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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맛과 술 2

조PD의 맛있는 이야기

by 조승연 PD

(대구의 맛과 술 1편에서 이어집니다)


"대구시에는 2군 사령부, 군통합병원, 미 8군 사령부 외에도 육군본부가 미처 환도하지 못한 채 있었고... 향촌동 송죽극장 일대에는 넥타이 맨 양복쟁이와 양장차림에 뒷굽 높은 뾰족구두를 신은 여자들로 넘쳤고, 군복차림의 한국군과 미군도 민간인만큼이나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김원일의 소설 마당 깊은 집 중에서)


전란이 한반도를 휩쓸었던 1950년에도 안전한 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구입니다. 우스갯소리로 대구에는 오발로 떨어진 박격포 한 발 말고는 전쟁의 흔적이 없다고 합니다. 팔공산과 비슬산, 낙동강과 금호강, 신천이 둘러싼 요새 같은 분지 지형 덕분에 전쟁의 화마도 피해 간 거죠. 대신 팔도의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합니다. 전쟁을 피해 온 피난밀들 중에는 유랑극단 배우들도 있었죠. 대구 한일극장이 전쟁시기 동안에는 국립극장 역할을 했거든요. 황금심, 남인수, 허장강, 구봉서, 배삼룡 등 내로라하는 악극 배우들이 대구 시내를 활보했다고 하네요. 예나 지금이나 연예인들 중에는 미식가가 많습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맛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직업이기 때문이죠. 행사 때문에 팔도 방방곡곡에서 노래하는 트로트 가수들 중에 입맛 고급인 분들이 많은 데는 다 이유기 있는 법이죠.

1951년04.jpeg 1951년 대구역 부근

'대구는 6.25 한국전쟁 특수를 누린 곳이다'(달구벌 맛과 멋 중에서)


따로국밥의 원조인 국일 식당은 원래 따로국밥집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서민, 일꾼들의 국밥은 국에 밥을 말아서 나오죠. 거리의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릇 수를 줄여야 하고 먹기 편해야 합니다. 대구 국일식당도 46년 한일극장 옆 공터 나무시장에서 나무꾼들을 상대로 국에 밥을 말아 팔던 집이었죠. 창업주 김이순 할머니의 손맛이 소문이 나면서 자그맣게 간판 없는 식당을 차려놓고 국밥을 팔았을 뿐입니다. 반전의 계기는 한국 전쟁입니다.


‘국일 따로국밥은 6.25의 히트작이다’(달구벌의 맛과 멋 중에서)


6.25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 대구에 모인 당대의 예인들은 본능처럼 맛을 찾아 국일식당에 모였을 겁니다. 빨간 국물에 선지와 소고기, 파와 무가 섞여있는 맛을 지나칠 수는 없죠. 문제는 여배우들이었다고 합니다. 건더기 가득한 빨간 국물에 말아진 밥을 예쁘게 먹을 방법이 도무지 없었으니까요. “할머니, 국하고 밥하고 따로 주세요”라는 특별 주문은 예쁘게 맛을 보려는 여배우들의 욕심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덕분에 피난 온 양반들도 반가의 법도 대로 밥과 국 따로 주문에 동참하기 시작했고, 대구 피난민들 사이에서 ‘국일 따로국밥’으로 불리기 시작해 지금의 상호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피난민과 지역 음식이 만나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낸 샘이죠.


음식은 사람을 통해서 진화합니다. 1950년을 기점으로 대구에는 사람이 넘쳐납니다. 섬유 산업이 대구를 중심으로 발전을 하며 많은 노동자를 불러 모읍니다. 1960년대에는 정권의 심장이 되어 정치 사회적 명망가들이 대구에서 먹고 마시는 일이 잦아지죠. 각계각층의 입맛이 모이면 개성 강한 토속음식의 뾰족함도 무뎌지죠. 입맛의 평균을 찾아 음식이 진화를 하는 겁니다. 삭힌 홍어도 전국구 음식이 된 후 많이 순해졌습니다. 대부분의 시판 홍어는 삭힌 향만 슬쩍 날 뿐 초보자도 먹을만합니다. 다수의 입맛을 위해 뾰족한 개성을 다듬어 대중성을 얻은 거죠. 고추 맛과 마늘 맛으로 화끈했던 대구의 음식도 전국의 사람들을 만나 대중성이라는 조미료를 치게 됩니다.


