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머피 May 13. 2021

비 내리는 밤 도서관에서

집에 가야 하는데 우산이 없다.



아직 불 켜져 있네.


늦은 밤 자전거를 타고 무작정 가다가 그만 도서관 앞까지 와버렸다. 십수 년 전 살다시피 드나든 도서관. 산자락에 위치한 열람실. 지금 내가 사는 동네랑은 끝에서 끝이다. 어휴 멀기도 하지. 오려고 온 게 아닌데 고개 들어보니 여기다. 나는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 앞에서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그때 함께했던 사람들이 잘 지낼까 어렴풋 떠올리는데 툭 툭 빗방울이 떨어졌다. 아까부터 구름이 바삐 움직이더라니 비가 내릴 건가 보다. 집에 갈까? 늦었겠지? 아마 길이 멀어서 가다가 비를 쫄딱 맞을 게 뻔하다. 그리 생각하니 외려 맘이 편하다. 밤인데도 하늘이 다 보인다. 구름은 뭔가에 쫓기듯 멀어진다. 뒤이어 다른 구름이 와서 새로운 구름에 자리를 내어준다. 바람이 분다. 우산도 없는데. 비바람에 딱 걸렸구나. 맞을 수밖에. 왠지 으스스하다. 아직 밤이면 춥다. 집에 어떻게 돌아가지. 걱정이 되는데 하염없이 본다. 비가 본격적으로 내린다. 나는 도서관 건물 앞에서 열람실 쪽을 바라본다. 창가에 앉은 사람들. 쳐다보니 보인다. 그 시절 도서관에서 공부했던 풍경. 함께했던 친구들. 앞자리에 동철. 옆자리에는 은정. 니들 비 오는 건 알고 있니? 근데 얘들 우산은 가지고 왔을까.




쏴아아. 봄비 내리는 밤이다.      

나는 집에 가려고 도서관을 나선다. 저 앞 출구에 사람들은 저마다 우산을 펴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져 간다. 뒤돌아보니 2층 열람실의 불이 꺼졌다. 이제 집에 가도 되겠지. 어쨌든 오늘도 열심히 했다. 마치는 시간까지 잘 버텼다. 이제 불 꺼진 곳을 뒤로하고 불 켜진 다른 데로 떠나야 할 때. 밤늦은 시각. 하루를 마감하고 내일을 대비해야 하기에 어쩌면 아침보다 밤이 더 바쁜지도 모른다. 밤은 내일과 맞닿아 있고 내일은 모레와 연결된다. 모레는 글피로 이어지고 글피는 그글피로 확장된다. 글피 그글피 그그글피가 되면 바로 그날, 내일의 내일은 결국 시험일로 귀결된다. 따라서 도서관의 하루는 하루살이로 끝나지 않는다. 오늘만 타고 꺼지는 게 아니다. 시험이 끝나야 비로소 꺼진다. 꿈을 바라는 소망. 소망을 바라는 마음. 타닥타닥 타오른다. 불꽃이 커지거나 작아지거나 각기 달라도 뜨거운 건 매한가지다. 나는 가방에서 접이식 우산을 꺼내다가 무리 속 한 사람을 보았다. 은정이다. 옛 연인에게서 가슴속 불꽃이 꺼지고 또 다른 무언가가 타는 걸 본 여자. 어쩐지 외로워 보이는 뒷모습. 사람들은 우산을 들고 출구에서 우산을 펴 차례대로 사라지는데 그녀만은 우두커니 나가지 못하고 그저 앞만 보고 섰다. 왜 안 가니? 멍하니 출구를 응시한다. 안 그래도 가냘파 보이는 어깨. 밤하늘에 내리는 비 때문일까? 떠나간 동철이 떠올랐을까? 그래도 이렇게 티 내며 훌쩍일 리가 없는데. 설마 우산이 없나?


