거에 대해 설파한 저서의 제목도 “Paper Stones”이다. 투표용지를 저항의 상징인 ‘돌’에 빗댄 것으로, 적극적인 의사표시를 하고 싶으면 투표함을 향해 ‘돌’을 던지라는 메시지다. 이는 물리적 폭력이 아닌 평화적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정치적 변화를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쉐보르스키에 따르면,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정당이 패배를 받아들이고 평화적으로 권력을 이양하는 경험을 축적해야 한다. 이를 통해 정권 교체는 일상적인 일이 되고, 국민은 이를 당연히 여기게 된다. 그는 민주주의의 가장 큰 시험이 바로 패배를 인정하는 데 있다고 본다.
정당이 패배를 인정하며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1. 향후 다시 승리할 기회가 있다는 믿음
2. 권력 이양이 재앙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권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민주주의를 독재로 돌이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패배를 두려워하는 정치 세력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극단적인 조치를 택할 가능성이 높아지며, 이는 민주주의를 훼손한다.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민주주의자들은 세 가지 행동 원칙을 실천해야 한다고 쉐보르스키는 주장한다:
1. 선거 결과가 어떻든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
2. 폭력을 명확히 거부해야 한다.
3. 반민주주의 세력과의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
그는 민주주의가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선을 위한 끊임없고 영구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민주주의가 단순한 정치 체제를 넘어 지속적인 실천과 개선이 필요한 과정임을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지난 2020년 21대 총선 이후부터 최근 2024년 4.10 총선까지 일부 극우 세력을 중심으로 부정선거 음모론이 확산되어 왔다. 이러한 음모론은 “선거 결과가 조작됐다”는 주장을 핵심으로 한다. 영향력 있는 일부 극우 인사들은 “전산 조작을 하고 실물로 된 위조 투표지를 투입했다” 또는 “선관위 서버에 해킹을 해서 들어가 선거 부정을 저질렀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펼쳐왔다.
특히 우려스러운 점은 이러한 음모론이 최고 권력층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보다 선관위에 더 많은 계엄군을 투입한 이유로 ‘부정선거 의혹 수사’를 언급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선거 결과 존중이 위협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21대 총선 당시 제기된 부정선거 의혹 관련 소송은 120여 건에 달했지만, 대법원은 “객관적 근거가 없다”며 모두 기각 또는 각하했습니다. 특히 민경욱 전 의원이 제기한 사전투표지 위조 및 전산 조작 주장에 대해 대법원은 사전투표지 4만5000여매의 QR코드를 직접 검증한 결과, 위조된 투표지가 한 장도 없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차별적인 의혹 제기는 계속되고있다.
이는 첫째로, 민주적 경쟁의 제도적 틀 훼손한 것이다. 선거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제도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다. 선거는 “정기적이고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기반으로 하며, 모든 사회 구성원이 인종, 성별, 종교,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동등한 시민의 권리를 누리는 정치 시스템”의 근간이다. 확실한 근거 없이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제도적 틀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이다.
또한 둘째로, 쉐보르스키가 강조한 “선거에서 패배한 정당이나 후보자는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규범이 무시되고 패배 수용의 규범을 파괴했다. 패배를 인정하는 대신 선거 자체를 조작됐다고 주장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훼손하였고, 결과적으로 폭력적인 행위자들을 통해 헌법이라는 국가의 규칙을 위반하는 것을 조장하였다. 이들은 전부 국가의 규범을 파괴하는 반민주주의 세력으로 청산의 대상이다. 반국가세력이라며 중국인이니 좌파 빨갱이니 찾고 있지만, 민주주의 규칙을 훼손하고 나라의 근간을 무너뜨린 '반국가세력'은 정작 본인들임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러한 쉐보르스키의 민주주의 이론과 연결하여, 하버드대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는 현대 민주주의가 직면한 또 다른 위기를 분석한다.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민주주의 붕괴 이면에 겉으로만 민주주의에 충직한 척하는 정치인들과 그들의 무기가 된 낡은 체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가짜 민주주의자)’라고 불리는 정치인들이 표면적으로 민주주의 규정을 따르면서도 폭력과 극단주의를 묵인하거나 심지어 이용하며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분석한다. 이들 극단 세력이 주류 정당과 협력하거나 묵인할 때 민주주의는 독재를 현실화하는 조력자로 전락할 위험이 커진다.
