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메의 문단속> 속의 애틋함
재난 트라우마와 문화적 기억의 현상학
재난을 유발하는 수수께끼의 존재, ‘미미즈’는 단순히 파괴의 상징이 아니다. 그 안에는 평범하고도 당연했던 사람들의 일상이 봉인되어 있다. 단 한 번의 불가항력적인 재난으로 수많은 이들의 ‘당연함’이 스러져갔음을, 영화는 시각적으로 압도하며 보여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사회는 그 짙은 슬픔의 농도를 감당하기 버거워 이를 ‘참사’라는 이름으로 단순화하고 사건화한다. 주디스 버틀러가 지적했듯, 이는 특정 죽음을 애도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만드는, 즉 애도가능성(grievability)의 불평등을 야기한다. 잊혀서는 안 될 수많은 개인의 삶과 감정은 그렇게 집단적 기억에서 소거되고, 문화적 트라우마로 자리를 잡고 만다. 치유되지 못한 이 트라우마는 우리를 위협하는 새로운 재난으로 되돌아온다. 과거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너의 이름은>을 통해 형식으로만 전락해버린 재난의 기억이 우리를 어떤 위험에 빠뜨리는지 그려냈듯, <스즈메의 문단속> 역시 그 맥락을 공유하며 더욱 깊은 사회적 책임을 묻는다.
개인의 트라우마와 사회적 방관의 딜레마
주인공 스즈메는 어머니를 잃은 재난 생존자이다. 참사를 겪은 이들이 대개 그렇듯, 그녀는 깊은 트라우마 속에서 ‘삶과 죽음은 결국 운’이라는 체념적 사고방식을 내면화한다. 이는 애도의 현상학적 관점에서 볼 때, 트라우마가 한 개인의 실존적 현실을 영구적으로 변화시킨 결과이다. 스즈메는 이 생각에 기대어 죽음에 가까워지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소타를 돕겠다는 책임감 아래, 보통 사람들이 가진 ‘삶에 대한 당연한 기대’가 없는 것처럼 주저 없이 몸을 내던진다.
반면 소타는 재난을 추모하고, 기억하며, 막으려는 ‘토지시’이다. 그의 일은 재난을 마주할 우리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만, 그는 “이런 일은 아무도 모르게 하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급박한 일상 속에서 타인의 죽음에 담긴 의미와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은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중요한 사명을 혼자 짊어진 결과, 소타 역시 온전히 누려야 할 자신의 삶을 등한시하게 된다.
추모와 예방의 마음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개인에게 과도하게 집중될 때 그의 일상은 망가진다. 이는 결국 본인 스스로 얼어붙어 죽은 것과 같은 삶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희생을 목격한 사회는 이내 ‘어차피 남의 일’이라며 그 중요성을 외면하고 잊으려 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바로 이 지점, 즉 ‘이미 벌어진 재난과 그 피해자들’과 ‘벌어질지 모를 재난과 잠재적 피해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가피한 간극과 딜레마를 정면으로 논한다. 그리고 그 둘을 가르는 것이 오롯이 ‘운’이라는 점이 이 비극의 핵심이다. 더 나아가, 사회는 때로 피해자가 슬픔을 드러내는 것 자체를 비난하고 매도하기까지 한다.
결국 모든 이가 함께 대비해야 할 사회적 재난의 책임은, 그것을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몇몇 개인에게 모두 전가된다. 그 일이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전가된 책임의 무게와 공동체 연대의 가능성
이러한 책임 전가의 구체적 희생양이 바로 스즈메의 이모 타마키와 의자가 되어버린 소타이다. 유능한 커리어우먼인 이모는 재난으로 고아가 된 스즈메를 키우느라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친다. 이동진 평론가의 말처럼 “연민은 쉽게 지치기에”, 아무리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 한들 억울함과 답답함은 생기기 마련이다. 그 무심한 책임 전가는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비틀고 평생의 짐을 지운다. 마찬가지로, 재난을 막는 역할을 하던 소타 역시 무한 책임감 속에서 교사라는 꿈과 일상을 잃고, 종국에는 자신의 존재마저 상실할 위기에 처한다.
