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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Apr 15. 2021

저는 구월이라고 합니다

9월에 쓴 일상, 9월에 쓴 추억



태풍이 지나간 아침. 


바람이 분다. 구름이 바삐 움직인다. 다들 어디로 가나. 나는 이때다 싶어 자전거를 타고 나갔는데 하필 투둑 투둑 비가 내린다. 집에서 볼 때는 분명 오지 않았는데 막상 나가니까 비 내리는 건 뭔가. 어쩔 수 없이 다시 집에 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이내 구름이 열려 파란 하늘이 드러난다. 


이번엔 정말 그쳤지? 하고 자전거를 끌고 나오는데 다시금 빗방울이 후드득 내린다. 급한 김에 버스정류장에 들어가 올려다보는데 저기 옆 구름 한 덩이로부터 흩날리는 비다. 어딘가 심술궂어 보이는 구름 한 덩이. 비는 아래로 곧장 내리지 않고 대각으로 빗겨 내린다. 대각 끝이 내가 있는 장소다. 바람에 떠밀려 비는 본디 내려야 할 곳에 내리지 않고, 바람은 비를 예정했던 곳이 아니라 엉뚱한 곳으로 가져가 거기서 나는 엉뚱하게 비를 맞는다. 


주말에만 내리는 비. 비야 너는 왜 나만 따라오니? 마치 함께 놀자고 칭얼거리는 딸아이처럼 흩날린다. 

오늘은 하루 종일 놀아주기로 했잖아요. 아빠, 오늘은 꼭 약속 지켜야 해요. 

딸아이는 학교를 일주일에 딱 한 번 간다. 


그래, 비 좀 맞으면 어때. 같이 놀자꾸나. 다 벗고 샤워하면 되지. 훌훌 욕실에 들어가 따뜻한 물로 머리 감고, 오늘처럼 차가운 기운이 은은히 감도는 날에는 뜨거운 물을 욕조에 가득 받아 찰랑찰랑, 가만히 몸 담그면 좋을 것 같다. 대신 답답하지 않게 욕실 문은 활짝 열어두고, 공기가 잘 통하게, 밖으로 통하는 모든 창을 여는 거야. 복도 창도 열고 다용도실 창도 열고 복도에 연결된 작은방, 아이방 창도 열고, 거실 창도 다 열어. 모두 활짝 개방해. 그래, 어느새 여기는 야외가 되는 거야. 바깥바람이 자유로이 뛰노는 곳. 어쩌면 노천탕 냄새가 물씬 날지도. 물 밖은 차갑고 물속은 따뜻해. 아아, 좋아, 완벽한데. 


나는 상상하면서 자전거를 탄다. 

비야 내려라. 아빠의 보물, 사랑하는 딸아, 이번엔 무슨 놀이할까? 학교놀이? 네가 선생님이고 아빠가 학생이라고? 미술시간? 그림을 그리라고? 소풍 가는 그림? 옛다, 그렸다, 그림을 내놓으니 딸아이가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준다. 비야! 이리 와 함께 놀자. 젖어도 괜찮아. 나는 이미 목욕이라는 계산을 다 해두었으니. 미술시간이 끝나자 국어시간이랜다. 나더러 시를 쓰란다. 나는 비에 관해 시를 써 제출했다. 이번에도 '잘했어요' 도장을 받았다. 선생님! 쉬는 시간은 없어요? 했더니 딸아이가 한 시간만 쉬란다. 한 시간 뒤에는 음악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피아노를 배워야 한다. 나는 도레미가 어디쯤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남자다. 그런데 왼손으로는 화음을 넣고 오른손으로 연주하는 걸 하자고 하네. 아무튼 한 시간 안에 다녀와야 해. 비가 내린다. 머리에 어깨에 팔과 등에 닿는 빗방울의 차가운 감촉이란. 


나는 그리 견딘다. 냉랭한 비가 몸속으로 스며드는 것만 같다. 비를 맞을 때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으스스하지만 그래도 좋아. 옷이 젖어도, 거리에 보는 사람이 없으니. 나는 목욕할 수 있어. 오래간만에 여름이 비켜선 틈. 따뜻한 물속에 들어가면 지금 이 야생의 기운은 전부 상쇄될 테니. 몸 밖으로 내보낼 거야. 감기에 걸리지 않게. 


