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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Apr 14. 2021

여름 비 내리는 풍경

비 온다




비 온다. 


빗방울이 날린다. 혹시 몰라 우산 챙겨 나왔다. 논두렁 사이 길을 걷는데 순간 후드득 비가 내린다. 잘 보이지 않는 주변. 어쩐지 포근해. 비가 내 모습을 가려준다. 고개 드니 멀리 산과 산 풍경이 희미해진다. 얼핏 보니 산 중간쯤 비구름이 걸렸다. 


아득하다. 뭐랄까. 문득 얼굴에 와 닿는 바람의 감촉이란. 

너무 좋아서. 마치 엄마처럼, 오랜만에 만나는 이모처럼, 할머니처럼, 내가 아이였을 때 볼을 살랑 어루만지는 느낌. 아이였던 아이에게 아이야, 하고 반갑다며 인사하는 것처럼 부드럽다. 


이제 아이는 사라지고.

그 시절 기억마저 사라진 내가 걷는데.


바람이 인사한다.

안녕! 난 여기서 부는 바람이야. 진작부터 불었고 때마다 불었었지. 지금도 마침 부는 시간이라 널 보러 왔어. 어쩐 일로 왔니? 바람이 묻길래 나는, 점심을 먹었는데 속이 더부룩하여 그냥 산책 삼아 나왔다고 했다. 그러자 바람은 빗속을 뚫고 자꾸만 내 얼굴을 간지럽힌다. 귀여운 강아지가 주인에게 하듯, 나는 당신이 좋아요, 제일 좋아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 이렇게 만나서 너무 좋아요, 하는 것 같다. 

이상하다. 날 알지도 못했으면서, 오래도록 기다린 거처럼 반가운 이 느낌은 뭘까. 바람에서 정다운 냄새가 묻어난다.




발아래 논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일렬로 심어진 모의 가지런한 모양새가 귀엽다. 빗방울이 주변에 찰랑거린다. 비가 오니 아기 모들이 즐거운 듯 지저귄다. 

꺄아! 안 그래도 참방, 물이 좋은데 참방, 새로운 물 참방이 내린다! 신난다! 참방. 물이 맛나요! 참방. 

아기들의 참방 소리. 

기분 좋은 오후다.


고개 드니 다시 산이 보인다. 갑자기 멀리 보는 시선이란. 내 눈길을 펄쩍 저만치 끌어가 버리는 산. 가보고 싶지만 가지 못한다. 가보고 싶은데 바라만 보는 정경.  


이제 막 시작되는 여름날의 오후. 우산 쓰고 농로를 걷는다. 운동화가 다 젖었지만 마냥 평화롭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왕왕 왕왕' 하고 들린다. 어라, 사람이 있네. 논두렁에 물길을 트는 농부와 힐끔 눈이 마주친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지나친다. 일하는 농부마저도 이내 풍경 속에 섞인다.


불쑥 어둡다는 생각이 든다. 구름이 좀 더 내려앉았다. 슬쩍 보는데 길가 옥수수가 움직이는 것 같다.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보는데 그새 훌쩍 이만큼이나 컸다. 쑥쑥 크고 있네. 괜찮아. 눈치 보지 마. 맘 놓고 크렴. 안 놀릴 테니 더 커도 된단다. 


비 온다. 


빗방울이 날린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인사한다. 안녕. 매년 보는 여름 비지만 지금은 지금이니까 어쩌면 지금이라서 더 특별해. 싱그러운 기운. 초록 초록한, 푸릇 푸릇한, 풍경이 너무 좋아. 괜찮아. 기분 좋아. 가슴이 뛴다. 음 이것은 아마도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비 내리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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