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의 모기와 바람소리

시내와 도동을 연결하는 뒤벼리 건너 칠암동에서.

by 머피



오래전 길 위에 잘 정돈된 길이 포개져 났다.
어둠 속 손 흔들며 사라져 간 골목





유난히 대나무가 많은 곳.


칠암동 강변길이다. 반갑구나. 잘 지냈어? 얼마만이야? 생각해보니 생각보다 자주온다. 근데 웃긴건 올때마다 새롭다. 올때마다 이 곳이 내땅이 아니고 남의 땅인거 같은 느낌. 내가 머물렀는데 머무른거 같지 않은 허전함. 나는 기억하는데 당신은 기억하지 못할것만 같은 예감. 그런 것들이 불안하게 만든다. 나는 내것이 아닌 대나무와 남강을 둘러본다. 이 곳에 오면 맨 먼저 잔디가 눈에 띈다. 잘 깎인 잔디가 푸르게 펼쳐진다. 잔디 너머로 남강이 보인다. 이렇게나 넓었던가. 많은 것들이 보인다. 시퍼런 강물 너머로 멀찍이 선학산 절벽이 보인다. 절벽과 강 사이 뒤벼리길에 버스가 달린다. 멈추지 않고 달린다. 뒤벼리길에는 버스 정류장이 없다. 때문에 버스는 상평동 옛 법원 정류장에서 동방호텔까지 논스톱으로 달린다. 버스만 신나는 게 아니라 다른 차들도 신난다. 신호등도 없고 교차로도 없다. 긴 구간을 만나 모처럼 쭉쭉 속도를 낸다. 버스 안 승객들은 반짝이는 남강과 우람한 예술회관 건물을 보며 위안받는다. 승객들은 칠암동 강변에 서서 저를 보는 나를 보지 않는다.


뒤벼리는 진주의 도동과 시내를 가로지르는 중간 지점이다. 시내는 시외버스터미널부터 시작하여 중앙시장이 자리한 말 그대로 오래된 진주 한가운데다. 시내를 중심으로 서쪽에 진주성이 있고 동쪽으로는 도동이 있다. 옛사람들의 설명에 의하면, 대체로 시내에서 치고받고 싸우다 밀려난 이들이 눈물 찍고 쫓겨나가 새로이 터전 이루고 사는 동네가 이른바 도동이라는 것이다. 도동은 뒤벼리부터 시작된다. 도동이라는 이름하에 상평동 상대동 하대동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너 어디 살아? 나 상평동에 산다고 대답하면 아하 도동에 사는구나가 되고 나 상대동에 산다고 말해도 도동에 사는 사람이구나가 되고 하대동에 사는데, 라고 말해도 도동에, 저 멀리 떨어져서 사는구나, 가 된다. 어쩌면 진주 사람이 문산에 사는 이를 보고 같은 진주 시내에 사는 이가 아니라 너는 문산에 사는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과도 같다. 아무튼 그 경계는 애당초 시내에서 도동을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 도동으로 가는 길이 바로 뒤벼리이고 뒤벼리는 선학산 절벽 아래에 있다. 선학산 절벽 아래 앞에는 남강이 유유히 흐르고 강 건너 이쪽에 칠암동 둔치가 있다. 둔치에는 대나무가 많고 모기도 많다. 도동과 시내를 연결하는 길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진양교다. 구 법원에서 칠암동으로 연결되는 다리다. 칠암동은 시내 진주교의 남쪽인데 어쨌거나 진주교를 사이에 두고 진주라는 도시가 팽창했으니 제2의 시내 이를테면 강남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내라고 통칭할 때 칠암동은 시내에 속하고 결국 도동이 아니니 20세기까지 부자동네, 알짜배기 동네라 불리기도 했다. 그런 20세기 칠암동 강가에서 뒤벼리를 보며 나는 여기에 머문 옛 풍경을 바라본다.


뒤벼리 강가에 지금은 자전거길이 도로 밑으로 나 있지만 열일곱의 어느 날, 그때는 없었다. 강 건너 시내와 도동을 연결하는 길을 보며 나는 칠암동 강변길 대숲을 그녀와 거닐었다. 대나무 숲 속 사이의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걸으며 그녀와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았을까.

그녀는 하동에서 왔다. 하동에서 진주로 유학 온 셈인데 중학교 때 비교적 눈에 띄게 공부를 잘해 이대로 하동에서는 썩기 아까운 인재인 터라 당시 하동에 고등학교가 몇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 교육도시 진주의 여자 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이었다. 그녀는 칠암동의 좁은 골목길 사이 어느 주택 2층에서 자취를 했다. 자취방이 위치한 좁은 골목길이 시작될 즈음 그녀는 뒤돌아보며 내게 말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이제 돌아가. 언니에게 들킬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한 번도 그녀가 사는 집에 가보지 못했다. 정확한 위치도 몰랐다. 그 덕에 나는 이렇듯 골목의 여기저기, 실제 그녀가 머물렀던 자취방 언저리에서 맴돈다. 골목의 초입을 걷다가 나도 모르게 쑥 들어왔다. 저기 저쯤에서 살았을 테지. 짐작만 할 뿐이다. 자취방이 가까운 곳에서 그녀는 늘 “이제 돌아가. 어쩌면 언니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몰라” 말하고는 나를 돌려보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언니는 어느새 마중 나와 멀찍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저기 저쪽 어둠 속에서 지금 막 집으로 돌아오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언니의 애인은 왕왕 자취방으로 놀러 왔다. 애인은 되게 멋진 남자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그녀의 언니를 만나면 내가 무어라 소개될까 궁금했고 언니의 애인인 되게 멋진 남자와 비교될까 두려웠다. 대학생인 그와 고등학교 1학년인 나. 자취방에 들어갈 수 있는 것과 못 들어가는 것. 나는 왜 그런 차이를 염려했을까. 그리고 그들에게 무어라 소개되며 인사를 해야 하나, 고민에 빠지곤 했다. 그러나 그녀와 대략 일 년을 만나고 몇 해 뒤 여러 번 만나는 중에도 그녀의 언니를 만난 적은 없었다. 다행히 애인도 만나지 않았다.


