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머피 May 20. 2021

위기일수록 상승하는 쾌감

제발 저기까지만 가면, 근원적 안심의 바탕



야단 났다. 


사거리 신호등 앞에 서 있는데 가스가 막 삐져나온다. 엉덩이에 힘을 줘 막아도 소용이 없다. 픽! 피리리리 피빅! 뱃속에서 노크 소리가 다급하다. 이윽고 따라라라 따닥! 하고 따발총을 쏜다. 문을 열어라. 나가야 하느니라. 나갈 시간이 다 되었다고 전해라. 그럼에도 내가 묵묵부답이니 뱃속에서는 어떻게든 조그만 틈을 만들려고 한다. 바지 뒤 엉덩이에서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마구 비집고 나온다. 별안간 괄약근이 소리친다. 이봐 주인장! 힘들어 힘들다구! 더 이상은 못 버텨. 내 목소리 안 들려? 그 말에 내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너 지금 주인님께 반말하니? 라고 물으니


"죄송해요. 너무 급해서 그랬어요. 이미 저의 제어 능력을 훨씬 지나친걸요"


하고 괄약근은 시무룩 대답한다. 이제 어쩌나. 신호등 앞이다. 신호등아 어서 바뀌어라. 나는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한다. 제정신이 아니다. 두 다리를 꼬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사지를 꼰다. 옆에 서 있던 두 아가씨가 이상한 눈길로 본다. 어머 저 사람 좀 봐. 이상해. 왜 저래? 가만히 서 있지 않고? 어머? 어머? 지금 우리 보고 저러는 거 아니지? 표정 봐. 꿈틀꿈틀 몸짓이 이상해. 여보세요. 설마 변태? 너무 노골적? 어머 어머! 벌건 대낮에 이게 무슨 일이니? 나는 궁극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네들의 대화를 경청한다. 그리고 곧장 텔레파시로 전한다. 아아 제가 지금 당신네들에게 오롯이 정상적으로 보이기 위한 인내를 짜낼 만큼의 여유가 없어서, 이처럼 경박한 움직임을 보이는 거예요. 여유가 있으면 당연히 점잖게 서서 신호를 기다리겠죠. 아까 초록불이 5초쯤 남았을 때 확 뛰어버릴까 하다가 참았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왜 참았을까 너무 후회되는 거 있죠? 통증이 이렇게 간격을 두고 계속해서 찾아올지 몰랐어요. 방금 전에는 괜찮았는데 또 미칠 듯이 조여 오고 또 괜찮았다가 숨통을 압박하네요. 뭐라고요? 그거 혹시 진통인 것 같다고요? 여보세요! 저는 아저씨잖아요. 비록 내 배가 뽈록 튀어나왔다지만. 그러면서 나는 아랫배를 내려다본다.


어라? 그러고 보니 맞다. 진통이다. 처음에는 5분 간격으로 찾아왔다. 카페에서 요구르트 음료를 시켜서 어우 차가워 어우 새콤해하며 쪽쪽 빠는데 절반쯤 빨았을 즈음 신호가 왔다. 아릿하네. 그냥 뭔가 찌릿한 것이 찌르르 찌르네 라고 치부했다. 요구르트 다 마시고 갈까? 배가 좀 불편한 것도 같은데 그래도 뭐 집이 가까우니 별일이야 있겠어? 맘대로 찔러라 하다가 복부에 가스가 급격히 차 팽창하는 모양새가 요사스레 느껴져 벌떡 일어났다. 벌써 다 찼어? 뭐 이래 빨라? 제법 용량이 큰 압박인데? 어제 응가를 건너뛰었나. 그렇담 뭔가 내가 모르는 커다란 게 있을지도 모르는데. 뱃속에서 긴급 전보가 날아왔다. 세계대전이 터졌다고.

