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부모들의 ‘아이를 위한다’는 자기기만
어느 날 거리에 아이의 손을 잡고 급한 걸음을 옮기는 부모들이 휙휙 지나갔다.
어느새 따뜻해진 날씨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조급해 보이는 표정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치 저 엄마들과 나는 다른 시간 속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실제로 다른 시간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들끼리 서로 쫓고 쫓기며 불안이라는 초침을 점점 더 빨리 돌리고 있는 듯 보였으니까.
그런데 그런 걸음을 아이들은 따라잡지 못하는 듯 보였다. 엄마의 크고 급한 걸음은 아이에겐 너무나 버거웠다. 그렇다 보니 거의 반쯤은 아이가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였다.
그 많은 부모 중 하나가 안 좋은 표정으로 가게에 들어서서 궁금함에 무슨 행사를 하냐고 물어보았다. 그 주변에서 영어 유치원 교육 설명회가 있었다고 한다. 아이는 옆에서 흥미가 없이 힘든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 엄마도 아이에게 미안함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엄마는 엄마 나름대로 아이에게 '좋은 것'을 해주겠다고 노력한 거였는데, 그게 뜻대로 안 되니 무언가 복잡하고 양가적인 감정에 빠져있는 듯했다.
그래서 엄마에게 "참 어렵고 뜻대로 안 되죠"하고 가벼운 위로 정도의 말을 하고는 아이에게 "너도 잘 따라서 듣느라고 고생했어"라고 좋아할 만한 초콜릿을 건네주었다. 우울해 보였던 아이는 "감사합니다"하는 인사를 하고는 가게를 나섰다.
놀랐던 것은 마지막에 아이가 엄마한테 하던 말이다. "엄마, 여기 나중에 또 오자."하고 또 인사를 다시 하더라.
그걸 보고 다시 느꼈다. 아이들은 아무리 어려도 다 안다. 자기가 노력한 것을 인정하고 보상해 주는 사람에게 감사할 줄 알고, 그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줄 안다.
어느 날에는 아이가 셔틀버스에서 내리는 걸 한 엄마가 픽업해서 데려가는 걸 보았다.
하필 또 같은 아파트 동에 사는지 서로 눈치 없는 동행을 하게 되었다. 무언가 아이가 영어 유치원에서 시험을 잘 못 보았는지, 유치원에서 준 시험지를 들고 앞에서 성큼성큼 먼저 걸어가는 성난 엄마를 간신히 뒤따라 가고 있었다.
그러더니 엄마가 한 마디를 던졌다. "너 내가 말했던 Definition을 제대로 확인 안 했니? 정말 실망스럽다."하고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를 앞서 나갔다.
끽해봐야 대여섯 살 정도 되었을 그 조그마한 여자아이는 어쩔 줄을 몰라서 손에 든 시험지를 꼬깃꼬깃 쥐고 있었다. 엄마, 아이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그렇게 아이는 화난 엄마를 쳐다도 못 보고 우물쭈물 벽을 보고 있다가 인사를 잘하라는 교육을 받았었는지내게 "안녕히 가세요..."하고 우울감이 가득 찬 목소리로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아직도 아이를 대한다는 엄마의 말투가 저럴 수 있나 놀라서 저 문장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아이와 수평적인 부모가 되려고 노력해서 저렇게 된 것인지, 뭔지는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내가 인식하는 부모의 말투라기보다, 마치 애들이 애들끼리 서로를 타박하는 말투처럼 들렸다.
그 말에 담긴 싸늘함에 옆에 서있는 나조차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어린아이에게는 그것이 어떻게 다가갔을까. 정말 실망스럽다는 그 언어의 온도는 영하에 가까웠다. 그렇게 얼어붙은 거리감 속에서 아이의 엄마는 단 한순간도 아이를 쳐다보지 않았다. 화가 많이 났다는 듯이 자신의 앞만 보고, 엘리베이터의 층수만 보고 있었다. 거의 정서적 학대에 가깝지 않나 싶을 정도였다.
나 또한 소위 그런 '빡센' 학군에서 평생을 자랐지만, 어쩌면 이 주변에 사는 사람들, 특히 엄마들은 저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싶어 안타까움이 남았다.