이처럼 영화는 사회로부터 버려져 폐허 같은 삶을 살던 스즈메가, 재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자신을 극복하는 과정을 로드 무비 형식으로 그린다. 스즈메는 의자가 된 소타만 덜렁 든 채 문제 해결을 위해 길을 나선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먼저 친절을 베풀어 도움을 받기도 하고, 친절한 이들을 만나 그에 보답하기도 한다. 이는 재난 상황에서 발생하는 자발적 상호 지원, 즉 재난 공동체(disaster communitas)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동년배 친구 치카는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하는 듯한 스즈메에게 자신의 옷과 힘을 나누어 준다. 스낵바 마담 루미는 갈 곳 없는 스즈메에게 잠자리와 따뜻한 식사를 내어준다. 이 친절과 걱정의 교류는 결코 일방적이지 않고 쌍방향으로 이루어지며, 스즈메와 사람들은 서로의 일상에 하루를 더 살아갈 기운을 불어넣는다. 이는 공동체의 지원이 정신 건강에 보호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중요성을 명확히 보여준다.
외부자의 역할과 연대의 완성
이 시너지로 가득 찬 여정의 마지막에는 소타의 친구 세리자와와 이모 타마키가 합류한다. 친구의 일을 자기 일처럼 걱정하는 세리자와는 스즈메와 이모를 낡은 중고차에 태우고 먼 길을 떠난다. 재난으로 엉겨 붙은 두 사람의 아픔에 짓눌리지 않고, ‘싸우지 말아요’ 같은 우스꽝스러운 옛 노래를 틀면서 말이다.
생각이 없는 건지, 너무 깊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그저 흥얼거리는 그의 모습은 재난의 외부자로서 우리가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한다. 잘 나가는 세단을 태워주거나, 쏟아지는 비를 완벽히 막아주거나, 모든 것을 책임져줄 수는 없을 것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에 온전히 공감할 수도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눈물 흘리는 그들이 내게 왔을 때, 잠시 어깨 한쪽을 내어주고 그들의 슬픔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도록 나의 일상으로 부드럽게 이끌어주는 것. 감독은 방관자일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바로 이런 모습을 바라는 것은 아닐까.
애도와 연대를 통한 사회적 치유
짧고도 긴 여정을 통해 스즈메는 재난이 자신에게만 귀속된 고통이 아님을 깨닫고, 수많은 타인의 온기를 품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키스라는 형태로 그 따뜻함을 얼어붙은 소타에게 전해 그를 깨우고 손을 잡는다. 새로이 닥친 재난은 이제 혼자가 아닌 두 사람을 통해 잠재워진다.
모든 것을 마친 스즈메는 저세상에서 어린 날의 자신과 마주한다. 과거의 스즈메는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미안하다’는 차가운 말 한마디 속에 홀로 울고 있었지만, 이제 타인의 온기를 품은 현재의 스즈메는 미래를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일으켜 세운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그려지는 귀갓길은, 스즈메와 이모가 길 위에서 만난 모든 친절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과정으로 채워진다.
우리 사회는 언제까지 반복될지 모를 재난의 피해자들을 애써 외면할 것인가. 우리 개개인은 자신이 재난의 잠재적 피해자라는 사실을 언제까지 무시할 것인가. 삶이 덧없을지라도 하루라도 더 평범한 일상을 살고 싶었을 그들을 왜 이리도 모질게 대할까. 모든 것을 책임져달라는 것도 아닌데.
<스즈메의 문단속>은 하나의 거대한 상상력의 실험실로서, 우리 사회에 간절하게 말한다. 개인들이 자신의 일상을 잃지 않으면서도, 아주 작은 친절과 연대로 재난의 책임을 나누고 희생자를 기릴 때, 우리는 더 큰 슬픔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상처 입은 이들 또한 그 작은 배려들이 쌓여 만들어진 온기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삶을 회복할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