나는 은정 동철과 친구다. 도서관의 함께족은 최근 은정을 볼 때마다 수군거렸다.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함께하는 사람들. 그들은 늘 함께해서 함께족이다. 혼자 시험에 합격해서도 아니 되고 혼자 도서관을 떠나서도 아니 된다. 함께 공부하고 함께 지내야 안심이 되는 특성. 네가 옆에 앉아서 공부하는 만큼 나도 앉아 있으니 다행이다. 함께족은 함께 은정을 염려했다. 너무 열심히 하네. 저토록 열심히 하니 이번에는 꼭 합격할 거다. 합격하면 보란 듯이 잘 살 것만 같다. 그녀의 캐릭터는 그렇게 완성된 터. 수수한 외모에 공부를 참 열심히 하는 사람. 점심 저녁 끼니때마다 도서관 앞 팔각정에서 커피 한 잔을 즐기던 그녀. 그게 그녀에게는 휴식의 전부다. 도서관 한쪽 산비탈 경사면에서 저 멀리 풍경을 바라보며 커피 맛을 음미했다. 조그만 컵에 커피는 얼마나 담겼나. 커피를 다 마시면 휴식시간도 끝났다. 팔각정 사람들을 잠깐 동안 지켜보는 시선. 어쩌면 그녀는 주변 함께족들의 시선을 즐기는 것인지도 몰랐다.

 

은정은 참 예뻤다. 커피를 마시는 그녀의 입술은 복숭앗빛이었다. 입술을 보노라면 6월의 이른 복숭아 향이 나는 것만 같았다. 이제 막 영근 복숭아. 껍질에서 나는 달콤한 내음. 은은한 빛깔. 눈빛은 새벽녘 동트는 남색을 뗬다. 누구도 보지 못하는 세상. 다들 잘 때 혼자만 깨어 보는 하늘. 밤의 어둠을 너무 많이 담아서 되려 옅어진 색상. 뺨은 연한 상아색 같았다. 눈썹은 가늘고 짙었다. 그녀의 두 손은 컵을 감싸 커피 온기를 지켰다. 동시에 마치 기도하는 것처럼 다소곳한 내면을 표현했다. 하얀 머그컵. 그 속의 캐러멜 빛 커피. 한 모금 마시고 팔각정을 보고 한 모금 음미하고 팔각정의 함께족들을 보고 한 모금 마시고 함께족 친구들에게 인사하고 그러다 팔각정에서 내가 어이~ 하고 손들면 늘 까만색 뿔테를 올리며 살짝 웃던 그 미소. 배시시 흔들어주던 눈웃음. 늘 같은 청바지. 흰색 블라우스. 하늘색 팔토시. 공부에 최적화된 복장. 나는 함께족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녀의 진면목을 알기나 할까. 그녀가 대학 때 얼마나 빛났는지를. 같은 과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누구보다 활발하게 어울리고 마시고 소리쳤는지를. 첫인상을 보고 대뜸 꾀죄죄한 취업준비생이구나 단정 지으면 안 된다고. 취업이냐 결혼이냐 갈림길에 선 신분이라고 하기엔 너무 괜찮은 사람이라고. 현실은 이번 시험도 떨어지면 그땐 부모님이 소개하는 자리에 나가야 하는 처지. 커피를 마시는 안경 너머 반짝이는 눈빛을 나는 알고 있다. 그녀는 공부 중 기지개를 켜다 가끔 눈이 마주쳐도 금세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돌리기 전 0.5초간의 정적. 찰나의 순간 말할 수 없는 욕구를 감추고 있다고. 때가 되면 전부 알려줄게 보여줄게 터뜨려줄게 라고 말하는 입술 끝 꼬물거림을.     




동철은 대학교 3학년 즈음부터 시작했다. 무조건 공무원이 되고 싶었다. 학생일 때는 저녁마다 도서관에 가 공부했다. 졸업하고는 아침부터 온종일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점심은 매점에서 도시락을 먹었고 저녁은 집에 가 먹고 왔다. 해 뜨면 도서관에 왔다가 으슥해지면 돌아갔다. 도서관이 인생의 전부, 생활의 바탕이었다. 그렇게 서른을 앞두고 있었다.

