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PD의 맛있는 이야기
"피디님 A작가 그만둔다는데요"
"왜?". "저번에 평양냉면 때문에요"
사건의 발단은 그랬다. 평양냉면이 문제였다. 경상도 한 지역의 평양냉면 집에 촬영을 갔다. 평양냉면 가게가 있을 지역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업력도 오래됐고 건물도 노포 분위기가 물씬 났다. 이곳에서 평양냉면을 찾으면 히트 아이템이 될 가능성이 컸다. 웬걸. 출연자 두 분이 냉면 국수를 한 입 하자마자 나를 쳐다본다. 어라? 뭔가 이상했다. 한 그릇 추가해서 나도 한 젓가락 거들었다. 이런. 새콤 달콤한 육수에 고구마 전분으로 뽑은 쫄깃한 면발.
"A작가 이건 평양냉면이 아닌 거 같은데. 왜 이걸 아이템으로 한 거야?"
"다른 평양냉면은 입에 안 맞는데, 이건 맛있어서요"
"아... 본인 입맛에 맞는다고 보리밥이 쌀밥은 아니잖아. 이 냉면엔 평양냉면의 특징이 하나도 없어"
평양냉면은 메밀면이어서 툭툭 끊기고, 육수도 슴슴해야 하며 어쩌고 저쩌고. 평양냉면의 엄격성에 입각해 잔소리를 곱빼기로 늘어놨다. 이 지면을 빌려 A작가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변명하자면 평양냉면 맛에 중독되면 이상한 고집이 생긴다. 평양냉면 맛은 꼭 이래야 한다며, 누구와도 타협을 거부하는 아집. 논리적으로 평양냉면 맛의 정답은 남한엔 없다. 남한 어디에도 '평양'은 없으니까. 그렇기에 A작가가 찾은 경상도의 냉면도 평양냉면일 수 있다. 물론 아닐 수도 있고.
냉면의 계절이 왔다. 본래 겨울철음식이라는 말도 있지만 수요만 생각한다면 단연코 냉면은 여름 음식이다. 뙤약볕 아래서도 냉면 한 그릇을 위해 한 시간 대기를 마다하지 않는 식도락가들로 냉면집 앞은 북새통이다. 평양냉면 순례를 떠나보자. 정답이야 모르겠지만 맥락은 잡힐 것이다. 평양냉면은 이 맛이라는 맥락.
평양냉면에 입문하기에 좋은 집 추천을 종종 받는다. 나의 추천은 한결같다.
"맛이 있다, 없다를 떠나서 그냥 '우래옥' 냉면을 먹어봐. 그 맛을 기준 삼아 다른 집 냉면을 먹다 보면 내 입맛에 맞는 냉면이 찾아지는 거지"
우래옥. 현존 한국 최고(最古)의 냉면 노포. 평소에는 한 시간, 날이 더워지면 2시간 이상을 대기해야 한 그릇 먹을 수 있는 핫플레이스다. 우래옥의 물냉면은 슴슴하지 않다. 육향이 강한다. 초심자들이 먹어도 고기 육수 맛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곳이 우래옥이다. 흔히들 평양냉면 육수는 고깃국물에 동치미를 섞어서 만든다고 알고 있다. 과거의 일이다. 70~80년 대 식품 위생 검사에서 대장균 검출로 영업 정지가 잦았다. 그 이후로 냉면 육수에 동치미 국물을 섞는 집이 줄어 들었고, 현재는 무교동의 남포면옥이 유일하다. 우래옥도 과거에는 동치미를 섞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지금은 소고기로 육수를 뽑는다. 저마다 다른 개성의 평양냉면 집에서 어떤 육수를 쓰는지는 고명을 보면 알 수 있다. 소고기 편육만 올려 저 있으면 소로 육수를, 돼지 편육도 함께 있으면 소와 돼지 육수를 섞는 집이다.
육수의 감칠맛으로 유명한 우래옥 맛의 핵심은 육수와 면의 조화로움이다. 강한 맛의 육수를 충분히 받아내는 면의 구수함과 메밀향이 일품이다. 평양냉면은 면을 입 안 가득 넣고 우물우물 오래 씹어야 한다. 그래야 면이 품은 숨은 단맛이 모습을 드러낸다. 짭짤한 고기육수는 메밀면의 숨은 단맛을 돋보이게 해주는 든든한 배경이다.
우래옥에서 냉면을 시킬 땐 냉면김치와 물고추 다대기를 추가하는 걸 잊지 말자. 우래옥 음식이 평양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걸 가장 잘 보여주는 음식이 냉면 김치다. 고춧가루를 적게 써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냉면에 식초 대신 냉면김치를 넣어도 좋다. 물고추 다대기도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우래옥만의 특징이다. 빨간 고추를 다져 놓은 양념 한 스푼 넣으면 옅은 매콤함이 육향을 잡아줘 맛이 깔끔해진다. 냉면김치와 물고추 다진 양념 둘 다 부탁해야 가져다준다. 공짜니 부담 없이 부탁해도 된다.
우래옥의 가장 큰 단점은 가격이다. 냉면만큼 유명한 불고기까지 곁들이면 3명이서 20만 원이 금방이다. 계산서를 보면 급 우울해진다. 자주 먹다가는 서민 주머니 펑크 나기 십상이다. 물론 대안이 있다. 종로 3가 유진식당이다. 냉면 포함 모든 메뉴를 다 시켜도 10만 원 언저리다. 특히 평양냉면 11,000원은 아름다운 가격이다. 육향 짙은 육수나 구수한 면발 모두 수준급이다. 맛의 섬세함과 곁들임 음식에선 우래옥과 차이가 있지만 가성비로만 생각하면 유진식당의 냉면은 전국 톱클래스다. 입문자도 큰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편안한 평양냉면의 보금자리다.