나는 대답했다. 요새 좀 둔해져서 계속 수소폭탄이 터지고 있다는 걸 몰랐네. 난 뭐 조용하길래 몰랐지. 그래 알았어. 네가 거기 있다는 거 알았다고. 그만 말해. 폭탄 좀 그만 터뜨려. 나는 뱃속의 응가에게 말하고 일어나 책과 컵을 들고 나서는데 다시금 진통이 왔다. 일어서는데 아주 얇은 송곳으로 아랫배를 푹 찌른 거 같아 휘청거렸다. 조그만 구멍 하나에 엄청난 압력이 몰려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뭐야 갑자기? 너무 하잖아? 하는데 플라스틱 컵 속의 요구르트가 발그레 웃는다. 네놈이구나. 나는 가게 밖 비닐봉지를 열어 요구르트 통을 꾸겨 넣었다. 용서하지 않겠다. 그래 터뜨려라. 다 내보내 주마. 뱃속에서는 뜨거운 병사와 찬 병사가 만나 싸우며 전사자를 양성했다. 병사들은 적에게 폭탄을 던져 터뜨리고 따발총을 쏴 댔다. 죽고 죽이며 전사자들은 강을 이뤘고 주변 여러 나라에서는 제발 쟤들 좀 치워 주세요 더러워서 못 살겠어요 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다. 두 아가씨는 나를 피해 멀찍이 떨어져서 건넌다. 나는 최단거리 직선으로 총총 걷는다. 이제 저 코너만 돌면 아파트 입구다. 입구에 다다라 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여전히 두 다리를 꼰 상태다. 먼저 호수 번호를 터치하고 열쇠 모양을 터치하고 비번을 터치해야 하는데 젠장 비번 마지막 숫자를 잘못 터치했다.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하필 이럴 때 실수라니. 식은땀이 났다. 다시 진통이 왔다. 진통은 통증만이 아니라 압력도 같이 수반했다. 픽! 피빅! 소리가 났다. 진통은 왔다가 그냥은 안 돌아가지 하면서 따발총을 쏘았다. 따라라라 따닥! 아 제발 그만 쏘세요. 나는 제자리에서 점프하듯 깡총 뛰었다. 그만 제발. 지금 만약 두 다리를 활짝 벌려 이른바 자유 방사를 한다면 몸은 반작용으로 공중 저 높이 날아오를 수도 있으리라. 마치 슈퍼맨처럼. 정말 그럴 것만 같았다. 그래도 그럴 수는 없었다. 사회적 체면이 있기에. 겉보기로는 아직 점잖은 아저씨가 아닌가. 하늘은 다음에 가고 지금은 화장실로 가야 해.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우리 집 호수를 누르고 비번을 천천히 따박따박 눌렀다. 다행히 현관문이 열렸다.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숫자가 줄어들기를 기다렸다. 어서 1층으로 와라. 띵! 1층으로 왔다. 다행히 아무도 없다. 나 혼자 기다리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스르르 문이 닫히는 순간 나는 힘을 빼 아주 살짝 조심스레 댐 입구를 열었다. 많이 열면 얘네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나올까 싶어 아주 조금만 열었다. 아직 진통 안 왔지? 오기 전에 급한 애들 너네들부터 얼른 나가. 피익! 픽! 삐이이이! 하고 소리가 났다. 마치 압력밥솥에 밥이 다 되어 증기가 뿜어져 나오듯 가스가 삐이~ 하고 삐져나왔다. 아, 좋구나, 조금이지만 조금이라도 압력을 줄이니 복부가 편안해지는 것만 같은 찰나, 닫히던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열리는 게 아닌가. 누군가 현관문으로 들어섰고 채 닫히지 않은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아뿔싸! 아까 신호등 앞에서 만났던 아가씨 들이다. 