미국의 사례를 살펴보면, 레비츠키와 지블랫의 분석이 더욱 명확해진다. 미국은 다른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과 비교할 때 소수 지배(Minority Rule)의 “이상치(outlier)“라고 지적한다. 미국 정치 체제의 여러 요소가 소수 지배를 가능하게 한다:
1. 미국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대통령을 직접 선거가 아닌 선거인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선출하는 “대통령제 민주주의” 국가이다.
2. 미국은 '강력한 상원(Senate)의 양원제 의회'를 가진 몇 안 되는 “민주주의” 국가 중 하나이다.
3. 미국은 인구가 크게 다른 주들에게 “동등한 대표권”을 부여하는 극도로 왜곡된 상원을 가진 더 적은 수의 “민주주의” 국가 중 하나이다.
4. 미국은 강력하고 왜곡된 상원과 사실상 “입법부 소수 거부권”을 가진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이다.
이러한 제도적 특성들은 미국에서 소수가 다수의 의견을 무시하고 정치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만든다. 이는 쉐보르스키가 말한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다수에 의한 권력 이양과 통치”를 훼손할 수 있다.
2021년 1월 6일, 선거 패배에 불복한 트럼프 지지자들이 미국 국회의사당을 습격한 사건은 이러한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기간 내내 자신이 승리하면 공정선거이고, 패배하면 부정 선거라는 식의 주장을 반복했으며, 선거 결과가 바이든의 승리로 확정되었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트럼프는 민주주의의 또 다른 원칙인 폭력 거부를 위반했다. 준군사 단체와 협력해 폭력적 언사를 사용하며 반대파 암살을 암시했고, 선거관리위원과 관계자들을 위협하여 일부는 직위를 떠나게 했다. 1월 6일 의회 폭동 당시, 트럼프는 폭동 중단 요청과 주 방위군 파견 승인을 세 시간 이상 거부하며 사태를 악화시켰다.
쉐보르스키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는 이념이 아닌 제도이며, 이 제도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해주는 기제다. 그의 저서 <민주주의,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에서는 민주주의가 “치졸한 야심가들, 진실을 숨기고 왜곡하는 번지르르한 말들, 권력과 자본 사이의 부정한 관계, 정의로운 척조차 안 하는 법, 특권을 더 공고하게 만들 뿐인 정책”으로 뒤범벅이 돼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는 존재하지만, 그 본질적 가치는 훼손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2025년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헌법이 보장하는 비상조치를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도구로 악용한 사례다. 윤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과 “종북 반국가 세력들의 척결”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상은 거부권 남발로 꾸역꾸역 막고 있던 야당의 입법권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탄핵소추권 발의, 의정갈등이나 여사 리스크, 명태균 게이트 등의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였다.
더욱 심각한 것은 계엄 포고령이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와 "의사의 현장 복귀"를 선언한 점이다. 이는 계엄과 군정을 혼동한 위헌적 조치로,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하는 행위였다. 계엄은 단순히 군대가 치안 유지를 담당하는 제도일 뿐, 정치 활동 자체를 금지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 또한 자신이 처한 의정갈등 리스크를 물리적 폭력으로 졸속 해결하려 한 우매한 선택이었다.
'가짜 민주주의자', 이들은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극단주의 세력을 묵인하거나 지원하며 민주주의를 훼손한다. 많은 역사적 사례가 보여주듯, 민주주의의 최대 위협은 극단주의 세력 자체보다 이들을 용인하는 제도권 인사들로부터 온다.
‘가짜 민주주의자’를 식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정치인들이 ‘자신과 관련된 세력’의 반민주적 행동에 보이는 반응”을 관찰하는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자는 같은 편의 반민주적 행위에도 단호하게 반대하지만, 가짜 민주주의자들은 이를 묵인하거나 모호하게 대응한다.
