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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Jun 01. 2021

사차원으로 빠진 시내버스

버스에 타고 내리는 이들과의 동행



버스에 올랐다. 


종점에서 종점까지. 갈 길이 멀다. 집에 가는데 족히 한 시간 정도는 걸릴 터. 황혼이 지는 길. 한참을 가야 해. 정류장마다 퇴근족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귀가하는 사람들. 저마다 먼 길 떠나는 차들. 도로가 붐벼 차가 길게 줄 서는데 신호등은 굼적대고. 차창밖을 보노라면 그저 아득할 뿐. 언제나 가려나. 잠시간 한가로운 시간. 21세기 초. 아직 스마트 폰이 없던 시대. 사람들은 무얼 보며 가나. 신문을 보거나 책을 보거나 하염없이 창밖을 보거나. 나는 무얼 하며 참을 쏘냐.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사람은 사람을 보지 않을까. 아니다. 사람은 사람을 보면서 간다. 다만 정면으로 보지 않을 뿐 옆에서 뒤에서 앞에서 내내 당신네들을 본다. 시계를 쳐다보거나 앞사람 뒤통수를 보거나. 멀리 풍경을 보거나 가까이 부대끼는 이들을 둘러보거나. 오늘 나는 어떤 분들과 함께 가려나. 같이 떠나볼까나.


복작대는 버스. 사람으로 가득 찬 실내. 나는 버스에 오르자마자 맨 뒤 때마침 비어있는 코너 자리를 발견하고 쏜살같이 내달려 앉았다. 버스 맨 뒤 창가 자리다. 일부 승객들이 외면한 한 자리. 거기 앉을 바에 차라리 서서 갈란다 할 수도 있는 자리. 그들이 망설이는 틈을 파고들었다. 내게는 최고의 포지션이다. 덜컹이는 버스 안에서 노곤한 몸으로 지루한 시간을 버티기는 힘들다. 책이나 신문을 보면 머리 아프다. 그렇다고 바깥만 보자니 느림보 버스 때문에 답답해지기 일쑤. 신호등아 언제 바뀌려니? 저 놈의 승용차가 감히 버스 앞에 끼어들려 하네? 비켜 이놈아! 보험료는 준비되었냐? 내가 운전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교통사정에 스트레스를 받나. 그만 시선을 거둔다. 눈을 돌리자. 맨 뒷자리에서는 버스 하차 문이 가까이 보인다. 버스 운전기사와 대각으로 끝에서 끝에 위치하는 자리에 내가 위치한다. 기사님이 왼쪽 앞에서 전방을 지배하고 나는 오른쪽 뒤에서 후방을 지배한다. 그래서 책임이 무겁다. 어떻게 지배할까. 어떤 책임이 있을까. 명당 중의 명당. 버스 내부가 전부 시야에 들어온다. 들어오는 이들과 나는 교류를 한다. 교류를 통해 어느 순간 버스 안 현재 사람들이 최고 조합이야, 라고 말할 터다. 어떤 방식으로 할까? 이를테면 '지금이다'라는 신호를 보낼 것이다. 내가 신호를 보내면 기사님도 오케이를 할 테고 이 순간을 지배하는 전지전능한 신도 허락할 것이다. 그러면?   




버스 안에 사람들. 


버스는 달리는 중이다. 버스는 정류장이 아니면 문 열리지 않는다. 문 닫힌 버스 안 작은 공간에 함께 있는 사람들. 어쩌면 소중한 인연. 옛말에 옷깃만 닿아도 그것이 인연임을 알아보라고 했다. 나도 알아보고 싶다. 당신이 인연이구나. 당신네들이. 아저씨 아줌마 학생 젊은이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아무리 봐도 나와 연결될 어떤 인연 꺼리가 보이지 않는데. 도대체 어떤 인연일까? 인연일지 인연이 아닐지는 하늘이 정하는 법. 그러나 하늘은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러면 지금은 온전히 나만의 기준으로 인연을 미리 대비해본다. 무엇에 대비한단 말인가? 라고 묻는다면, 부지불식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 않나, 라고 답하고 싶다. 세상에는 예상치 못한 사건·사고가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이를테면 통째로 버스가 나포된다면 어떡할 것인가. 버스가 공간이동으로 무인도에 떨어질 수도 있다. 어떤 사차원의 문이 열려서 그 속으로 버스가 들어간다면 버스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버스만이 존재하는 세상. 지구의 어디든 바닷속, 산속, 동굴 속에 고요히 갇힐 수도 있다. 그렇게 나포되거나 사차원으로 통과하여 오랜 시간 평생 그곳에서 머물러야 한다면 결국 거기서 인연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 그런 상황이 되면 어쩔 수 없어. 


