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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눈높이를 안다는 것.

자칭 엘리트들, 이제는 비대한 자의식을 내려놓고 스스로를 직시해야 할 때

by 무딘날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뉴턴이 남긴 말이다. 나를 알고, 남을 알고, 사회를 이해하는 것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거성의 한 마디. 이 말은 무도한 엘리트주의적 오만이 판치는 지금 시대에 큰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가 정확히 어디에 서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내가 있는 지금 이 자리가 무엇에 의해 서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성토를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곡된 능력주의 세계관은 이러한 성찰 의식을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내가 잘한 것은 온전히 나의 노력과 재능 덕'이라고 말을 한다. 그 속에서는 나의 노력이 어떤 바탕을 통해서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고, 그로 인한 결과물이 어떤 역사를 통해서 빛을 볼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그 세상을 무엇 덕분에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재한 채 비대한 자의식만 둥둥 떠다닌다.


이러한 편견이 살면서 점점 강해지는 이유는 자신이 속하는 내집단의 성격이 자신의 삶에 투영되기 때문이다. 다양한 집단을 경험하는 사람일수록 세상이 넓다는 것을 알고, 사람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직시할 수 있다. '다름'을 마주하며 '틀림'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를 갖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 맥락들을 세심하게 마주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하지만 오로지 하나의 집단에서 비슷한 사람들만 마주한 인간들은 자신만의 세계가 모두에게 통용되는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자신이 부정당하는 세상을 마주했을 때는 '이 사람들은 정말 무지하구나.'라는 식의 멸시하는 방식으로 자기 세계관을 공고히 한다.


이런 식으로 어릴 때부터 진행되는 엘리트주의적 격리는 필수적으로 우리가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다층적인 시선을 붕괴시킨다. 자신의 편협한 시선으로 사회의 정상성을 멋대로 규정하고 '비정상'을 분리시키고 밀어낸다. '효율성을 위해서'라며 장애가 있는 아이는 분리시키고, 성적이 낮은 아이를 기피하고, 이념이 달라 보이는 아이를 혐오하고, 집안사정이 좋지 않은 아이에 대한 조롱을 일삼는 사회를 만든 것은 결국 그런 오만함이 바탕에 있다. 결국 그렇게 자라난 인간들은 척박한 자의식의 가뭄에서 한 번도 마주하지 못 한 이들의 무의미한 동경을 핥아가며 살아가게 된다.


우린 무엇의 위에 서있나.


그걸 알기 위해 자신의 근본(根本)을 알아야 하고, 사회의 근간(根幹)을 마주해야 한다. 근본이란 내가 무엇인가를 행동할 수 있는 기초 - 즉 출발점이며, 근간은 나의 근본을 지키고 펼치도록 만들어주는 공간적 안정성 - 뼈대이다. 나의 근본이란 나의 키를 아는 것이고, 사회의 근간이란 내가 서있는 발아래를 이해하는 것이다.


나의 키를 안다는 것은 온전히 나라는 개인이 이룬 높이를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의 발아래 놓인 거대한 역사의 초석이 만들어준 높이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며, 그 근간에 힘을 실어주는 다른 사회 구성원의 것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민주국가에서 한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성숙한 자세이며, 자유주의적 근간 위에 서서 짊어져야 하는 책임이다.


스포츠 스타가 없어도 그만이라 무시할지도 모를 여흥 따위로 막대한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그 공놀이를 즐길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 시대와 사회 구조 덕분이며, 그것에 열광해 주는 관객이 있어서이다.


언론이 감정적 배설 수준의 말조차도 다른 기관들에게 끊임없이 쏟아낼 수 있는 이유는 본인들이 지적으로 우월해서가 아니다. 국민들이 헌법으로서 권력을 감시하고 헌법을 수호하도록 '언론 출판의 자유'를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사법부가 법적으로 한 개인의 사회적 최후를 결정할 수 있도록 권력을 준 것은 그럴 수 있을 만큼 누구보다도 우월한 이들이 모여서가 아니다. 사회를 이해하고자 평생 노력을 한 그들을 인정하고, 그 국민적 신뢰를 기반으로 공정한 절차에 따라 국가를 위해 봉사할 자격을 부여한 것뿐이다. 입법부와 행정부는 대다수의 국민이 직접 뽑은 선출 권력으로서 만일 임명 권력인 사법부가 그러한 절차를 지키지 않고 있다고 비추어진다면 견제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걸 무엇보다도 적확하게 말해주는 것이 바로 국가마다 존재하는 헌법이고, 그렇기에 그 헌법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 전체가 논의하여서만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국민의 주권은 헌법 아래 만들어져 있는 국가라는 근간 내에서는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 적어도 현 상황에서 ‘국회의 사법부 흔들기’라는 말은 그 자체로 오류다. 국민 주권의 본산인 입법부를 사법부가 흔들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법치주의'라는 말로 일부 법관들의 오만을 옹호하고 국민 주권을 난도질하는 논리를 아무렇지 않게 써대는 언론들이 대다수이다. 언론이 언제부터 헌법과 국민 주권에 앞서서 검찰기소와 대법원의 법적 결정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기관으로 전락하였는지 모르겠다. 국민의 눈은 안 무섭고 법의 칼날 앞에서만 납작 엎드리는 스스로가 부끄럽지도 않나. 법원의 판결 없이는 자기 판단으로 보도도 못하는 질 낮은 하청기관이자 '기득권의 찌라시 유통자'로 남을 것인가. 그렇게라도 엘리트 계층의 말석 끝다락에 추하게 매달리고 싶은가.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주제에, 현재 자신의 시야가 온전히 자기 키가 큰 덕분이라고 기세등등하게 다른 사람들을 깔보고 선민의식에 빠져있는 것만큼 비루한 것도 없다. 나의 권위는, 권력은 대체 무엇의 위에 서있는가. 무엇을 위해 주어지는가. 무엇에 대해 행해야 하는가. 개인이 사회에서 온전히 가질 수 있는 권위의 높이는 오로지 자신의 키높이뿐이다. 그걸 이해하는 것이 인간의 '품격'이다. 자신의 발아래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엘리트의 최후는 끝없는 추락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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