동철에게는 학교 때부터 사귄 은정이 있었다. 은정은 공부만 하는 동철이 답답했다. 얼른 취업해서 돈을 벌고 싶었다. 돈을 벌어서 독립하고 싶었다. 결혼하고 싶었다. 빨리 가정을 이루고 싶었다. 그래서 마음이 급했다. 은정은 졸업 전부터 여러 회사에 이력서를 내고 면접 보러 다녔다. 서울이고 부산이고 닥치는 대로 갔다. 오직 하나. 취업이 먼저였다. 그러나 죄다 작은 회사에서만 연락이 왔다. 큰 회사에 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졸업식을 한 달여 남겨둔 날. 은정은 급한 김에 중소기업에 취업했다. 취업하고 일단은 축하도 받았다. 요즘 같은 시기에 취업에 성공하다니. 요새 같은 시국에 보란 듯이 취업하다니. 작은 회사지만 경력도 쌓고 여러모로 도움될 거야. 알고 보면 알짜 회사잖아. 퇴근이 늦지만 그만큼 수당이 많대. 은정은 힘들었다. 사회초년생. 신입사원. 열심히 해야 해. 어쨌거나 잘 보여야 한다. 오늘도 야근이야. 회식이야. 주말에는 별별 연수가 기다려. 또 출장이래. 집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 당장 방 얻을 돈이 없었다. 확신이 없는 회사였다. 급히 머무를 곳을 찾다가 대학 때 알던 언니의 집으로 갔다. 언니의 집은 언덕배기 낡은 주택 단칸방이었다. 좁은 방에 언니와 나란히 잠들었다. 미안했다. 월세라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언니 미안해 나 한 달만 살고 갈게. 1월의 겨울. 새벽에 일어나 가스레인지 위에 스텐 양동이를 올리고 물을 데웠다. 수면에서 지지지 소리가 나면 내려서 대야의 물과 1대 1로 섞었다. 그 물로 머리 감고 세수했다. 파랗게 동트는 아침. 대로를 건너 버스를 기다렸다. 이 생활 계속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집에서 해주는 밥만 먹고살았는데. 화장실에 들어가면 언제라도 온수가 나왔는데. 낯선 환경과 갈등. 처음 각오의 벽은 균열이 생겨 날마다 무너졌다. 주말이면 집으로 왔다. 집에서 도서관으로 갔다. 도서관에서 동철을 만났다. 은정이 보기에 동철은 너무나 부러운 처지. 집에서 편히 지내며 도서관에서 평화로이 공부만 하는 신분. 나도 저러고 싶다. 팔각정의 함께족들이 부러웠다. 나는 왜 여기에 있을 수 없지? 회사에서는 쉴 새 없이 압박하고 값어치를 하라고 닦달했다. 고뇌에 빠졌다. 이러려고 취업한 게 아닌데. 내 목표는 뭘까? 계속 다닐 수 있을까?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도 함께할 수 있을까. 사십이고 오십이고 회사에 남을 수 있을까.  지치지는 않을까. 미래를 생각하면 온통 두려운 것 투성이. 암담했다. 보이지 않았다. 머나먼 날들의 내 얼굴이, 표정이, 괜찮을까? 라는 질문에서 답은 언제나 하나. 괜찮지 않겠지.



하루는 동철이 말했다. 그런 작은 회사에 다니는 사람하고는 불안하다고. 미래를 약속할 수 없다고. 미안해. 현실을 직시해. 지금 당장 힘들다고 여기저기 아무 데나 취업부터 하고 보는 친구들. 당장 수중에 월급이 들어오니까 나름 달콤하겠지만 그뿐이라고. 사라지는 시간. 나이는 들어가는데 기계처럼 언제나 열심히 할 수 있을까. 아니 난 그런 자신 없어. 회사가 인생의 전부일 수는 없어. 저녁도 있어야 하고 가정도 돌봐야 해. 잘 나가던 내 친구들 누구누구 알지? 대학 때 공부 좀 하던 애들. 회사 관뒀다고 하더라. 아니 왜? 그 좋은 곳을 왜 그만둬? 걔뿐만이 아냐. 하나둘 공무원 공부 시작했다고. 대기업에 다니던 친구는 야근과 업무량에 지쳐 도서관에 왔고 중소기업에 다니던 애는 비전을 찾아왔어. 요새는 시립 도서관이 어쩐지 제2의 대학 같아. 고등학교 다음 대학교가 있잖아. 대학교 다음 도서관이 있어. 그러니까 여태 학생인 거지. 학생 시절이 그리워서 정녕 학생일 때는 공부도 열심히 안 하다가 이제는 학생이 아니라서 공부를 찾는 거 같아. 집에다 얘기해. 조금만 지원해 달라고. 기다려 달라고.