영화처럼 위기상황에서 남녀는 무척이나 친밀해진다. 비록 낯선 관계일지라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뭉치게 된다. 서로 의지하여 어려움을 극복하려 하는 게 본능이다. 그런 본능이 작동될 상황. 어쩔 수 없다. 그런 상황이 오면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노라 읊으며 나는 비장하게 숫자를 센다. 

현재 남자가 몇 명인가? 여자가 몇 명인가? 남자가 열 세명이고 여자가 열한 명이다. 뜬금없이 왜 숫자를 세냐고? 일단 지켜보라. 스무 살부터 오십 대 전후까지. 최악의 상황에서 어떻게든 인연이 될 수 있는 연배로 구분하여 센다. 꼭 인연이 되어야 하나, 라고 묻는다면 나는 장렬히 이렇게 답하겠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한없이 외로워진다. 더욱이 위기 속에서는 견딜 수 없게 외롭다. 위기가 있기에 사람을 찾는 것이다. 위기가 없다면 그냥 혼자 살고 말지, 가 된다. 위기는 때로 감사하고 때로 고마운 것이다. 위기가 있어 사랑이 오고 위기가 있어 영화가 만들어진다. 사람이라면 언제든 더불어 살 생각을 해야 함이 마땅하다, 고 말하고 싶다. 혼자 사는 게 좋다고 착각하는 건 평화로운 시대만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만 털어라. 훌훌 당신을 옥죄는 편견들을 떨쳐라. 지나간 인연은 그만 그리워하고 당장 눈앞에 선 새로운 인연을 만나야 한다.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슬픔을 줄이는 방법이다. 버스 안에서 해결하자.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헤어지는 게 이 세상의 순리. 순리를 받아들여라. 위기가 언제 올지 모르니. 


눈길이 빠르게 움직인다. 젊은 여자가 몇 명인지, 젊은 남자가 몇 명인지. 우선 젊은 남자는 나까지 포함 열 명이다. 열 명이라. 열 명의 전사들은 서로 경쟁자가 되어 물고 뜯으며 혈투를 벌여야 할 터. 여기에 운전기사도 포함해야 하는 게 도리. 중년의 기사지만 버스의 수장으로서 이 정도 특권은 허락해야 하겠지. 그러면 젊은 남자는 최종 열한 명.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젊은 여자를 세어야 한다. 과연 몇이나 될는지. 떨린다. 한 명 한 명이 소중하다. 일단 남자보다 많아야 내게도 국물이 떨어진다. 일반적인 경쟁으로는 덩치와 힘에서 밀린다. 지혜로 승부하면 안 될까? 안 된다. 인정할 건 인정한다. 혹시 주인공이 여러 명을 차지한다면? 우수한 남자가 젊은 여자 여럿을 거느린다면? 아니 될 말씀. 현대의 일부일처제 법규를 신뢰한다. 잘났다는 이유로 다수를 차지할 수는 없는 법. 마음에 들지 않아도 여자가 많다면 아무래도 남자 쪽이 여자를 선택하게 되겠지. 반대로 남자가 많으면 여자에게 우선권이 갈 터. 어쨌거나 일 대 일로 짝을 맺는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어떠한 돌발적인 상황에서 ‘사랑’이라는 명목 하에 ‘교섭’이 가능할 정도로 가이드라인을 세워 숫자를 센다. 라인의 기준은 나이다. 사랑에 나이는 문제 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기타 조건과 복잡한 문제들이 얽히다 보니 어지간하면 문제가 된다고 봐야 하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아아 슬프다. 오늘따라 가이드라인을 너그럽게 늘어뜨렸는데도 여자는 일곱 명이 전부다. (여기서 일곱 명은 이십 대부터 사십 대까지다.) 나머지는 어린 학생과 오육십 대 이상의 아줌마, 아저씨, 노인이다. 그들은 일단 열외로 두고 현재 버스의 실제상황은 '마이너스 4'로 여자가 부족하다. 만일 이대로 버스가 멈춘다면 어쩌나. 사고를 당해 SF영화처럼 정말로 사차원이든 오차원으로 옮겨간다면 큰일이다. 인연이 부족하단 말이다. 여긴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오버. 내게 배당될 여자가 없다는 말이다. 전지전능한 신이여 아직은 때가 아니올시다.    