두 아가씨는 타면서 "감사합~" (엘리베이터를 기다려주어서) 인사하다가 "흡!" (가스 때문에) 하고 놀랐다. 결코 기다리려고 기다린 게 아니라 항변하고 싶었다. 아가씨들은 먼저 내 얼굴을 보고 놀랐고 좁은 공간에 들어찬 냄새에 연달아 놀랐다. 순간 나는 모골이 송연하다는 말이 떠올랐다. 때마침 진통도 시작되었다. 마지막을 향해 치달리는 통증. 아가씨들이 흘낏 나를 보는데 내 표정은 희멀건 눈자위부터 야릇한 입모양까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그래도 지금 표정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일단 괄약근을 총동원하여 엉덩이를 압박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아 제가 이런 사람이 아니거든요. 지금 제 모습 전부 잊어 주세요. 차마 마주 볼 수 없어서 고개를 돌리는데 문득 엘리베이터 벽면에 내 이름이 보였다. 우리 아파트에 이사온지 어언 2년. 최근에 나는 여차 저차 하다가 아파트 선거관리위원회 총무가 되었다. 한 달 전 선관위 총무 모집 공고가 엘리베이터 실내 게시판에 붙었고 지금은 당선 공고가 떡하니 붙어 있다. 동호수와 이름 그리고 직업이 버젓이 공개된 채다. 며칠 전 아빠 이름이 왜 여기 있어? 라고 딸아이가 물었고 아내는 제발 나대지 마라, 라고 일갈했었다. 나도 이처럼 개인 정보가 공개될 줄은 몰랐다. 보면서 얼굴 사진이나마 공개되지 않은 게 어디냐며 한숨을 쉬었다. 주소나 이름 따위도 어쩌면 종이 정보일 뿐 실생활에 그리 영향을 끼치지 않을 거야, 라고 내 멋대로 키득거렸는데. 아가씨들은 5층에 눌려진 버튼을 보고 내 정체를 파악했을까. 걱정이 되었다. 이대로 관리사무소에 항의 전화라도 할 것만 같아 불안했다. 여기 아파트 총무가 변태다, 라고 신고하면 끝장이다. 방법은 하나.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왼쪽으로 틀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른쪽으로 틀었다. 503호인데 501호로 가는 것처럼 했다. 저는 게시판에 붙은 그 사람이 아니랍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도 전에 아가씨들은 "에이~썅~이게 무슨 냄새 sfgsdfasdf 재수가 없으려니까 sfsdfwef"라고 말했다. 




대문을 열어 후다닥 신발을 벗어던지고 바지를 벗으면서 갔다. 긴장의 끈이 풀릴락 말락. 투다닥 스텝이 엉키게 화장실에 들어가 마지막 팬티를 내리는 순간 뭔가 싸하고 아찔한 기운이 느껴짐과 동시에 탁! 마침내 변기에 앉는 데 성공했다. 투둑 툭! 막혔던 혈이 풀리며 푸르게 녹이 밴 내용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근데 생각보다 그 양이 적다. 한계수위까지 가득 찬 댐에 수문이 활짝 열리면 순수하게 쏴아아~하고 물이 빠져야 하는데 얘들은 순수하지가 못했다. 수문을 열었는데도 "정말 열렸어? 이번엔 정말일까? 나가도 될까? 나갔는데 팬티에 지리는 건 아니겠지?" 하고 의심부터 했다. 엄청난 압력 때문에 뒤에서 밀고 제치고 하는데도 한 점 두 점 튀어 나갈 뿐, 다 같이 질서 정연하게 일제히 나가지를 못했다. 전쟁에서 죽은 전사자들. 죽었으면서도 다른 세상에 쉬 건너가지 못하는 두려움. 나는 말했다. "얘들아, 이제 나와도 돼" 그런데도 얘네들은 마치 정찰병을 보내듯 한 덩이 두덩이 미사일을 발사하듯 쏠뿐 본진을 내보내지 않았다. 나는 정찰병들이 나오자마자 변기 레버를 당겼다. 쏴아아 하고 정찰병들은 떠내려갔다. 언제라도 깨끗이 비워 본진이 나오기를 준비해야 했다. 안 그러면 그 냄새, 그 양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의심 많은 아가들. 이해는 한다. 정찰병들이 나와도 괜찮다고 무전을 쳤나 보다. 퍽! 퍼벅! 드디어 본진이 몰려나오기 시작한다.


아아 좋다. 불과 1분 전까지 사경을 헤맸지만 지금은 뭐 금방 까먹고 돌아서버린다. 냉장고를 여니 요구르트가 보인다. 유통기한을 보니 날짜가 이틀 지났다. 먹어야겠다. 냉장고에 있었으니 뭐 괜찮을 거야 라는 생각. 또 배가 아프면 어쩌지? 애들 다 내보냈잖아. 지금이 아니면 요구르트 버리게 된다고. 결국 먹는다. 마지막 숟갈을 뜨기 전 아주 얇은 한줄기 바늘이 콕 찌른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무심코 고개 돌려 보았다. 이 놈의 공고문은 언제까지 붙어있으려나 하는데 뭔가가 눈에 띄었다. 엘리베이터 벽면 게시판 공고문 내 이름 옆에 아주 미세하게 빼뚤빼뚤 적힌 글자. 나는 황급히 침을 묻혀 손가락으로 비벼 문댔다. 그 글자는 바로


[방귀 냄새 뵨태]  

 



매거진의 이전글 갓 구운 김에 밥 싸 먹으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