 

어? 너도 왔어? 어쩐 일? 시립 도서관에서 동철은 날마다 새로운 친구를 만났다. 초등학교 중학교 친구.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 동네 친구. 친구에 친구, 선배에 선배, 이제 후배에 후배까지. 더러 먼저 합격한 이는 도서관 사람들의 설움과 환호를 받으며 떠나갔다. 그리고 몇 달 뒤 도서관에 와 청첩장을 주었다. 결혼은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니? 동철은 은정에게 말했다. 부부 공무원이 꿈이라고. 은정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사표를 제출했다. 그만두겠습니다. 아니 왜? 이제 막 앞가림을 하게끔 가르쳐놓았는데 무슨 말이야? 은정은 어물쩍 대답을 못하고 회사를 나왔다. 같이 지내던 언니에게 고마웠다고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막연히 꿈에 그리던 생활. 편히 집에서 자고 도서관에 가서 책만 보는 평화. 다시 학생이 된 것만 같은 향수. 합격만 하면 꿈이 이루어진다는 기대. 왜 진작에 오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 그리고 시험.




도서관에서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 공무원, 공사, 자격증, 진급 등등. 그중에 공무원을 준비하는 이들. 나이 제한이 사라지고 이십 대에서 사십 대까지. 평균 연령은 서른. 으레 1월이면 국자직 시험에 접수하고 2월이면 지방직에 접수한다. 4월에 국가직 시험을 친다. 국가직 시험은 경쟁률이 엄청나 합격할 가능성이 없다. 그래서 모의고사 개념이다. 시험을 통해 자신감을 얻거나 불안감이 한층 깊어지거나. 역시 실전은 지방직 시험이다. 대부분 6월이다. 오직 6월을 위해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기다려 왔다. 6월이면 행정직, 기술직, 교육청 등등으로 세분된다. 모두 같은 날에 치른다. 딱 하나만 골라야 한다. 운 좋으면 한 자릿수 경쟁률이고 운 없으면 두 자릿수 경쟁률이다. 비교적 가능성이 높다. 국가직에서는 목검을 가지고 승부했다면 지방직에서는 진검을 꺼내 휘두른다. 휘둘러서 죽느냐 죽이느냐의 문제. 틀리면 죽고 정답이면 산다. 객관식 4지 선다. 보기 중 두 개는 쉽게 걸러낸다. 1번 2번은 확실히 아니야. 그러나 나머지 두 개의 보기가 아리송하다. 3번 4번 중 뭐가 답일까. 두 개 모두 답인 것만 같다. 체크해두고 그 문제에 다시 돌아왔다. 이제는 선택해야만 한다. 두 개중 뭐가 답일까. 분명 공부한 내용인데. 살짝 말을 비틀어 놓았네. 시간이 없다. 방광을 조여 온다. 다리가 덜덜 떨린다. 결정해야 한다. 이것은 도박. 로또 번호를 수동으로 찍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동철은 3번을 찍었고 은정은 4번을 찍었다. 3번을 찍은 이는 합격했고 4번을 찍은 이는 떨어졌다.     


"난 꿈이 이뤄졌으니 도서관에 갈 필요 없어."

 

동철은 합격하고 은정을 외면했다. 은정은 동철에게 전화했다. 도서관에 왜 안 오냐고 커피라도 마시러 오라고 했다. 그러나 동철은 내가 왜 도서관에 가느냐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한 말. 꿈이 이루어졌다는 한마디. 이미 꿈이 이루어졌는데 무엇을 위해 가느냐는 말이었다. 은정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꿈이 이루어진 이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이. 은정은 꿈이 이루어진 느낌을 몰랐다. 모르는 입장이라 막막했다. 난 아직 꿈이 어떤 건지도 모르는데 벌써 꿈을 잡았다니.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연락할 수 없었다. 은정은 합격자 발표 후 두문불출했다. 도서관에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집에서 부모님은 어이구 이것아 선 좀 봐라, 더 나이 들면 선도 못 봐 이것아! 했다. 은정은 부모님에게 딱 한 번만 더요, 제발 한 번만요, 라고 담보 걸린 약속을 했다. 은정은 약속을 등에이고 힘겹게 도서관에 복귀했다.