나는 호소했다. 


아무리 생면부지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막다른 세상에 몰리면 남녀는 서로 의지하고 기대어 더 큰 용기를 얻어 살아감을 모르시느냔 말이오. 아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흥분하고 말았네요. 잠깐만요. 침착하자. 일단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겠지. 다음 정류장을 기대할 수밖에.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나는 숫자에 제외했던 어린 학생들도 남녀를 분간하여 그들만의 질서를 위해 더하기 빼기를 했고, 오육십 대 이상도 그들만의 ‘세대 접선’이 가능하도록 계산을 해두었다. 행여 오육십 대 아저씨들이 제 나이는 생각지 않고 또래보다 젊은 여자를 선호하면 어떡하지? 그렇담 오육십 대 아주머니들이 화낼 텐데? 아이고 머리 아파! 뭐 연배로 따져 이건 그들만의 문제라 치부하자.            

   

달리던 버스가 다음 정류장에 섰고 남자 하나와 여자 둘이 내렸다. 눈물이 났다. 결론은 마이너스 5. 아아 오늘따라 운이 없구나. 안 돼. 제발 예상치 못한 상황, 버스가 나포되는 장면은 오지 않기를. 나는 시무룩하다가도 버스가 서면 본능적으로 맨 앞 승차하는 문을 예의 주시했다. 놓치면 안 된다. 버스에 여자 하나가 오르고 남자 셋이 올랐다. 이제는 마이너스 7. 절체절명의 위기. 속절없이 버스는 나아가고 사람들은 내리거나 오른다. 나는 가슴이 답답해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진정제를 먹어야 하는데 약 사러 갈 여건이 아니다. 준비되지 않았다. 나는 아직 봄을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고 여름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다. 차가 밀려 버스 주위로 몰려드는 차들을 염려하며 주변의 기상과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를 살폈다. 이어서 버스 내부, 성비의 불균형에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아니다. 어떤 일이라도 무슨 사태라도 벌어지면 끝장이다. 내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나. 준비되지 않았단 말이다. 그냥 외면해버릴까? 이대로 무사히 종점에 도착하고 나는 그저 내리기만 하면 끝인가. 인간은 어차피 혼자니까. 혼자다. 혼자라. 혼자라고? 혼자 살고 싶어? 혼자 살 수 있어? 혼자 살 수 있다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혼자 살기 싫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한다, 라고 나는 혼자 중얼거린다. 




저 앞 정류장에 여대생 무리가 보인다. 


