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그리워지는 날에
‘은하수 깊은 밤‘입니다.
막걸리 이름이 멋들어집니다. 찹쌀로 빚은 막걸리여서 녹진한 질감이 잔을 채웁니다. 이름 따라 깊은 밤에 마십니다. 혼술입니다. 달지 않네요. 시큼하고 쌉싸름합니다. 알코올 도수 8도에 비해서는 무게감이 느껴지는 술입니다. 혼자 마시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혼술을 할 때면 문득..
'말'이 그리워집니다.
퇴사 후 독립 선언을 한 지 3년. 수많은 퇴사자들의 고충이 저라고 비켜갈리는 없습니다. 들려오는 말이 현저히 줄었습니다. 걸려오는 전화도, 문자도 날이 갈수록 희미해져 갑니다. 연말이면 쉼 없이 울려대던 송년 인사 카톡도, 신년이면 영혼 없이 들려오던 밥 한 끼 먹자는 전화도, 이제는 몇 통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방송사의 부장이라는 직급에게 걸어오던 말이 사라진 탓이니까요. 말을 건네줄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서지 못한 탓이니까요. 용기를 내어 옛 직장 동료들에게 전화를 걸어 봅니다. 받지를 않네요. 바쁜가 보다 생각하고 되돌아올 전화를 기다리지만 며칠이 지나도 전화는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홀로 글을 쓰며 커피 한 잔 마실 때면 회사 앞 카페 골목에서의 실없는 수다가 생각납니다. 상사에 대한 푸념, 시청률에 대한 걱정, 얇은 지갑의 한숨까지 큰 의미 없는 말의 가벼움이 생활의 온도를 만들어 주고 있었음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주변의 말이 잦아드니 휴대폰과의 대화가 늘어납니다. 그러다 보니
‘말’이 지겨워집니다.
“경호처가 윤 체포 저지하면 현행범 체포”, “영장 집행 무력 사태 막는 게 제일 중요”, “러시아 파병 북한군 사망 300여 명, ‘김정은’ 외치며 자폭 시도”, “나랏돈 축내는 벌레 아냐”, “저항할까 봐 잡지 말란 얘기”, “윤석열, 칼이라도 들고 막아라 지시”, “김건히 환심 사려 경호 마크 새긴 반려견 옷 선물하기도”, “‘대통령 무력 사용 지시’ 한겨레 보도 가짜뉴스”, “영장 집행은 불법체포감금죄”… 휴대폰이 건네는 말은 사납습니다. 그 누구보다 빠르게 거친 세상의 모든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냅니다. 피곤합니다. 말 같지도 않은 말이 난무합니다. 들을 말을 선별하는데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진됩니다. 휴대폰 뉴스 앱을 접습니다. 술잔을 다시 듭니다. 혼술의 적막함 속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은하수 깊은 밤에는
걸쭉함 속에 고소함이 있습니다. 반전이죠. 무뚝뚝한 인상의 시골 총각이 미성으로 뽑아내는 노래 같습니다. 청량한 배향도 느껴지네요. 걸쭉함이 사라진 혀 위에 희미한 단맛도 있습니다. 혼술 하기 좋은 막걸리입니다. 특별한 안주도 필요 없고, 특별한 말도 필요 없습니다. 흔치 않은 막걸리죠. 단맛이 강했다면, 물처럼 맑았다면, 함께할 맛이 필요했을 텐데 ‘은하수 깊은 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말이 그리워 누군가를 생각하는 밤에, 말이 지겨워 홀로 있고 싶은 밤에 모두 어울릴 수 있는 막걸리입니다.
김훈 작가는 수필집 [허송세월]에서
“언어는 소통이 아니라 적대의 장벽을 쌓는 사업에 동원되었다. 여러 정파들이 날마다 욕지거리, 악다구니, 거짓말, 저주와 증오, 가짜뉴스를 확성기로 쏟아내고 언론 매체가 이 악다구니를 전국에 증폭시킨다. 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들은 모두 ‘정의’의 탈을 쓰고 있어서 이 철벽에는 작은 구멍도 뚫을 수가 없다.."라며 묵직한 글을 남겼습니다. 김훈 작가 본인은 생활의 맛이 강해서 막걸리를 저어한다고 했지만, 그의 글에 담긴 농익은 묵직함은 잘 익은 막걸리에 닿아 있습니다. 김훈 작가의 명문을 읽으며 술 한잔을 뭉근히 더해봅니다.
은하수 깊은 밤에
취해가고 있습니다. 말도 없고, 안주도 없지만 좋은 글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알딸딸한 기운에 눈에 들어오는 활자들이 내일 기억날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나는 기억날 듯합니다. 덤덤함 속에 고소한 산미를 품은 은하수 깊은 밤은 꽤 괜찮은 막걸리라고요. Owl City의 노래 ‘Galaxies’를 플레이합니다. 더 좋은 밤이네요. 사람들이 도시에 모여 살듯이, 별들이 모여 사는 곳을 은하라고 한다지요. 우주라는 무한한 공간 위에 모여 사는 별들을 닮고 싶어 사람들도 땅 위에 모여 복작복작하고 있나 봅니다.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노래를 하면서 말이죠. 은하수에 모여있는 별들도 서로에게 말을 할까요? 별들의 말은 한 없이 가볍겠지요. 욕지거리도 악다구니도 없는 보드라운 일상의 말들이 별들과 별들 사이를 유영하고 있겠지요. 속닥속닥 거리는 별들의 수다가 무리 지어 은하수의 하얀 띠를 이루고 있을 겁니다. 은하수의 수많은 별들 중 하나가 되어 하얀 수다의 띠 속으로 들어가고 싶네요. 바라만 보니 가볍기 그지없는 생활의 말이 그리워지네요. 가벼운 말의 무해함을 깔깔대며 떠들어 주던 사람들이 보고파지네요. 은하수 깊은 밤에, 좋은 술을 마시니, 별 생각을 다하게 되네요.
은하수 깊은 밤(경북 영양, 발효공방1991)
제품명 : 발효공방 은하수8 (메인라벨과 제품명이 상이)
알코올 : 8도
원재료 : 정제수, 쌀(국내산), 밀, 국, 효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