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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Apr 15. 2021

치과에 다녀오는 길

힘 빼세요



미루고 싶어. 


안 그래도 미루고 미뤘지만, 끝없이 미루고 싶은 마음. 한없이 미루어보고픈 바람.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오늘 아침, 잠에서 깨 일어나는데 두통과 몸살기가 함께 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거울을 보며 양치하는데 잇몸에서 피가 났다. 출근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이럴 때 하는 게 조퇴다 싶어, 냉큼 조퇴를 해버렸다. 


시내 치과로 가는 길. 중앙 시장 입구, 사거리 주차장까지 가는 내내 침울하다. 마음이 무거워서 아무 생각도 없다. 라디오든 노래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어랍쇼? 주차 자리가 없나? 2층에도 없고 3층에도 없고 4층에 올라가니 얼씨구 저쪽 끄트머리에 딱 한 자리가 보인다. 에휴, 자리가 있네? 이 와중에도 어쩌면 시내까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자리가 없으면 자리가 없어서 마땅히 돌아가려는 구실을 찾는 건지도 모른다. 빈자리를 보고 절로 한숨이 나온 거로 봐서 그냥 뭐 그렇다는 거다. 주차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중앙 시장 한쪽을 걷는다. 시내 큰길로 나가는 골목 어귀에 2층 단골 치과가 나타난다. 나는 미적미적 하염없이 미적거리며 계단 앞에 멈춰 선다. 또 한숨을 쉰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저놈의 계단을 올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섣불리 판단하지 못한다. 이미 이놈의 발이 멈추어 설 것을 알기에 부단히 물러서지 못할 이유를 하나하나 만들며 여기까지 왔건만. 나는 셀프 설득을 한다. 차근차근 비용 지급을 돌이켜본다. 일단 조퇴를 했다. 조퇴는 연차를 까먹는다. 귀중한 연차를 써가면서까지 왔는데 쉬 물러설 수 있는가. 그리고 이미 주차장에 주차했다. 지금도 시간이 흘러 주차비가 적립된다. 그뿐인가? 기름값도 있다. 정신적 소모도 있고 시간도 아깝다. 평일 낮 모처럼의 여유. 평소 누리지 못하는 틈새의 자유. 유유자적 영화를 보거나 한가로이 산책하거나 친구 일터에 놀러 가거나 아니면 만화방에 가거나 얼마든지 보람되게 재미있는 한낮을 즐길 수가 있는데 그 많은 기회비용을 지출하면서까지 여기 이 자리에 섰다. 내일 직장에서는 왜 조퇴를 했냐고 어젠 어디 좋은데 다녀왔냐며 따져 물을 지도 모른다. 정녕 무를 수 있는가! 있는가? 없다.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이 친구야, 그럼 치과에 가야지 않겠나. 한참이나 우뚝 서 있던 몸뚱이가 비로소 한 발 내디뎌 계단을 오른다. 

  



막상 치과에 들어서니 대기하는 사람이 많다. 


그럼에도 웬걸 즐거운 한숨이 나오는 건 뭐람. 접수대에서 익숙한 간호사가 내게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나는 물끄러미 주위를 살피다가 “얼마나 기다려야 해요?”라고 물었다. 발음은 우물쭈물 단순 명료하지만, 물어보지 않은 것까지 덧붙여 속으로 물어봤다. 마치


'치과가 한창 바쁜 시간에 괜히 왔네? 나보다 급한 이들도 많은데 나 따위가 이 정도 가벼운 치료를 받으러 와서 그들의 시급한 치료를 늦추면 안 되지. 그러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고 다음에 중한 상태가 되면 다시 와야지' 


하고 합리화를 시도하는 것처럼. 간호사는 으레 귀찮다는 표정으로 당신처럼 망설이고 도피를 갈망하는 표정은 이미 너무나 익숙하다는 듯 눈동자를 위에서 아래로 쭉 내리깔며 딱 거기 앉아서 어디 가지 말아라를 


"기다리세요!" 