두근두근. 그곳은 분명 대학가. 여대생들이다. 기어이 버스는 시내에서 여대생 무리를 태웠다. 야호! 횡재했구나. 여대생들이라니. 싱그러운 초록의 기운이 잔디밭처럼 버스 바닥에 쫙 깔리는구나. 아무 데나 누워도 그곳은 잔디밭. 아무 데나 돌아봐도 그곳은 여대생 옆. 여대생들 속에 끼어 그네들의 젊음에 섞여 마치 남대생이라도 된 것 마냥 팔팔한 기분이 든다. 여기서 여대생이라 하여 내가 감히 인연이라는 범주, 인연이라는 위장으로 여대생이라는 명제를 모욕하는 건 아니라 둘러대고 싶다. 여대생은 비록 지금의 내 연배와는 세대가 다르지만 당시 이십 대의 내게는 무리 없는 또래가 아니겠는가. (과거의 나를 방패 삼아 여대생이라는 전지전능한 이미지를 차용하려 한다. 어쨌거나 핸드폰이 없는 시대였으니) 나는 바삐 눈알을 굴려 플러스, 마이너스를 체크하고 가운데 다닥다닥 서서 가는 이들을 뚫고서 가려진 오차범위까지 꼼꼼히 잡아냈다. 결론은 플러스 10. 나는 만족스럽게 나만의 가늠을 마무리 지었다. 아아 이제는 됐어. 그냥 아무나 골라잡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얼굴 따위 상관이 없다. 넉넉한 숫자에 나는 이 세계 관대한 지배자가 된다.

      

차창 밖으로 새카만 강물과 붉은 가로등이 희뿌옇게 보인다. 버스 차창은 사람들의 호흡으로 점점 하얗게 김이 서려 바깥 풍경을 차단한다. 함께 있지만 서로를 보지 아니하고 밖만 보다가 이제는 밖을 볼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은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불안하다. 이제 무엇을 봐야 하는가. 볼 게 없어도 봐야 한다. 옆사람을 마주 볼 텐가. 앞사람과 시선을 마주칠 텐가. 마주치면 얼른 시선을 피해 버린다. 그렇게 당신을 배려하는 중이다. 막상 시선을 맞추기엔 어딘가 내키지 않아서 당신의 뒤통수를 보든가 가방을 보든가 버스 천장을 보든가 어디라도 당신의 얼굴이나 시선만 아니라면 가만히 편안한 곳에 시선을 두고 도착지를 기다린다. 

              

이대로가 좋다. 어떤 돌발적인 변수가 나타나 버스가 나포되거나 장렬히 산화한다 해도 더 이상 두려울 게 없다. 버스만 남고 세상이 사라졌을 때, 세상만 남고 버스가 사라졌을 때, 바다 위 무인도에 이 버스만 존재한다면, 여자들도 결국 이 중에서 (내가 섞인 무리 중에서) 남자를 골라잡아야 함이 자명하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대들 중 누군가는 기어이 나를 고르지 않겠나. 마뜩잖아도 뭐 어쩔 거야. 나는 느긋하게 미소 짓는다. 더없이 아늑한 분위기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아리따운 그녀들이 옆에 있고 든든한 동료들이 손잡이를 따라 흔들거린다. 보람찬 하루를 마감하고 자기들만의 공간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이 시대 삶의 역군으로 여유롭게 군중 속에 파묻혀 있다. 




ps.


지금은 누구든 핸드폰 속에 파묻혀 간다. 버스든 지하철이든 핸드폰만 본다. 고개 숙여 간다. 혼자 간다. 문득 고개 들어 보아도 모두 혼자가 되어 혼자만의 세상 속에서 이어폰을 꽂아 세상을 차단한다. 돌아보지 않는다. 쳐다보지 않는다. 나는 시무룩 다시 고개 숙인다. 슬며시 떠올려본다.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시절이 그립다. 핸드폰이 없어서 볼 게 없던 그날이 그립다. 사람을 보고 풍경을 보던 시대. 당신을 보고 주변을 돌아보던 그때. 혼자가 아니었던 세상이 그립다. 볼 게 없어서 내 앞에 선 당신을 볼 때가 그립다. 당신도 나를 볼 때가 그립다. 우리는 시선이 마주치고 다음날 또 마주치고 그다음 날 또 마주쳐서 반가운 마음마저 들어서 버스 타는 게 즐거웠던 때가 그립다. 사차원으로 들어가면 무인도에 남겨지면 당신 옆에 서 있다가 위기가 닥쳐올 때 얼른 손 잡아야지 할 때가 그립다. 버스 타던 그날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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