도서관 함께족들의 일정도 비슷했다. 지방직 시험이 끝나고 합격자 발표가 나기까지는 한 달. 발표가 끝나고 충격을 다스릴 때까지 다시 한 달. 그렇게 두 달의 방학이 지나면 하나둘 복귀했다. 보통 가을이었다.

시린 여름을 보낸 이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늘 함께하는 함께족이 되어 서로를 지켜본다. 그리고 친구의 친구를 통해 그들의 정보를 듣게 된다. 정보는 사람과 사람을 통해 바이러스처럼 전파되고 도서관 열람실의 일원들은 같은 병에 감염되어 같은 병실에 감금되어 공부한다. 개별행동은 금지된다. 있잖아, 누가 공부 안 하고 일찍 갔대. 아니 왜? 집에 무슨 일이 있었나 봐. 에그 시험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큰일이네. 마음 여린 사람들. 아주 조그만 변수에도 흔들리는 갈대들. 저마다 홀로 버티며 도서관에 오는 사연. 가족마저 등 돌려도 도서관에서 같은 입장에 머물러 다행이다 하는 안심이 들어 함께족은 함께 열람실에서 살았다.      

              



아침 6시 반.


도서관 건물 중앙 현관 앞. 입구에 가방이 주르르 줄을 선다. 사람 대신 대략 스무 개의 가방이 일렬로 쭉 선다. 가방 주인이 갖다 둔 순서대로다. 주인은 주위에서 어정거리며 문이 열리길 기다린다. 이곳만의 암묵적인 질서. 주인들은 팔각정 벤치에 가 담배를 피우거나 스트레칭을 한다. 시간이 째깍째깍 흐른다. 발을 톡톡 구른다. 어느덧 7시 5분 전. 이윽고 경비 아저씨가 유리문 안쪽에서 나타난다. 그러면 가방 주인들은 각자 제 가방이 선 순서대로 가방을 메고 들어 준비한다. 드디어 딸깍! 잠금쇠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가방 주인들은 손에 힘을 준다. 마침내 문이 활짝 열리자마자 탕! 소리와 함께 일제히 달리기를 시작한다. 이렇게 빨리 달려도 되나 하는데 모두 정신이 없다. 우르르 현관을 지나 짧은 직선 코스를 통과하자마자 왼쪽 비스듬한 복도를 향해 뛴다. 왼쪽으로 두 번 돌고 오른쪽으로 한번 돈다. 학생 열람실, 여성 열람실, 자료실을 지나 우리의 관문 즉 일반열람실을 향해 돌진한다. 출입구를 벌컥 열어젖히고 미리 계산된 달리기를 한다. 그곳으로 곧장 달려야 한다. 망설이면 늦다. 내가 어디에 앉을지 찍은 자리로 최단거리 직진해야 한다. 인코스를 내주면 큰일 난다. 이것은 쇼트트랙 경기. 아웃코스는 그만의 능력이라 어쩔 수 없다 쳐도 인코스는 사즉생 생즉사로 지켜 먼저 가방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자리를 잡는다. 자칫 머뭇거리면 뒷사람이 냅다 가방을 던져 추월하여 자리를 뺏기 일쑤다. 주인들은 죄다 창가 구석부터 철퍼덕 털썩 차지한다.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바삐 가방을 열어 책을 꺼낸다. 옆자리 앞자리까지 고루고루 세팅한다. 마치 사람이 잡아 놓은 것처럼 그럴듯한 디테일이 필요하다. 적당히 계산된 흐트러짐. 볼펜과 휴지를 올려 둔다. 노란 종이 파일을 꺼내 집게로 책상 옆 모서리에 끼운다. 머리 위에는 책상 달력 두 개를 나란히 올려둔다. 그렇게 머리 들어 앞과 머리 돌려 옆을 가로막는다. 무사히 세팅이 끝났다. 비로소 안심이 된다.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보다 맑은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커피를 마시러 나간다. 상쾌한 하루가 시작될 것만 같다. 이처럼 하루의 성패는 자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간혹 공부가 잘 되지 않거나 슬럼프가 오면 다른 자리로 옮겨가고 하는데 그러면 기존의 주인과 부딪치는 경우가 있다. 아니 왜 평소 네가 앉던 그리로 안 가고 내 자리를 빼앗는 건데? 라고 말로 따질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돌발적 변덕에 의해 매일 앉던 자리를 뺏기면 온종일 공부도 되지 않는다. 빼앗은 이는 빼앗긴 이에게 미안하여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 빼앗긴 이는 빼앗은 이를 노려본다. 친구에게 사정을 털어놓으면 친구는 함께 변덕쟁이를 욕한다. 친구의 친구를 통해 이 사정이 변덕쟁이에게 전달된다. 변덕쟁이는 음료수를 들고 찾아가 사과한다.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공부가 잘 안되어서요. 제 자리로 돌아갈게요. 내일부터 저 자리에 앉으세요. 그렇게 빼앗은 이와 빼앗긴 이는 친구가 된다. 함께족이 된다. 도서관에는 왕왕 새내기가 등장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비장한 각오로 나타난다. 새내기는 멋도 모르고 자리 잡으려 달려간다. 휙 가방을 던져 자리를 잡는다. 오래된 이가 툭툭 어깨를 두드리거나 포스트잇을 건넨다. 아직 잘 모르시나 본데요. 한 시간 이상 자리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책을 복도로 치워 버린답니다. 또 친구가 된다.