강남으로 넘어가면 진미평양냉면이 있다. 장충동 평양면옥 출신 셰프가 독립하여 만든 신흥 강호다. 참고로 업력이 10년이다. 평양냉면계에서 10년은 신흥이란 표현이 맞다. 진미평양냉면은 평양면옥의 육수와 맞닿아있다. 맑고 은은한 육향이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진미평양냉면의 시그니처는 면발이다. 폭신한 면의 식감이 특별하다. 식감만으로도 구수함이 표현된다고 알게 해준 집이 진미평양냉면이다. 맑고 세련된 맛이랄까. 장충동 평양면옥과 같은 듯 다른 맛이다. 마치 이란성쌍둥이를 보는 듯하다. 10분 거리에 장충동 평양면옥 논현점이 있다. 두 집을 비교해서 먹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시도이다. 젊은 mz세대 평냉 마니아들은 모두 이곳에 모이는 것 같다. 대기줄이 어머어마하다. 저녁 시간에는 대부분 어복쟁반을 먹고 있는 것도 진미평양냉면만의 풍경이다.
2018년 4월 문재인 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남북 정상회담 만찬장에 평양 옥류관에서 직접 가져온 평양냉면 시식 장면이 공개됐었다. 놀랍게도 면의 색은 까맣고 겨자, 식초, 다진 양념을 듬뿍 넣어서 먹는 모습이었다. 육수도 간장으로 간을 해서 까만색. 서울의 맑고 투명한 육수에 뽀얀 면의 평양냉면과는 거리감이 너무 컸다. 특히 그 검은 빛깔의 면은 메밀면이 아니라 칡냉면의 면발에 가까웠다. 당시 만찬장에 나왔던 냉면을 경험하고 싶다면 서초역으로 가면 된다. 탈북 새터민이 운영하는 '설눈'이 있다.
탈북 새터민 가족이 운영하는 설눈의 물냉면은 사대문의 것보다 평양 만찬장의 냉면과 닮아있다. 까만색 면과 넉넉한 고명에 짙은 육수까지. 유난히 눈이 가는 건 면 타래다. 쪽 진 머리처럼 면이 똬리를 탄탄하게 틀고 있다. 예전 냉면 집 주방은 면 반죽을 담당하는 반죽꾼, 면을 익히는 발대꾼, 익힌 면을 찬물에 헹구는 앞잡이 등 업무 별 영역이 확실했다고 한다. 설눈의 주방은 '앞잡이'의 손놀림이 좋다. 면의 물기를 확실히 제거한 후 면 모양을 잡는다. 냉면 그릇 안 면 타래를 푸는 데 서울 어느 곳 보다 오래 걸린다. 면 타래가 품은 물기가 많으면 육수가 맛이 없어져 일부러 면이 잘 안 풀릴 정도로 타래를 만든다고 한다. 설눈 냉면 사리는 메밀 90%에 고구마 전분 10%를 섞는다고 한다. 대부분의 냉면 노포가 메밀에 밀을 섞는 것과는 뚜렷한 차이점이다. 색이 검은 이유는 메밀을 한 번 볶아서 쓰기 때문이라며 설눈 냉면이 현시점 북한의 평양냉면과 가장 가깝다는 자부심이 크다.
면의 특별함으로는 을밀대도 뒤지지 않았다. 우래옥, 을지면옥, 필동면옥, 평양냉면, 남포면옥 등 전통의 냉면 명가들은 모두 중구에 몰려있다. 북한 실향민들이 중구 전통시장 주변에서 장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포 한전 지사 뒷골목 주택가에 자리 잡은 을밀대는 한 때 '마포에 있는 평양냉면집'으로 불렸다. 동네 분식점이 있을 듯 한 자리에서 평양냉면을 뽑으니 등장 자체도 신선했다.
을밀대는 여러모로 전통 평양냉면과는 다른 개성을 갖고 있다. 우선 면이 두껍다. 보통 평양냉면 사리가 중면 정도의 굵기라면 을밀대는 쫄면 보다도 면발이 굵었다. 육수도 살얼음이 가득했다. 살얼음 낀 차디 찬 육수에 두꺼운 메밀면은 사대문 중심가 냉면집에는 없었던 개성 넘치는 맛이었다. 얼어있던 육향이 입에서 녹으면 짙은 감칠맛이 있었고 굵은 면발은 씹는 맛이 있었다. 돼지고기 가득한 녹두 빈대떡도 곁들임으로 좋았다. 사대문 중심가 냉면보다 투박하지만 정감 있는 맛이었다. 을밀대 냉면은 번잡한 도심보다 주택가 골목이 어울림을 맛이 설명하고 있었다.
일 년 전, 오랜만에 찾아간 을밀대의 면발이 가늘어져 있었다. 면의 두께는 얇아졌는데 삶는 시간은 그대로인지 맛이 싱거웠다. 창업주가 돌아가신 뒤 본점 소유문제를 두고 형제의 난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잘 봉합되었다고는 하나 그 여파가 맛으로 전해지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된다.
도심을 떠나 을밀대처럼 개성 넘치는 맛을 뽑고 있는 변두리의 냉면 집들을 찾아가는 건 전통의 명가 냉면 순례만큼이나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그곳에는 냉면 맛을 위한 새로운 도전도 있고, 중심가 냉면집들에선 사라진 전통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