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여관 욕조 안에서 본다

수증기가 덮어준다.

by 머피



늦은 시각.


새벽에 가까운 밤중. 고요한 정적. 정적 속 외로움. 외로움은 세상을 마치 정지화면처럼 보이게 한다. 주변을 형성하는 장면이 필름 사진처럼 잡티가 묻었다. 잡티 속 장면이 실시간으로 보인다. 공중에 부유하는 잡티. 지금껏 인지하지 못한 존재. 보이지 않아서 없다고 여겼던 먼지. 너와 나 사이에 수없이 분포한 잡티. 어디에서도 실물로 대우하지 않건만 오직 지금만큼은 덩그러니 내보이는 자태. 고스란히 얼굴을 드러내는 시간. 잡티 너머로 보이는 세상. 낡은 여관들이 촘촘히 몰려있는 골목. 들어가 볼까? 어디든 들어가야겠지? 예전 같으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텐데. 그냥 지금이니까. 고요하고 아늑하다면 어디라도 좋아. 다만 어딜 선택해야 할지 망설여진다. 망설이던 중 길가 가로등마저 불이 꺼졌다. 밤도 아침도 아닌 시각. 결정해야 한다. 다시금 고요하다. 이제 어디라도 들어가면 아늑하겠지. 그러면 눈만 감으면 된다.


그녀는 불쑥 잘 곳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더러 같이 들어가자고 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와 함께 여관으로 들어갔다. 낡고 오래된 여관. 들어가자마자 그녀는 코트를 벗었다. 나는 방 키를 텔레비전 위에 톡, 올려두고서 어찌할까 하다가 돌아섰다. 큰 제스처로 갈등을 내보였다. 당신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뜻. 그러나 그녀는 붙잡지 않는다. 붙잡지 않기에 나는 이대로 나갈 수밖에 없다. 돌아서고 멈칫 다시 돌아보고 주춤. 어디로 간단 말인가. 어쩌면 아침에 가까운 시각. 아침이면 늦다. 아침이 되기 전 숨을 곳에 숨어야 한다. 나는 무엇을 의식해서 숨는가? 어쩌면 햇볕을 피해서다. 움직이는 이들을 피해서다. 밝음 속에서 밝지 않은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고 움직이는 이들 속에서 움직이지 않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다. 나는 거꾸로 돌아가는 인간. 어둠이 시작되면 비로소 움직이고 편해져, 어디든 갈 수가 있다. 그러나 아침이면 갈 데가 없다. 생각해보니 그녀는 가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갈 데가 없는 나는 자리에 우뚝 서서 기다린다. 다시금 돌아서서 방안을 본다. 내 앞에 선 구슬님을 본다.

구슬님은 문득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그러자 손에는 찐득하니 화장품이 묻어났다. 씻은 지 오래됐다. 씻고 싶어. 씻어야겠다, 고 구슬님은 생각했다. 아니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구슬님의 생각을 모른다. 모르지만 그리 하리라 짐작만 한다. 짐작은 온통 내 생각이다. 내 생각 밖의 그녀는 내 생각 안에서 그리 행동한다. 그리 행동하는 그녀를 그리 행동하는 이유로 유추하여 나는 그리 보는 것이다. 내게 그리 보이는 당신. 나는 전지적 시점으로 당신을 본다.




