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곤소곤 나눈 이야기
"구슬님?"
"구슬님? 혹시 구슬님이세요?"
나는 다가가 말을 걸었다. 서울시 구로구 아주 오래된 번화가. 낡은 골목길. 비 내리는 밤. 은은한 조명 아래서 혼자 비를 맞고 서 있던 그녀. 사람들은 제각기 우산 쓰고 가는데, 저 혼자만 멈춰 서서 비를 맞는다. 애처로운 얼굴. 가냘픈 몸매. 추워 보이는 옷차림. 다 젖은 운동화. 달라붙은 치마. 손 끝으로 빗물이 뚝뚝.
"맞잖아요? 저 모르시겠어요?"
묻는데 구슬님은 돌아보고도 한동안 어물쩍 아무 대답이 없다.
"우산 없어요? 왜 그렇게 섰어요? 이리 들어오세요."
돌아보는 표정. 어딘가 낯선 느낌. 마치 괴물이라도 본 듯 께름칙한 눈빛이다. 나는 당신에게 수상한 사람인가. 수상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우린 이미 여관에 같이 들어가기도 했죠. 당신이 먼저 씻고 침대에 누웠죠. 잠든 당신을 한참 내려다보다 저도 같이 잠들었어요. 눈 떠보니 옆에 당신은 없었죠. 언제 깨어나 나간 건지 몰랐어요. 그게 마지막. 카페 게시판에 글 남겨도 아무런 댓글이 없고. 연락처도 모르고. 밤이 좋다고 같이 끝없이 속삭여놓고.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멀게만 대하네요, 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를 봤다.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떨렸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비가 많이 내리니까."
나는 이러쿵저러쿵 혼자 묻고 대답했다. 구슬님은 여전히 낯선 타인을 낯설게 관찰하는 태도다. 그리고 가늠하는 중이다. 구슬님은 내가 들고 있는 우산을 본다. 우산을 보고 이어서 하늘을 본다. 우산과 하늘. 다른 개체. 다른 공간. 비가 내린다. 우산은 막아주고 하늘은 막아주지 않는다. 무엇으로부터? 비로부터. 그러면 비는 무엇? 비는 내 딸아이 얼굴에 떨어지던 눈물. 손 내밀어 가려주지도 못한 엄마. 손은 철사에 관통되어 묶여 있어서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없어서, 얼굴을 어루만져주지도 못하고, 잠든 건지 죽은 건지 알 수 없던 얼굴. 감은 눈 그대로 너무 예뻐서 내내 내려다보았던 기억. 그날 이후 다시 눈 뜬 얼굴을 보지 못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그 날이 떠오른다. 그 날이 떠올라 나는 우산을 쓸 수 없다. 빗물이 그대로 얼굴에 내려 꽂힌다. 아프지도 않니? 차갑지도 않니? 간지럽지도 않니? 어째서 눈을 뜨지 않는 거니? 엄마가 부르잖니? 얘야! 얘야! 얘야!
목이 쉬도록 불러보아도 대답이 없었다. 하늘과 우산, 무엇이 다른가. 이쪽과 저쪽 무엇이 다르나. 모르겠다. 도무지 모르겠구나. 모른다는 눈으로 구슬님은 양쪽을 번갈아 본다. 세상을 두리번거린다. 그러한 그녀를 보면서 나는 당신을 관찰한다. 관통하여 당신을 본다. 생각을 읽는다. 어쩌면 우산이 뭔지 모르는지도 모른다. 우산의 존재. 우산이 가려주는 안쪽과 바깥쪽을 살피는 사람. 왜 살펴? 왜 주저해? 한번 들어가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대체 뭐가 다른지, 여기저기 오가는 얼굴, 아이가 도리도리 하듯이, 갈등하고 갈등하고 갈등하는 시간. 나는 그렇게 그녀의 모습을 그리하리라 투영해본다.
"추워요, 들어오세요."
내가 소리치자 구슬님은 움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나는 성큼 한 발짝 다가섰다. 다시 그녀가 뒷걸음질을 쳤다. 나도 다시 앞걸음질을 했다. 물러서고 다가가고 물러서고 다가갔다.
"미안해요. 저예요. 제 얼굴 아시죠? 맞아요. 그날 그때 거기 함께 새벽에. 그냥 제가 맞다고 얼굴을 확인시켜 드리려고 그런 거예요."
내가 몇 발짝 더 다가가니 구슬님의 등 뒤 골목 벽이 가로막았다. 이제 더 물러설 데가 없다. 그녀는 더 망설이지 못했다. 마침내 그녀가 내 우산 속으로 들어왔다. 들어옴으로써 자신이 구슬님이라고 수긍하는 것. 당신을 알아보는 사람. 나는 그리 느꼈다. 우리는 한동안 조용히 걸었다. 비가 오는 와중, 걷는 소리는 차박 차박! 인도에 얕게 베인 빗물을 밟는 소리다. 빗물 속에 운동화가 들어갈 때 차~하다가 그대로 수면을 뚫고 바닥을 밟을 때 박~하고 확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차박 차박 나는데 그것은 점점 빗물에 젖어가는 소리이기도 하다. 운동화가 젖고 양말이 젖는다. 양말이 젖고 발이 젖는다. 발이 젖어서 차가움에 젖는다. 차가움에 젖어서 가슴이 시리다. 가슴이 시려서 두리번거린다. 그리고 동시에 우산 위로 빗소리가 타닥 타닥. 빗물이 인사한다. 하늘 저 높은 데 미지의 높이에서 잘도 찾아왔다. 우산 위로 떨어져서 옆으로 미끄러져 떨어진다.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워요. 얼마나 먼 데서 왔는데. 당신을 만나기 위해. 차가운 빗방울이 구슬님의 어깨에 수없이 떨어졌다. 비가 얇은 남방을 통과해 살결에 스미자 그녀는 화들짝 내 팔을 붙잡았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아 입을 달싹거렸다. 두려움에 떠는구나. 문득 빗물이 운동화에 들어온 것을 알았다. 이미 늦었다. 발가락을 꼼지락 움직여보니 양말이 젖어 꿉꿉하다. 곁눈으로 보니 구슬님은 눈꺼풀을 오므려 짙게 떠서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다. 여전히 우리는 말을 하지 못한다. 헤어질 무렵. 어디까지 가는가. 버스 정류장인지 택시 정류장인지 모르겠다. 양 정류장 사이에 도달했을 때 그녀가 어떤 결심을 한 듯 한마디 입을 열었다.
"술 한 잔 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