그녀의 언니는 언제나 애인과 집으로 걸어오거나 집 근처에서 지켜볼지 모르는 두려운 존재였다. 그래서 우리는 주로 으슥한 칠암동 대나무 숲을 거닐었다. 이야기에 빠져 걷다 보면 어느새 강가에 이르렀다. 여름에는 덥고 모기가 많았다. 지금도 대숲을 걸을 때면 모기를 의식하는데, 모기에 어찌나 많이 물렸던지. 행여 대화가 끊길세라 내색도 못 하고 묵묵히 모기에 물린 팔등을 의식했다. 이따 집으로 갈 때 실컷 긁어야지, 하고 진득하니 참고 미루며 그녀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칠암동 강변을 걸으며 우리는 시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많은 시를 써서 내게 건넸다. 시는 주로 볼펜으로 써졌고 알록달록 형광펜과 색연필로 덧칠되었다. 그런 시가 백여 편. 그녀는 시를 책으로 엮어 내게 선물했다. 당시 나는 크게 놀랐는데, 어떻게 책을 만들었을까. 출판사 딸도 아닐진대, 책이란 게 이다지도 쉬운 건가 의아했다. 책은 가깝거나 때때로 멀다. 가만 생각하니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책에 책이랍시고 쓴 것일까, 그렇구나, 책처럼 생긴 빈 노트에 단순히 텍스트와 디자인을 입힌 거였다. 어쨌거나 아름다운 시집이었다. 일반적인 시집과 같은 형태였는데 물론 시는 그녀가 일일이 손으로 직접 쓴 것이다. 시의 내용은 대개 남자 친구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남자 친구를 대하는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준비를 했는지 적당히 은유되어 있었다. 남자 친구를 만난 이후 세상의 여러 만물을 보는 느낌이 어떻게 변하는지 그것을 노래하였다.


그 시집을 받고 며칠이 지나자 그녀는 대뜸 시집에 관해 질문하였다. 있잖아, 거기 몇 페이지에 이러저러한 제목의 시, 넌 어떻게 생각해?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이런 식이다. 나는 물론 그에 앞서 시집 전부를 읽어봤다고 진심으로 감동했노라 답한 상태다. 밤새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읽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질문에 금세 대답하지 못하고, 당황해서 막연하게 대나무가 떠오른다고 대답했던 것 같다. 그녀는 빤히 내 얼굴을 응시하고 중얼거렸다.

"시, 다 읽고 와."


모기에 뜯기면서도 그녀가 하동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언니를 따라 낯선 진주에 칠암동에서 사는 기분은 어떠했을까 어렴풋이 기억을 떠올려 본다. 기억을 스케치하며 스르르 대나무 이파리를 보고 그날의 이파리를 연상한다. 가느다란 잎. 이파리에 기댄 그녀의 등이 희뿌옇게 보인다. 등을 감싸 안은 내 손이 보이고 내가 밀자 대나무에 닿은 그녀의 머리칼이 보인다. 아주 가벼이 촉! 피부와 피부가 접촉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마른 입술. 입술에 연신 침을 바르던 우리. 떨리던 키스는 대나무와 대나무 잎이 바스락바스락 소리 내게 만들었다. 소리는 신비로웠다. 너와 내가 키스한 게 진짜야? 라는 걸 진짜라고 정말이라고 알려주었으니. 대나무는 촘촘히 공간을 만들어 감싸주며 전부 지켜보았다.


우리가 나눈 수많은 이야기가 모두 대나무 잎이 되어 강변을 따라 나고 지고 팔락인다. 대숲은 모기를 불러 우리를 괴롭히기도 했다. 어두컴컴한 대숲 속에서 나는 어느새 찰싹찰싹 모기를 잡으며 시에 관해 이야기했다. 대숲은 강변에 불어오는 찬 바람을 막아 자취방이 있던 칠암동 주택가를 아늑히 보호한다. 강변의 대숲은 데이트하던 연인들의 비밀을 마땅히 지켜주었고 간직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나는 대숲 속을 걷는다.

사진 찍는다. 사진을 보면서 하동을 생각하고 자취방을 생각한다. 강가를 보던 눈빛을 상기하고 이따금 그녀를 그려본다. 시집 몇 페이지 이러이러한 제목의 시 내용을, 한없이 순수했던 그 의미를 꾹꾹 짚어본다. 문득 대나무 이파리를 올려다본다. 여기 칠암동 자취방이 있던 골목길에 들어서서 가만히 저쪽을 지켜보는데, 이상하다. 마음이 바빠진다. 어서 서두르지 않으면 그녀의 언니에게 들킬 것만 같다. 어쩌면 그녀 언니의 멋진 애인과도 부닥칠지 모른다. 그러면 나는 나를 무어라 소개하나, 피식 웃음이 난다. 나는 가끔 그녀의 시를 읽으러 칠암동 강변길로 향한다.


내가 대숲을 바라보자 대숲에서 파라락, 바람 소리가 난다.





골목으로 들어가 올려다보면 손 흔들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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