구슬님의 닉네임은 구슬이다. 나는 어느 인터넷 카페 게시판을 통해 구슬님을 알았다. 그곳은 어두운 음악과 퇴폐적인 그림을 공유하는 카페다. 누가 더 음울한 음악을 알고 누가 더 우중충한 그림을 게시물로 띄우는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잡담하는 카페. 어둠을 좋아하는 인간들. 마약 같은 향기. 카페의 음악을 듣고 어두운 그림을 보노라면 슬그머니 담배냄새가 나는 것 같다. 잘 마른 담뱃잎이 마침내 첫 온기와 만나 오묘한 연기를 만들어낸다. 싱그러운 냄새. 눈앞에 하얀 연기가 피어난다. 연기는 춤을 춘다. 냄새를 맡고 보면서 어지러이 그림에 빠져든다. 그림은 담배와 함께 어우러진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연기. 어린 담뱃잎의 순결. 때문에 달콤한 내음. 내게 바치는 재물. 순백의 처녀는 더없이 순수하다. 흡입해보면 적당히 짙은 맛이 콧속을 자극한다. 구슬님이 그림을 올리고 나는 댓글을 썼다. 내가 그림을 올리면 구슬님이 댓글을 썼다. 우리는 올리고 쓰고 쓰고 올렸다. 이 그림 볼수록 빠져드네요. 저도 그래요. 우린 취향이 같은 거 같아요. 그러네요. 특이하신 거 같아요. 저도 특이한데 님도 특이하고 우리는 특이한 구석이 닮은 사람이네요. 그런데 사람? 그러고 보니 우린 사람이네요. 사람이니까 그림에 머물지 말고 한번 만나보는 게 어떨까요? 새벽 2시. 나는 차를 몰아 그녀가 산다는 동네에 찾아갔다. 어둠 속에서 그녀가 서 있었다. 나는 창을 내려 손짓했고 그녀는 차에 탔다. 차에서 함께 그림을 봤다. 그림 참 어두워요. 네, 어둡네요. 어두워서 참 좋아요. 저도 좋아요. 왜 이렇게 어두운 게 좋을까요?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좋아진 거 같아요. 참 특이하죠? 그래요, 특이해요.

몇 번 만나면서 한창 어둠에 대해 좋고 좋다는 대화를 나눌 즈음, 그때는 아직 구슬님의 이름을 몰랐다. 구슬님을 처음부터 구슬님이라 불렀으니 내게 그녀는 언제나 구슬님. 구슬님의 본래 이름은 묘진이다. 묘진은 북한에서 왔다고 했다. 북한에서 왔다고 한들 나는 북한을 말로만 들었지 실제 가보지 못했으니 실감하지 못했다. 가보지 못했으니 북한에 대해 세세한 것을 알리가 없었다. 알 수 없는 곳에서 온 그녀는 내게 온통 미스터리였다. 미스터리가 내 앞에 서서 자신이 미스터리하게 보이냐고 묻는데 실제 미스터리를 처음 보는 거라서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북한이라니. 북한에서 온 사람과 내가 닮았다니.


북한.


지금껏 책으로 읽기만 읽고 뉴스로 보기만 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듣기만 듣고 사진만 봤다. 그 안에 실제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는 모른다. 모르는 내 앞에 그녀가 나타났다. 본디 이름은 묘진이지만 내게는 계속 구슬님이다. 구슬님을 만난 어느 날 어느 순간.


내가 뒤에 서 있는데 그녀가 중얼거렸다. 씻은 지 오래됐구나. 벗어내고 싶다. 깨끗해지고 싶다. 씻고 싶다. 낯선 방에서 그녀는 옷을 하나씩 벗었다. 목욕을 하려는 듯 보였다. 바깥에서 묻은 온갖 더러운 피를 씻어내 본래의 나를 찾아야 해. 그녀는 속옷까지 모두 벗어 침대 머리맡에 올려두고 욕실로 들어갔다. 우선 욕조의 수도꼭지를 잡았다. 그녀는 수도꼭지와도 한참을 씨름했다. 샤워기로 물이 나올 것을 바랐다. 꼭지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당기고 밀어도 보았다. 어떤 원리로 트는 건가. 물어봐야 하나? 물어볼 수 없다는 결론. 내가 문 앞에서 지켜보는데도 그녀에게 지금, 나는 없는 존재. 그리 치부되었다. 나는 여전히 전지적으로 당신을 본다. 그녀는 한참 만지작거리다 겨우 꼭지를 돌리는 데 성공했다. 물이 쏟아졌다. 쏴아아 시원하게. 컴컴한 욕실의 조명. 샤워기에 물이 쏟아지는데 무엇을 해야 할까. 가만히 보니 욕조 면의 시커먼 때가 덕지덕지 묻은 게 보였다. 샤워기로 물을 뿌리고 손으로 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문질러 이물질을 닦고 검정을 제거했다. 하얀 김이 몽글몽글 솟아나 세면대 거울을 뿌옇게 뒤덮을 즈음 그녀는 맨다리를 찰랑 물에 담그고 욕조 턱에 걸터앉았다.