벌써 그런 계절이 왔다. 




어느덧 구월이다. 


구월이라고 하니 구월이라는 글귀가 새삼 의미심장하다. 나는 몇몇 동호회 카페의 닉네임을 '구월'이라고 이름 지었다. 구월님! 구월님~ 구우워얼님~ 안녕하세요. 어째서 구월로 했을까. 구월님은 구월을 참 좋아하시나 봐요? 라고 몇몇이 물어왔다. 네 맞아요. 구월은 가을이 오는 달이잖아요 하고 나는 답했다. 정말 그럴까. 가을이 온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아니다. 구월은 아무렴 재회하는 달이고 결실하는 달이기 때문이리라. 외로움을 털어놓는 달.


방학이 끝나고 친구들과 다시 만나는 시기. 여름 내내 잊었던 사람과 사뭇 다른 얼굴로 본다. 보면서 그리 말한다. 잘 지냈어? 어, 많이 탔네. 이그, 넌 아예 새카매졌네. 몰라보겠다. 와아, 살 빠졌네. 뭔가 달라진 거 같아. 이상해, 다른 사람 같아.


일상에서, 내게 방학이 사라진 지 오래지만 여름이 끝나 가을이 오면 새삼 새로이 인사한다. 오래전 기억 때문에, 벌써 가을이네요. 세월이 참 빨라. 이제 넉 달도 채 안 남았네. 또 한 살 먹겠다. 


전화해본다. 그냥 생각나서 걸었어요. 잘 지냈어요? 그때 잘 챙겨줘서 고마워요. 떠나고 보니 더 생각나네요. 만나서 반가워. 우리 같이 놀자. 밥이랑 커피랑 술 한잔이랑 이야기라도, 그래, 살아간다는 건 그런 거겠지? 오랜만에 보니까 그간 속으로 혼자서 감내하던 이야기를 이렇게 비로소 털어놓을 수 있으니. 털어놓지 않으면 슬픈, 그런 계절이 왔다.


네가 좋아. 널 만날 수 있어서 참 좋아. 안 볼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막상 보니까 알겠다. 아침으로 찬 바람이 불 때면 불현듯 가슴 두근거리는 날. 누구라도 잊었던 이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길고 긴 기다림이 끝났구나. 때가 되었구나. 편안한 사람. 마치 어제 본 듯 친숙한 목소리. 친근한 음성. 친밀한 이미지.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 소곤소곤하는 말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 내 얘기를 들려주는 시간. 

하하하하, 그러니까 있잖아, 그게 그랬던 거야, 미안해, 몰랐어, 진작 연락할걸. 

이렇게 편안한 기분. 


있잖아, 이제야 네가 원래의 너처럼 너다워졌어. 내가 나답게 보인다고? 나는 내가 나답다는 게 어떤 건지 모르고 지냈어. 그저 여름 무더위를 피하느라 거기에만 열중하고 있었지.


참 이상하지? 

지금 내가 일하는 직장. 여기 근처에 점심 먹고 잠깐 어슬렁 산책 가는 동네가 있는데 이 동네 이름도 구월이야. 정확히 '구월리'지. 마을 이름도 구월 마을이야. 구월은 참 좋아. 논이 시원하게 쫙 펼쳐져 있고 멀리 끝에는 높은 산이 있어. 산에는 늘 구름이 걸려 있지. 산은 구름이 어디 도망 못 가도록 붙잡고 있나 봐. 보이지 않는 팔. 나는 그 산을 보며 상상해. 지금 저 산속 길을 걸으면 얼마나 좋을까. 포근하겠지? 너무 어둡지는 않을까? 바다까지 이어지는 산자락. 구름으로 둘러싸인 길. 운치 있겠다 싶어서 언젠가 가보고 싶다는 바람이 가득, 바람만 가득, 짐작만 잔뜩, 상상만으로도 기대가 돼. 


흐음, 근데 아직 못 가봤어. 

혼자서는 쓸쓸하니까. 어쩌면 구름 속 잘 보이지 않는 곳, 고독 속에 갇힐까 무서워서. 

그래도 언젠가는 가볼 거야. 흐흣, 당연히 너랑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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