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PD의 맛있는 이야기
당신에게 노포란 무엇입니까?
오래된 식당에 단출한 메뉴. 서사가 담긴 음식에 할머니의 손맛이 있는 곳. 나라가 달아준 ‘백 년 식당’ 간판이 붙은 곳일까요. 나에게 노포는 “추억이 현실이 되는 곳"입니다. 북촌의 [부영도가니탕]처럼요.
북촌의 [부영도가니탕]은 배우 신현준 형님의 단골집입니다. 북촌의 진짜 노포라며 찬양하듯 알려줬죠. 해장에도 좋고 보신에도 좋고 국밥으로도 좋고 하여간 다 좋은 집이라고요. 이 집의 메뉴는 소박합니다. 곰탕, 도가니탕, 도가니 수육. 인상 좋으신 할머님 홀로 주방을 지키니 많은 메뉴를 준비할 수도 없고 필요도 없습니다. 세 가지 메뉴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으니까요.
[부영도가니탕]은 자그마합니다. 다닥다닥 놓인 테이블 4개가 전부죠. 낯 모르는 사람과 등을 맞대고 국밥을 먹어도 괜찮습니다. 맛에 몰입되니까요. 비좁은 식당에서 불쾌감을 느끼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맛이 없고, 더러워서 그렇습니다. 솔직히 [부영도가니탕]의 인테리어는 어수선합니다. 우래옥이나 을지면옥, 양미옥처럼 기업화된 노포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이곳은 정갈합니다. 소금통을 보면 알 수 있죠. 음식 때 묻지 않은 하얀 소금이 하얗게 담겨있습니다. 내오는 반찬도 깔끔하죠. 마늘, 고추장, 깍두기가 전부입니다. 깍두기의 빛깔 한 번 보세요. 흐리멍덩한 색이 아닙니다. 강렬한 붉은색이죠. 떡볶이처럼 고춧가루를 곱게 빻아서 깍두기를 담그신다고 합니다. 깍두기 하나로 맛에 대한 신뢰가 불쑥 솟아오릅니다. 아작아작. 이야 깍두기 맛나네요.
"뜨거우니 조심혀요". 도가니탕이 나왔네요. 수북이 떠있는 파 때문에 국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슬쩍 파를 밀어내고 국물맛을 봅니다. 신현준 형님, 고맙습니다. 맛있네요. 깔끔하면서 구수합니다. 쉽게 만나기 어려운 맛이죠. 도가니 한 점 먹어봅니다. 잡내 없이 쫄깃합니다. 맑은 국물만 한 수저 떠봅니다. 감칠맛에 온기가 있네요. 흰쌀밥 한 공기를 국물에 맙니다. 고깃국물에 젖은 흰쌀밥을 입안 가득 우물거립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맛의 핵심에 다가섭니다. 이밥(쌀밥)에 고깃국이 주는 평온함이 온몸에 퍼집니다. 부드럽게 씹히는 쌀알의 단맛이 고깃국물의 감칠맛과 어우러집니다. 부영도가니탕 한 뚝배기는 진짜입니다.
마포구 망원동은 식객들에겐 꽤나 흥미로운 곳입니다. 부산스럽지 않고 소박한 신흥 맛집들이 곳곳에 숨어있죠. 곰탕의 '온랭', 평양냉면의 '달고나', 태국백반 '코랏', 무국적 술집 '국빈관' 등은 나만 알고 싶은 젊고 아담한 강자들이죠. 하지만 아쉬움도 있습니다. 트렌디하고 감각적인 젊은 식당들이 가끔 놓치는 것이 있거든요. 바로 '밥맛'입니다.
망원동의 한 젊은 식당에서 부타동(돼지고기 덮밥)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 정성껏 조리한 돼지고기가 밥을 가득 덮고 있더군요. 돼지고기로 밥을 싸서 먹었습니다. "이런...". 망원동에서 애호박찌개도 먹었었죠. 광주의 명화식육식당처럼 애호박찌개에 밥이 말아져 나오더군요. 국물맛이 제법이었습니다. 말아져 있던 밥을 한 수저 크게 떴습니다. "아이고 이런..". 두 곳 모두 밥이 딱딱했습니다. 부타동이나 애호박찌개 모두 밥이 부드럽게 씹히지 않았습니다. 딱딱한 밥은 양념과도, 국물과도 따로 놀고 있었죠. 국물에 쌀알이 너무 불을까 의도적으로 고두밥을 지었을 텐데 결과는 안타까웠습니다. 혹시 밥에 대한 애정이 적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요리사들은 밤늦게 집에서 식사할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주발에 담겨 아랫목에서 따뜻하게 잠자던 아버지의 밥이 생각난다... 밥뚜껑을 열면 구수하고 푸근한 냄새가 온 집안에 퍼져서 자다가도 일어났다. 밥에도 향기가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박찬일 [미식가의 허기] 중에서)
아랫목 이불속에 있던 공깃밥을 재빠르게 열면 밥뚜껑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죠. 이 물방울을 뚜껑에 모아 홀짝 마십니다. 그 밥물이 어찌나 구수하던지요. 아랫목 공깃밥을 만나 본 지도 30년이 넘었지만 추억만큼은 생생합니다. 마르지 않고 따스하게 먹이려던 어머니의 정성. 아랫못 이불속에 놓여있던 밥 한 그릇의 사랑. 그 정성과 사랑의 추억이 부영도가니탕에서는 현실이 됩니다.
식당 마루 아랫목의 빨간 방석 밑에 공깃밥이 올망졸망 모여있습니다. 소담스러운 '복(福)'자가 정겹네요. 탕이 나올 때마다 빨간 방석 밑 깃밥을 같이 내옵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촉촉한 밥 한 공기에 주인 할머니의 따스함이 담겨있습니다. 진짜 밥입니다. "와~ 밥 이렇게 두는 거 정말 오랜만에 봐요. 너무 정겹다". "호호. 맞아요. 우리 어머니가 이렇게 밥을 뒀다가 주셨지. 온장고에 두면 밥이 말라서 싫더라고요". 그렇게 부영도가니탕에서 추억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아주 따스하고, 아주 맛나게요.
아랫목에 놓여있던 밥 한 그릇의 추억은 즉석밥에 익숙해진 세대에겐 공감하기 힘든 정서일 테죠. 옛 세대의 정서를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가끔은 밥을 천천히 음미해 보세요. 20번 정도 꼭꼭 씹으면서요. 즉석밥에선 단맛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겉만 화려하고 속은 비어있는 허상을 씹고 있는 것 같죠.
부영도가니탕은 작고 소박한 노포입니다. 빠르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술도 잘 팔지 않습니다. 맥주 한 병, 소주 한 병 마시려면 주인 할머니께 읍소를 해야 하죠. 그나마 점심시간에는 말도 꺼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가고 싶습니다. 국도 맛있고, 밥도 맛있는 이 곳. 추억의 맛이 현실이 되는 이곳으로요.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