짜릿할 정도로 따뜻한 기운이 발끝으로 스며든다. 그리고 점점 종아리와 허벅지를 타고 올라오는데 동시에 내재된 한기가 피부 표면으로 쏙쏙 올라온다. 이어서 골반부터 가슴과 목, 팔까지 소름이 돋아 덜덜 떨린다. 지금껏 깨닫지 못한 몸속의 한기. 내 몸이 이렇게나 차가웠나? 발은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아무런 감각이 없다. 마치 몸에서 분리된 것처럼. 머릿속에서 보낸 감각의 뇌파는 맹렬히 목과 등허리를 통과하여 무릎까지 도달하였고 그 이동거리마저 점점 짧아진다. 작아진다. 사그라든다. 그녀로서는 그동안 자각하지 못했던 기운이다.


입술을 깨물고 욕조 안으로 들어가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자 하체에 있던 한기들이 벼랑에 몰려 일제히 상체로 기어올랐다. 그녀의 두 팔 피부에는 기를 쓰고 살려 달라 밖으로 밀려 나오는 냉기로 인해 선인장 표면처럼 뾰족뾰족하니 변했다. 수면이 배꼽을 지나 명치에 이를 때까지 그녀는 수도를 잠그지 않는다. 수증기는 하얗게 천장에 닿아 이슬처럼 거꾸로 맺혔고 이따금 수면 위로 뚝뚝 떨어져 퐁당거렸다. 하얀 김이 끝없이 생성되어 시야를 가렸다. 욕실 내의 녹슬었던 것들과 시커먼 때도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저 하얀빛만이 공간을 감싸는 풍경. 구슬님은 멍하니 눈 떴다. 얼굴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할 때 그녀는 비로소 느긋한 움직임으로 칫솔에 치약을 묻혀 양치질을 했다. 차츰 그녀의 동작은 여유를 찾아갔다.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진다. 머리 위에서 눈이 내린다. 눈이 어깨와 팔에 내려앉으니 섬찟하다. 눈이 피부에 닿아 녹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 눈은 차갑게 사라진다. 차가워도 안심이다. 허리 아래는 물속에 잠겨 따뜻하니까. 상반신은 차갑고 하반신은 뜨겁다. 차갑고 뜨겁고, 가 혼재하는 공간. 눈이 몸에 닿을 때마다 몸서리 처진다. 그때마다 나는 손 내려 물속에 온기를 느낀다. 춥지만 괜찮아. 괜찮다는 걸 자꾸만 확인한다. 구슬님과 나는 노천 온천에 들어왔다. 그녀가 저기에 앉았고 나는 여기에 앉았다. 우리는 함께 있지만 각기 다른 곳을 본다. 내가 보는 온천의 구석. 둘러싼 벽면 뒤로 나뭇가지가 보인다. 나뭇가지 뒤에는 지붕이 보이고 그 뒤로는 산속 수풀이 보인다. 수풀 뒤에는 언제라도 덤벼들 멧돼지가 보인다. 멧돼지는 구슬님에게도 보인다. 구슬님은 수풀 쪽을 봤다가 나를 보고 수풀 쪽을 의식했다가 내게 손 뻗어 온기를 확인한다. 무섭거나 괜찮거나. 두렵거나 아니거나.


자꾸만 확인한다.





머리 위에서 눈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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