12.3 계엄 당시 일부 여당 의원들이 계엄 해제 요구안에 찬성한 것은 이런 시험을 통과한 예로 볼 수 있다. 매일경제 김인수 논설위원은 “윤 대통령이 저지른 폭력적 행동을 손절하지 못한” 정치인들을 가짜 민주주의자로 규정했다. 이는 레비츠키와 지블랫이 제시한 기준과 일치한다.
12.3 계엄 사태는 윤석열 대통령이 “입법 독재를 통해 국가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좌시할 수 없다”는 명분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헌법학자들은 이것이 헌법이 정한 계엄 선포 요건인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더구나 계엄 선포 과정에서도 국무회의 심의와 같은 헌법적 절차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시사IN의 보도에 따르면,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포고령에는 국회의 모든 입법 활동 정지, 일체의 집회·시위 금지, 언론·출판·방송 검열 강화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내용으로,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대규모 병력이 투입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선거 제도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기구를 장악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어 더욱 우려를 자아냈다.
다행히 국회는 헌법이 부여한 권한을 행사하여 계엄 해제 요구안을 신속하게 가결했고, 이에 따라 계엄은 6시간 만에 해제되었다. 이는 견제와 균형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한 사례로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이런 제도적 안전장치가 없었다면 어떤 일이 발생했을지에 대한 불안감을 남겼다.
계엄 선포 후 내란 혐의로 수사가 진행되면서 2025년 1월 19일,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이에 반발한 극우 지지자들이 서울서부지방법원을 습격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폭도들은 법원 정문과 유리창을 깨부수고 내부로 침입해 영장을 발부한 판사를 찾아다니며 CCTV 관제실과 서버를 파손시키려 했다.
이 사건은 2021년 미국 의사당 난입 사태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침입자들은 CCTV 관제실에 침투해 컴퓨터 모니터를 집어던지거나 민원실에서 서버를 파손시키려 시도했다”는 보도는 이들의 행동이 단순한 항의가 아닌 조직적인 법치 파괴 시도였음을 보여준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 폭력 사태의 배후에 극우 유튜버들의 조직적인 선동이 있었다는 점이다. “내란이 아니라, 계엄이 아니라 계몽입니다”라는 극우 유튜버의 발언과 “법원을 빠져나가던 공수처 차량 2대가 시위대에 포위되어 차유리와 타이어가 파손되었다”는 사실은 폭력이 단순한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폭동의 가장 위험한 측면은 정치권의 모호한 태도였다.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폭도들을 두둔하거나 그들의 행동에 침묵했다. “윤상현 의원은 모인 시위대에게 월담한 사람들이 곧 훈방될 것 같다고 말했으며, 이호영 경찰청장 권한대행 겸 경찰청 차장은 윤상현 의원이 강남경찰서장에게 전화를 걸어 잘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는 보도는 정치인들이 불법 행위를 어떻게 조장했는지 보여준다.
이는 레비츠키와 지블랫이 경고한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의 전형적인 행태다. 폭도들의 행동을 직접 지시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을 묵인하거나 심지어 정당화하는 이들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진정한 위험 요소다.
서부지법 난동의 배후에는 조직적인 온라인 선동이 있었다. “방망이, 칼, 삼단봉, 너클 등 뭐든 좋으니 공격 무기 챙기라”는 내용의 글이 극우 커뮤니티에 올라왔으며, 극우 유튜버들은 이 과정에서 엄청난 수익을 얻었다.
