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PD의 맛있는 이야기
대구 음식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경상도 음식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 때문이었죠.. 뜨거운 대프리카(대구 아프리카)를 닮아 대구의 맛은 짜고, 맵고, 자극적인 그들만의 음식일 거라는 위험한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솔직히 그랬습니다.
"야, 대구역에서 다들 내리자". 35년 전 얼치기 여행가 시절, 7번 국도 순례를 위해 부산행 밤차를 타고 새벽을 달리던 중 일정을 변경해서 대구에서 내리기로 했습니다. 밤새 타고 왔던 기차도 지겨웠고 어차피 목적지는 설악산이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대구와의 첫 만남이 성사됐습니다. 20살 더벅머리 서울 촌놈들이 새벽 대구역에서 제일 처음 찾은 곳은 당연히 국밥집이었습니다. 인터넷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 밥집을 찾는 기준은 '길'이었습니다. 대로변 번화가에 있는 식당은 '비싼' 밥집이었고 골목길에서 새벽 장사를 하는 집은 '싼' 집이라는 나름의 기준을 20살 변두리 청춘들은 갖고 있었죠. 역전 골목길을 찾아 돌아가니 역시나 국밥집 간판에 불이 켜져 있더군요. '따로국밥'. "오! 뭔가 있어 보여. 재야의 고수가 하는 숨은 국밥집일 거야"
뭘 따로 준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시켰습니다. 밥 따로 국 따로 더군요. 파와 콩나물에 고기 건더기는 몇 점 없고 붉은 끼가 도는 희멀건 국물을 허겁지겁 떠 넣었습니다. '어? 뭐지? 맛이 안 느껴져'. 1000원 국밥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20살 청춘의 새벽 배고픔이면 뭐든 맛있을 텐데 맛 자체가 없었습니다. 간이 안 맞았던 거죠. '국 싱겁게 끓이도 힘든데.. 하아..'. 새벽에 낯선 도시의 골목길에서 만난 고수의 아름다운 국밥 한 그릇의 환상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맵기만 한 따로국밥 한 그릇으로 대구 음식에 대한 선입견이 확 들어선 거죠. '맛없어'라는 건방진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렇게 30년을 넘게 살았습니다. 반전의 계기는 '백반기행'이었습니다.
백반기행 대구 편을 준비하면서 가장 신경 써서 사전 답사를 한 집이 따로국밥 식당이었습니다. 현장 피디와 작가들이 일주일을 넘게 하루 여섯 끼씩 먹어가며 따로국밥을 찾아 헤매었죠. 대구의 영혼과도 같은 음식이기에 더 신경 써서 찾기도 했지만 대구 음식에 대한 편견 가득한 CP(책임피디)에, 맛없음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허영만 선생님에, 심지어 출연자는 대구의 아들 양준혁이라니. 답사팀이 제대로 맛이나 느꼈을지 모를 부담감이 지금도 어른어른하네요. 그 부담감을 뚫고 찾은 따로국밥집이 [화개장터 가마솥국밥]입니다. 벌써 6년 전인데도 메인작가의 전화 음성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부장님 이 집은 진짜예요".
대구 외각 칠곡의 오래된 한옥집인 화개장터 가마솥국밥의 음식 준비는 대파 다듬기로 시작됩니다. 대파 흰 부분과 푸른 부분을 나눠 자른 후 푸른 부분만을 끓는 물에 데치죠. 푸른 부분이 진이 많아서 국이 끈적해지기 때문이라네요. 맛집에는 항상 디테일이 살아 있습니다. 노부부 두 분이서 하루 30단의 대파를 매일 다듬어 자르고, 가마솥에 국을 끓이십니다. 대파 덕분에 건더기가 가득한 얼큰하고도 달큼한 소고기 국밥이 나오죠. 큰 덩치가 툇마루에 앉아 국밥을 입에 가득 넣더니 어머니 생각이 난다며 감탄하던 양준혁 선수가 생각납니다. 게다가 촬영 당시는 국밥 한 그릇에 6000원(현재는 7000원)이었으니 가성비까지 완벽한 집이었죠. 대파의 진까지 섬세히 다스린 탓에 한 수저 국물 맛을 보면 30여 년 전에 먹었던 대구역전 골목길 따로국밥은 도대체 뭐였나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국으로 가장 맛을 내기 어렵다는 깔끔하면서도 깊은 맛이 소박한 한 그릇에 푸짐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따로국밥은 기본적으로 소고기국밥입니다. 서민의 음식인 국밥은 시장통에서 발달하기 마련이죠. 종로의 청진동 해장국도 종로시장 나무꾼들에게 팔던 국이 현재에 전국구 맛이 됐듯이 대구의 따로국밥도 대구 시장통 길거리 좌판에서 발달한 음식입니다. 대구 따로국밥의 원조격이 국일 따로국밥이 그렇게 성장한 식당이죠. 대구 따로국밥의 첫 번째 특징은 대파입니다. 대구 시내 유명 국밥집은 대파만 따로 다듬어서 납품하는 ‘파 아저씨’가 있을 정도입니다. 하루에 150 단 이상을 다듬는다고 하네요. 1960년대까지는 따로국밥용 대파가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다끼파’라고 불리던 품종이었는데 뿌리 부분에 자줏빛이 감돌면서 파 향이 독해 다듬으면 눈물이 줄줄 흘렀다고 하네요. 경북 고령 호촌리에서 재배해서 반고개 길 넘어 대구로 왔는데 현재는 멸종해서 구할 수가 없습니다.