         

은정은 아침에 도서관 문이 열리면 제일 먼저 달려가 열람실 구석에 자리 잡았다. '도서관 마칩니다'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면 그제야 가방을 싸 일어났다. 그렇게 몇 년간 집과 도서관만 오갔다. 어느새 서른을 훌쩍 넘겼다. 그녀가 도서관에 머물던 마지막 해. 긴 머리를 사뿐히 묶어 팔각정에 앉은 나를 본다. 나도 그녀를 본다. 전혀 꾸미지 않은 얼굴. 하얀 카라티. 흰 운동화. 반짝이는 눈빛. 앙다문 입술. 나는 도서관을 떠났어도 이따금씩 도서관에 놀러 가 함께족들을 만났다. 도서관이라는 공간. 타인에게는 관심 없고 철저히 자신 내면에게만 집중하려는 공간. 그러나 타인에게만 관심 있고 자신에게는 소홀히 하는 면도 있다. 함께족들은 서로가 서로를 궁금해하며 자신의 기준선에 세워 그들과 경쟁한다.  


나는 뒤에서 빤히 그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왜 우산을 꺼내지 않지? 설마 우산이 없는 건가? 하루라는 주어진 품 안에서 공부에 몰두하는 것만큼 자신의 다른 안위는 챙기지 않는 거야? 하필이면 내 앞에서 왜 그러니? 나는 다 알고 있는데. 나는 접이식 우산을 펼쳐 보았다. 우산과 그녀를 번갈아 보다 다가가 말했다. "우산 없어?" 나는 우산을 내밀었다. 우산을 주고 앞장서 나갔다. 안녕. 내일 봐.




빗방울 날리는 밤.


돌아가야 했다. 설핏 희미하게 가슴이 뛰는 것이 느껴졌지만 돌아서야 했다. 비가 차갑다.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바람이 불어왔다. 힘겹게 페달을 저어 속도를 높였다. 얼굴에 빗방울이 벌침처럼 꽂혔다. 자전거 길에 인적이 없다. 코너를 돌 때마다 미끄러질까 봐 속도를 줄이는데 그때마다 젖은 옷감이 피부에 스쳐 감촉이 으스스했다. 서늘했다. 이가 딱딱 부딪혔다. 왜 이렇게 춥지? 왜 이렇게 멀지?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들었다. 달리면서 무언가를 떠올리는데. 그녀도 지금 집으로 가는 길일까. 우산을 챙겼을까. 생각해보았다. 혹시 오래전 그날처럼 우산 없이 멍하니 서 있는 건 아니겠지. 어쩌면 그때처럼 누군가를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내가 지금 비를 맞고 가듯이 그녀도 우산이 없을 때 그런 회상을 하고 있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위기일수록 상승하는 쾌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