저런 아이들이 영어를 잘해서 나중에 서울대, 하버드를 가서 무슨 일을 한들, 정말 사람을 사람으로서 제대로 대할 수 있을까? 마음 한 켠에 자신을 억압하는 고압적인 누군가에 대한 여린 상처들은 그대로 남아있지 않을까? 그런 의문이 남았다.
이런 말을 하면 아마도 '너가 그 정도 급의 엘리트가 아니니 수준 떨어지는 열등감과 자기합리화에 빠져 사는 거다'라고 말할지는 모르겠다. 내가 나대로 행복하게 살아도 그런 사람들은 이상하게 자기 잣대에 따라 남을 불행한 것으로 규정하고 자기의 행복을 상대적인 우위에 두려고 하니.
소위 그런 권력을 쥐면 다 잘 산다고 생각하지만, 난 내 주변에 그런 명함을 들고도 끊임없는 열등감과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너무도 많이 봤다. '그 명함이 없다면 내가 사람대접이나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듯, 자존감이 오로지 스스로가 아닌 타인의 시선과 명함으로만 형성되는 '결핍된 사람들' 말이다.
오로지 서열로 내 위치가 증명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꾸려낼 수 없는 그 의존적 자존감은 저런 식의 교육으로부터 파생되는 것 아닐까. 그런 의심마저 들었다.
아이를 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들 생각하는 것처럼, 아이의 미래를 위해 어른의 걸음으로 아이를 조금이라도 앞에 끌어다 놓는 것이 아이를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근데 그 욕심이 정말 아이를 위한 것인지, 본인의 불안 해소와 만족을 위한 것인지는 걸음걸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걸음걸이는 그 사람의 본심을 비춘다. 그 사람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배려가 본심이라면, 그 사람의 종종걸음에 내 몸을 맡긴다. 그것이 아니라 내 걸음이 먼저 앞선다면, 그건 적어도 그 사람을 위해서라고는 할 수 없다. 내 조급함과 불안이 더 앞서는 것이다.
아이에겐 아이의 보폭이 있다.
왜 나의 보폭을 따라오지 못하는 것인지 답답하다고 화를 내는 것은 '아이를 잘 키운 나'가 되고 싶은 내 욕심일 뿐, 더 이상 아이를 위해서라는 말을 쓸 수는 없다. '목적'이 아이에서 나의 만족으로 옮겨가면, 그에 따라 '수단'도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들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다보면 '다른 부모, 아이들은 다 앞서 가는데 왜 내 아이만 이렇게 뒷걸음질 치는 것 같지'하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이것이 제대로 아이를 위하는 것인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비슷한 교육비를 쓰며 자기만족을 하고 만다.
그렇게 자기만족의 교육을 하면, 결과가 안 나왔을 때 "난 할 거 다 해줬는데 아이가 못하고 있으니, 이건 다 아이 탓이야"라고 자연스럽게 책임을 전가하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책임을 다 할 여력이 없는 아이는 부모로부터 전가된 과도한 책임에 짓눌리고, 정서적으로 끊임없이 상처받는다. 그런 상처는 아무리 몸이 크고 어른이 되어 번듯하게 혼자 삶을 꾸리게 되어도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긴다.
그러니 아이를 정말로 위한다면, 무엇을 선택을 하더라도 아이와 같은 보폭으로 맞춰 걸으며 함께 선택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불안이 나를 잠식해 오더라도, 그것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조금은 본인이 뒷걸음질을 해줬으면 좋겠다. 시선을 뒤로 향해줬으면 좋겠다.
어른이 아이를 위해서 조금 뒷걸음질 친다고 해도 아이까지 함께 뒷걸음질 치지 않는다. 아이는 계속 부모의 큰 걸음을 닮아가기 위해 스스로 성장한다.
아마 '아이 걱정'이라며 사실은 자기 걱정을 하고 있는 많은 부모는 이런 글을 보면 혀를 찰 것이고, 나랑 생각이 비슷한 부모들이나 내 글을 보고 공감을 할 것이다.
'지가 뭘 안다고, 요새 교육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아?'
'현실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데 속 편한 소리 하고 앉았네'
이런 반감이나 사고 말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나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나는 과연 어떤 부모가 될까? 나는 저런 부모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래도 그런 부모들에게 다시 묻고 싶다. 나중에 내가 부모가 되어서도 스스로 계속 자문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