대구 국밥은 파와 무, 소고기를 고추양념에 무쳐서 은근하게 끓여냅니다. 덕분에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맛 삼대장인 매콤함, 감칠맛, 달달함이 국물에 가득 담깁니다. 여기에 대구의 포인트 하나가 더 있죠. 백반기행 촬영 당시 준혁이 형(양준혁 선수는 제가 호형호제하는 몇 안 되는 출연자입니다. 그래서 형이라는 호칭이 더 편하네요)은 거침없이 이 다진 마늘을 국에 넣더군요. 따뜻하게 끓여져 내온 빨간 국물 위에 더해지는 다진 생마늘 한 수저. 요즘 말로 대구식 국밥의 마지막 ‘킥(요리의 맛을 더하는 결정적 한 수)’입니다. 따끈한 국물에 더해진 다진 마늘은 반생반숙이 되죠. 아시다시피 익혀진 마늘엔 달달한 감칠맛이 생마늘엔 알싸한 매운맛이 있습니다. 반생반숙이 된 다진 마늘 덕분에 국밥에 알싸한 단맛이 더해집니다. 지혜로운 레시피입니다. 2024년 전국 마늘 생산량 상위 7개 시도에 대도시로는 유일하게 대구가 5위를 차지한 건 지역의 유별난 마늘 사랑에 기인할 겁니다. 대구의 마늘 사랑이 듬뿍 담기는 또 다른 음식이 동인동 찜갈비입니다.
매운 찜갈비로 알려진 대구 동인동 거리의 명물은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빨갛게 양념된 소갈비 혹은 돼지갈비가 맛깔스럽게 담겨 나오죠. 갈비 위에는 다진 생마늘이 수북이 쌓여 있고요. 따로국밥과 맥락은 동일한 레시피죠. 동인동 찜갈비는 생갈비 찜에 느끼함을 잡으려 고춧가루와 마늘 양념을 치기 시작한 것이 유래라고 합니다. 요즘은 간장양념으로 초벌 찜을 한 갈비를 양은 냄비에 담아 매운 양념과 함께 강한 화력으로 데워주죠. 중독되면 헤어 나오기 힘들다는 대구 매운 찜갈비의 비법도 반생반숙되어 알싸함과 단맛을 동시에 주는 마늘의 이중성에 있지 않을까요? 매력적이지요.
따로국밥처럼 대구의 매운 찜갈비도 서민적인 음식입니다. 찌그러지고 그을린 양은 냄비가 찜갈비를 상징한다고 할까요. 동인동 거리의 찜갈비도 좋지만 저는 서문시장의 [삼미갈비찜]을 좋아합니다. 관광거리로 명소화된 동인동보다 서문시장의 삼미갈비찜에서 서민의 정서를 더 매콤하게 맛볼 수 있거든요. 청국장 서비스를 포함해서 일 인분 9000원으로 말입니다. 복작복작한 식당 안에서 찜갈비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은 가까이 보면 맛나고 멀리서 보면 정겹습니다.
전통주 미식모임에서 매운 찜갈비에 어울리는 술로 벨기에 세종 스타일의 맥주를 페어링 한 적이 있습니다. 세계 맥주대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브루어리 마스터님의 추천 덕분이었죠. 대구식 매운 찜갈비와 벨기에 세종 스타일의 맥주 페어링은 기가 막혔습니다. 혀에 남은 매운맛을 씻어주는 상큼하고 쌉싸래한 청량감이란. “캬아~”하는 시원한 울림이 절로 터져 나왔죠. 세종(Saison) 스타일의 맥주는 벨기에식 농주(農酒)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벨기에 남부 지역에서 농번기인 여름에 새참으로 마시기 위해 가을과 겨울에 맥주를 양조해서 계절 맥주라는 의미로 세종(Saison)이라는 이름이 붙었죠. 프랑스어로 Saion은 영어 Season(계절)과 동의어입니다. 일하며 마시는 농주기 때문에 도수도 그리 높지 않고, 에일 맥주라 지나치게 가볍지도 않습니다. 벨기에 막걸리인 셈이죠. 시골 농민의 술인 벨기에 막걸리가 대구 서민의 맛인 매운 갈비찜과 어찌 안 어울릴 수 있을까요. 마리아주(marriage)라는 말이 있죠. 프랑스어 결혼, 결합이란 뜻을 가진 단어로 와인과 요리의 환상적인 궁합을 일컫는 말입니다. 벨기에 세종 스타일의 맥주와 대구 매운 갈비찜이야 말로 멋진 마리아주입니다. 환상적인 국제결혼이죠.
뜨거운 대프리카(대구 아프리카)를 닮아 대구는 짜고, 맵고, 자극적인 그들만의 맛일 거라는 위험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제법 있습니다. 하지만 대구 음식은 화끈한 개성에 비해 상당히 대중 친화적입니다. 누구나 쉽게 친해질 수 있는 대중적인 정서를 품고 있죠. 산적 같은 외모의 푸근한 동네 삼촌 같은 양준혁 선수처럼 말입니다. 왜일까요? 해답은 대구의 놀라운 역사적 배경에 있습니다...(대구의 맛과 술 2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