따로국밥, 뭉티기, 막창구이, 동인동 찜갈비, 논메기 매운탕, 복어 불고기, 누른 국수, 무침회, 야끼우동, 납작 만두. 대구를 대표하는 10 미(味)입니다. 유일하게 회가 하나 있죠. '무침회'. 이름에 대구의 고집이 보이네요. 모두가 'Yes'라고 할 때 'No'라고 말하듯이, 모두가 '회무침'이라고 할 때 '무침회'라고 말하는 고집 말입니다.


무침회는 대구의 지형적 특징을 잘 표현한 음식입니다. 바닷가의 회무침과 다르게 대구의 무침회는 숙회 무침입니다. 주재료가 삶은 오징어와 논우렁이고, 여기에 미나리와 무를 넉넉히 넣어 빨간 양념에 무쳐 먹죠. 전쟁의 화마도 들어오기 힘든 내륙 분지에 싱싱한 활어회가 쉽게 들어올 수는 없었겠죠. 80년대까지 대구의 회는 삶은 오징어, 아나고(붕장어를 데쳐서 만들죠), 잘 상하지 않는 가오리와 민물 논우렁 삶은 것 등이 대표적이었습니다. 내륙이 만들어낸 식문화인 셈입니다. 환경이 주는 한계가 '무침회'라는 멋진 맛을 만들어 낸 거죠. 60년대 반고개 진주식당 할머니가 안주로 내기 시작한 숙회 무침이 히트를 치면서 대구의 대표 음식이 되었습니다. 값도 싸고, 양도 많고, 맛도 좋으니 어찌 전파가 되지 않을까요. 대구 반고개에는 무침회 거리가 조성이 될 정도니까요.

KakaoTalk_20250313_095811032_12.jpg 교동시장에서 허영만 선생님과 함께

허영만의 백반기행도 무침회를 찾아갔습니다. 반고개 무침회 거리가 아니라 교동시장으로요. 교동시장은 1950년대 피난민들에 의해 형성된 재래시장입니다. 미제군복, 외국과자, 양주, 화장품 등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들고 나온 피난민들의 좌판이 모여 시장이 된 거죠. 그래서 대구의 대표 평양냉면 노포인 강서면옥, 대동면옥, 부산 안면옥도 교동시장 주변에 모여있습니다. 북한 실향민들이 고향 사람들을 상대로 냉면 장사를 하기엔 교동시장 주변이 가장 좋았던 겁니다. 대구 평양냉면은 서울에 비해 육수의 간이 센 편입니다. 평양의 맛이 대구와 화합을 한 거죠. 대구의 맛이 타지 사람들을 만나 대중성을 찾았듯이요. 그래서 일까요. 교동시장 남해횟집의 무침회는 반고개의 무침회보다 구성이 다양합니다. 삶은 오징어, 소라, 아나고, 가자미, 논우렁 등에 본인이 원하는 횟감을 지정해서 더 추가하거나 뺄 수도 있습니다. 반고개 무침회가 삶은 오징어, 논우렁에 가자미 정도를 더하는 전통을 고수하는 것에 비해 교동시장 남도횟집은 유연성과 다양성이 있습니다. 외지인들이 모여서 형성된 교동시장의 특징이 무침회에도 반영된 것이죠.

KakaoTalk_20250313_102429726_10.jpg 남도횟집 무침회. 택배로 전국에서 먹을 수 있다

다양한 해산물 숙회에 미나리와 무를 넉넉히 더한 남도횟집 무침회를 입맛 까다로운 허영만 선생도 맛나게 드시더군요. 허영만 선생은 초장이 회맛을 가린다고 회무침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특히 단맛 강한 회무침은 아주 싫어라 하죠. 대구 무침회는 일단 달지가 않습니다. 심플한 매운맛이 숙회의 단맛을 부각해 주죠. 미나리와 무의 아삭한 청량감은 뒷맛을 개운하게 만들어 줍니다. 여기에 무침회를 먹는 대구만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주문 즉시 사장님이 근처 분식집에 전화를 하죠. "납작 만두 한 접시 갖다 줘". 이 팁을 알려준 사람은 대구가고향인 가수 이찬원이었습니다. 미식가로도 유명하죠. "허영만 선생님 무침회는 납작 만두에 싸 먹어야 제대로 대구식으로 먹는 겁니다. 꼭 드셔봐야 해요".

KakaoTalk_20250313_095811032_01.jpg 납작만두

납작 만두를 난생처음 본 허영만 선생의 표정은 콜라병을 처음 본 부시맨의 표정이랄까요. "이게 만두 맞아?"