한마디로 압축하여 말했다. 뭐라고? 망설여진다. 나는 착한 학생이 아니다. 반항기 가득한 아저씨란 말이다. 확 가버릴까? 단순히 잇몸에 피만 나는 건데, 아무렴 몸살 때문에 그렇겠지? 괜스레 모처럼 만의 휴식인데 이대로 치과에서 시간을 다 보낼 거야? 끊임없이 갈등에 고민을 거듭하는데 어느새 내 차례가 왔다. 아뿔싸, 이미 돌아갈 타이밍은 지났다. 어기적 치료석으로 끌려갔다. 나는 누워있다가 기어코 고개를 들어 꾸벅 인사했다. 인사하면서 공손히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텔레파시를 보냈다. 의사가 보더니 


“염증이 있네요? 따끔할 겁니다” 


하고 마취 주사를 놓았다. 아니 잠깐만요? 애당초 나는 의사가 아무런 치료도 하지 않고, 단순히 피로해서 그런 거네요, 겨우 이런 증상 가지고 왜 왔어요? 라며 그냥 돌려보내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준비되지 않은 마음에, 갑자기 주사라니, 누워 입 벌린 상태로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주사를 맞았다. 치료가 시작되고, 신경은 온통 예민해져서 갖은 폭풍우를 견디느라 치료 내내 특유의 통증에 깜짝깜짝 놀라기를 반복했다. 치료석에서 다리가 내려가면, "발 올리세요"라고 간호사가 지적했다. 나는 발을 내렸다 올리고 오므리고 꼬면서 근근이 버텼다. 




마침내 치료가 끝나고 계산을 하려는데 간호사가 


“이왕 오신 김에 스케일링도 하고 가세요”


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이것은 마녀의 유혹인가. 나는 퍼뜩 


“다음에 할게요”


라고 대답했지만, 생각해보니 다음에 또 언제 와서 치료를 받겠는가, 또다시 이만큼 각오와 준비가 필요하다 싶어 


“네, 해주세요” 


하고 얌전히 치료석에 올랐다. 이 결정은 아무래도 실수라고 스케일링이 시작된 직후부터 자책과 후회가 쭉 이어졌다. 내가 왜 스케일링을 한다고 했을까? 어쩌면 치료 중 아드레날린의 과도한 분비 때문이리라. 간호사는


“양쪽 구석에는 그냥 마취 안 하고 바로 할게요”


라며 윙~ 이를 갈아대기 시작했다. 아니 왜 마취를 안 하고? 필요하면 해야지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벌린 상태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간호사는 쉴 새 없이 


“힘 빼세요”


라고 말하며, 드문드문 나의 용쓰는 얼굴을 지켜보다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때마다 힘을 빼려고 노력했지만, 본능처럼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 걸 어쩌겠는가. 다리도 쉴 새 없이 내렸다가 올리면서 지금 아프다는 걸 에둘러 표현했다. 결국 


"양치질 좀 똑바로 하세요"


라는 덕담도 


"알~게~씀~니~당~" 


하고 귀담아들었다. 무슨 말이라도 묵묵히 수긍해야 했다. 나는 죄지은 입장. 벌 받는 과정에서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반성과 깨달음을 아로새겼다. 계산하면서 '분명 또 오라는 말 없었지?' 하며 안심했다.


그렇게 진땀 흘린 채 치과를 나서는 길. 아직 등 언저리가 축축하다. 치과를 들어갈 때와 나설 때는 이렇듯 다르다. 여전히 잇몸이 퉁퉁 부은 느낌이 남아있지만, 미룰 때까지 미룬 숙제를 끝낸 느낌이 이러할까.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더없이 시원하고 후련하고 개운했다. 나는 붕 날아올라 사뿐히 따닥 두 발을 공중에서 부닥치고 으랏차 오른손을 한껏 들어 올렸다. 살아났다. 아싸라비요. 평화가 시작된다. 살았으니 먹어야지. 시장에 뭐 맛난 게 없을까? 오래간만에 중앙 시장에 왔으니 통영꿀빵이랑 도넛을 사러 가야겠다,며 타닥타닥 경쾌한 발걸음으로 갔다.


이때만큼은 무서운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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