“윤석열 체포를 앞둔 1월6~12일 한국 슈퍼챗(온라인 후원금) 1위 채널은 극우 유튜버 신혜식의 ‘신의한수’였다. 일주일 만에 4900여만원을 벌어 그 주 전세계 3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증오 정치가 어떻게 수익 모델이 되는지 보여준다. 민주주의의 위기가 일부 세력에게는 돈벌이 수단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한편,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현대 민주주의의 붕괴가 과거의 군사 쿠데타와 같은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민주주의 시스템 내에서 ‘합법적’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고 경고한다. 그들의 최근 저서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에서는 특히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 또는 ‘가짜 민주주의자’로 불리는 정치인들이 민주주의의 주요 위협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민주주의가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안전장치와 함께 시민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쉐보르스키는 “결과는 민주적 제도 안에서 행동하는 사람들이 만든다”고 강조했다. 12.3 계엄 당시 국회의원들이 담을 넘어 의사당에 들어가고, 시민들이 국회 앞에 모여 계엄에 항의한 것은 이러한 시민 역할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초등 돌봄 서비스에 대한 분석 - 돌봄 민주주의 관점을 중심으로’라는 연구에서는 민주주의를 단순한 제도적 장치를 넘어 공동체의 돌봄과 책임이 필요한 체제로 본다. 이는 극단적 소수의 지배에 맞서기 위해 시민들이 서로를 돌보고 민주주의 가치를 지켜나가는 공동의 노력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민주주의가 당연하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과 경계 속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12.3 계엄 사태는 한국 민주주의가 얼마나 쉽게 위협받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고, 동시에 이를 지키기 위한 시민의 감시와 참여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일깨워주었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체제가 아니라 끊임없는 개선과 수정이 필요한 과정이다. “규칙이 중요하긴 하지만 민주적 절차에 따른 결과물은 투입물(inputs)에 의존한다. 한 사회 안에서 발생하는 갈등이 제도적인 통로로 흡수되고, 이러한 갈등들이 규칙에 따라 전개될 때 민주주의는 성공하게 된다.”는 쉐보르스키의 말은, 민주주의의 질은 결국 그 안에서 행동하는 시민들과 정치인들의 책임 있는 행동에 달려 있음을 상기시킨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모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며, 언제나 청렴하고, 공정하고, 투명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평화와 자유 속에서 살도록 하는 가장 좋은 시스템이다.
또한 쉐보르스키는 앞서도 언급한 내용과 더불어, 야당의 정치 참여와 권한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민주주의 제도 내에서는 누군가는 야당이 되고 선거에서 질 수밖에 없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치적 승패가 민주주의 제도 내에서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임시적인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민주주의는 정당이 선거에서 패배하는 시스템”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관점은 민주주의를 단순한 다수결 원칙이나 이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제도적 메커니즘으로 이해하게 한다.
12.3 계엄 사태는 한국 민주주의에 큰 도전이었지만, 동시에 민주주의를 강화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 사태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권력 분립과 견제와 균형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 계엄 선포와 같은 중대한 결정이 소수의 결정으로 이루어지지 않도록 제도적 안전장치를 더욱 견고히 해야 한다.
둘째, ‘가짜 민주주의자’를 식별하고 경계하는 시민의식이 필요하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은 노골적인 독재자보다는 민주주의의 외양을 갖추고 그 제도를 악용하는 가짜 민주주의자일 수 있다.
셋째, 민주주의는 지속적인 참여와 감시를 통해서만 지켜질 수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와 감시는 극단적 소수의 지배를 막는 최후의 보루다.
12.3 계엄 사태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교훈은, 민주주의를 당연시하지 말고 이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규칙 아래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어나가는 평화적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우리 모두가 민주주의의 주체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해야 하고, 그 결과로서 극단적 소수의 지배를 막고 진정한 민주주의가 가능해질 것이다.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부형태를 제외한 모든 다른 형태를 시도해본 후의 최선이다” 윈스턴 처칠은 말했다. 권위주의적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들에게 역사는 냉정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20세기 전체주의 체제가 남긴 것은 홀로코스트, 굴라크, 문화대혁명 같은 대량학살의 흔적뿐이었다. 민주주의를 혐오하는 수사는 결국 자유를 파괴하고, 그 자유를 가장 필요로 하는 이들의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다. 누구보다도 자유를 부르짖으면서 타인을 억압할 권리를 원하는 바보들은 자신들의 패배를 받아들이는 법부터 받아들이길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