능숙한 젓가락질로 납작 만두를 개봉하더니만 "푸하, 파 세 쪽 하고 당면 네 쪼가리가 전부구만. 이게 밀전병이여 만두여?". "선생님. 그게 납작 만두의 매력입니다. 무침회를 싸서 드셔보세요". 대구 토박이가 추천하니 허영만 선생도 안 먹을 수가 없지요. 기름지고 얄팍하기 이를 데 없는 납작 만두에 매콤한 무침회를 듬뿍 싸서 먹어봅니다. "허허. 그놈 참 요물일세". 요물 맞습니다. 매콤한 무침회에 고소함과 밀의 단맛을 더해버리는 요물. 막걸리를 부르는 요물이지요. 막걸리 한 사발 따라 봅니다. 쌀막걸리 대신 밀막걸리로요. 대전 못지않게 대구도 밀가루 음식이 유명한 고장입니다. 서문시장의 칼국수 거리도 대구의 명물이죠. 그래서 막걸리도 밀막걸리로 골라 봤습니다. 경북 봉화의 봉화 생막걸리입니다.


"봉화탁주는 봉화에서 밀가루로 술을 빚는 유일한 양조장이다. 봉화탁주는 1939년에 설립된 봉화주조를 1971년에 인수해 봉화탁주를 설립하고 옛 방식대로 밀가루를 원료로 막걸리를 빚어 왔다. 1980년대 쌀 소비 촉진을 위해 그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보조금을 제시했지만 진정한 막걸리 맛이 아니라며 거절하고 오로지 밀가루를 사용해 막걸리를 제조해 왔다고 한다." (출처 : 대경일보)


옛 방식대로?. 막걸리를 빚는 옛 방식은 쌀이죠. 한반도는 밀이 쌀보다 귀했으니까요. 밀이 흔해진 건 미국 원조가 들어온 1950년대 이후입니다. 그렇다고 위의 기사가 아예 틀린 말도 아닙니다. 1966년 박정희 정권이 쌀 막걸리를 전면 금지합니다. 오로지 밀 막걸리만 허용되죠. 이 즈음에 태어나, 밀 막걸리만 마시며 성장해, 밀 막걸리 주조법을 전수받은 분들에게는 밀 막걸리가 전통일 수 있습니다. 어느덧 60년의 역사니까요. 현재는 오히려 밀 막걸리를 찾기가 더 힘들죠. 모두가 쌀을 외칠 때 밀 막걸리만 만들고 있는 봉화탁주는 나름의 전통을 지키고 있는 셈입니다. 밀이냐 쌀이냐를 떠나 90년 가까이 한 자리에서 막걸리를 빚는 것만으로도 존중받을 자격이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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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작 만두로 쌈을 싼 무침회에 밀로 담근 봉화 생막걸리 한 잔을 걸친 맛은 뭐 설명이 필요할까요. 아주 그냥 맛의 진또배기죠. 맛도 맛이지만 이 조합은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비싸지도 않고, 넉넉한 양에, 매콤하니 질리지도 않고 달달하고 탄산감 좋은 밀 막걸리까지 곁들여집니다. 왁자지껄 흥겨운 판이 깔리는 거죠. 누구와 함께 해도요. 막걸리를 흔들지 않고 맑게 뜬 술만 먹는 사람들이 있죠.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봉화 생막걸리를 마실 때는 위에 뜬 술만 먹기도 합니다. 독특하거든요. 순한 밀맥주의 맛이 날 때도 있고, 찝찔한 이온 음료 맛이 나기도 한답니다. 밀로 담근 막걸리이니 밀맥주의 풍미는 이해가 가지만 이온음료의 맛은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습니다. 발효의 세계는 오묘하니까요. 시중에 유통되는 밀막걸리 중에는 단맛이 지나치게 강한 제품들이 많습니다. 봉화 생막걸리는 단맛이 적당합니다. 순한 내륙의 맛이죠. 그래서 매운 무침회와도 어울림이 좋죠. 내륙 맛의 앙상블인 셈입니다.


세월을 넘어 사람들에게 선택받은 모든 음식에는 스토리가 있다고 하죠. 대구의 맛에는 한국의 근현대사가 녹아 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대구의 맛은 맵고, 화끈하고, 고소하고, 감칠맛도 있네요. 잊지 않고 다시 찾게하는 힘이 있네요. 많은 사연이 맛에 담겨있기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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