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머피 Apr 15. 2021

벚꽃이 전하는 소리

또 만나자




벚꽃이 폈다. 


나는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본다. 가만히 벚나무를 바라보면 하나둘 꽃잎이 떨어져 날린다. 누가 먼저 떨어질까. 이번엔 누구 차례인가. 살랑이는 봄바람에 뱅글뱅글 몸 돌리며 내려오는 벚꽃을 망연히 바라본다. 

벚꽃은 떨어지면서 보는 이를 환상 속으로 이끈다. 도로가에 사람들은 서행하다가 간간히 차를 세워 본다. 아이들은 벚나무 아래서 신나게 뛰어다닌다. 사진을 찍는다. 와하하 웃으며 소리친다. 나는 다시 벚나무를 올려다본다. 꽃잎이 떨어진다. 꽃비다. 비가 내린다. 아빠, 내 머리에도 떨어졌어. 딸아이를 돌아보다가 문득 떨어지는 벚꽃이 가엽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좀 더 붙어있지, 왜 벌써 떨어지나, 안타까운 마음과 동시에 그나마 떨어져 내리는 풍경이 아까워 처음부터 끝까지 눈에 담으려 눈동자를 부릅 부릅 집중해본다.




벚꽃을 손바닥 위에 놓아보면 너무나 얇고 자그마하다. 떨어지는 애들은 벚꽃 중 대개 큼직한 놈들이다. 자그만 놈들이 큼직해 보일 때, 나뭇가지에서 떨어질 때가 놈들 생의 황금기다. 이제 막 시작된 황금기는 바닥에 닿으면서 끝이 난다. 떨어지기 직전 꽃봉오리에서 엉덩이를 들썩이다가 누군가 쳐다보면 시선이 마주쳐 움찔, 부끄러움에 그만 중심을 잃고 미끄러진다. 미끄러지면 아! 짧은 탄식과 함께 낙하를 시작한다. 머물렀던 나뭇가지를 급히 돌아보며 목이 터져라 외친다. 

안녕~ 안녕~ 안녕~

그동안 고마웠다고. 추운 겨우내 함께 해줘서 감사하다고. 함께 핀 꽃들에도 인사를 전한다. 나 먼저 갈게, 더는 버티지 못하겠다고, 그토록 고생하고 움츠러들었던 시절에 비해 지금은 한없이 행복하다고, 괜찮다고, 지금껏 행복을 몰라서 힘들었다고, 이제 막 찾아온 행복이 너무 짧아 슬프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라고, 나는 짧게나마 행복을 맛보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나를 아프게 지켜보느라 그대들의 행복을 망각하지 말라고, 열심히 돋아나라고 벚꽃은 그렇게 말하고는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소리 없이 바닥에 켜켜이 쌓인다. 떨어지는 벚꽃이 아름다운 이유다. 나는 떨어진 벚꽃을 집어 손바닥에 놓고 본다. 그리고 말해준다. 


친구들은 모두 네 말을 잘 들었나 보다. 저것 봐. 하얀 색상에 살며시 물든 복숭아 빛깔. 옹기종기 모여서 하얗게 빛나는 색을! 안심하렴! 벌써 너의 존재를 다 잊어서, 조금 씁쓸하지만 슬픔은 금세 잊고 새가 지저귀듯 노래 부르며 어깨 맞춰 가지런히 웃는 모습을! 


옆에서 내 말을 들은 딸아이가 엄마! 아빠가 벚꽃에게 말 걸고 있어, 라며 큰 눈망울로 쳐다본다. 아내는 냅둬! 너네 아빠 또 시작이다, 라고 대답한다. 아빠! 꽃잎에게 무슨 말 해? 딸아이는 아빠와 벚꽃을 번갈아보며 궁금해한다. 


나는 딸아이와 아내, 그리고 무수한 벚꽃, 그러한 빛나는 전경을 보다가 생각한다. 비가 오면 안 되는데. 무심코 비를 걱정한다. 비가 오면 벚꽃이 버텨내지 못하고 우수수 떨어질 텐데. 비가 아니었으면 최소 며칠은 더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데, 빗물에 무거워져 엉덩이를 들썩이지도 않았는데 그만 미끄러지면 어떡하나 하는데 정말 비가 왔다. 주말마다 왔다. 그리고 벚꽃은 사방을 밝게 만들어 비가 오는 날도 비가 오지 않는 것처럼 환하게 만들었다. 눅진한 겨울 속 모진 세월에 오래 버텨서 그럴까. 그들은 누구보다도 가볍고 무엇보다도 고요하다. 행복과 가벼움은 때때로 통하고 때때로 통하지 않는다.




세월이 또 지나간다. 딸아이는 커 간다. 부부는 한 살 더 나이를 먹는다. 


눈에 보이는 꽃잎 하나라도 놓칠까 싶어 깊이 들여다볼 때 벚꽃은 더없이 그윽하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깊숙한 산골, 그곳에서 우리가 익히 알지 못하는 어떤 황금기들이 연출된다. 숲 속 옹달샘 수면에 벚꽃이 타닥타닥 떨어져 유유히 떠다닌다. 떨어질 때 나는 소리는 모르지만 어쩐지 타닥타닥 소리 날 것만 같다. 타닥타닥이라, 장작이 탈 때도 그런 소리가 나지 않던가. 어쩌면 행복이 타는 소리. 타닥타닥. 수면에 벚꽃은 제2의 나뭇가지를 만난 듯 또다시 행복을 노래한다. 떨어졌다 해서 끝이 아니다. 일정한 높이 수면에서 그들은 둥둥 떠 있다가 떨어진 친구들과 재회한다. 옹달샘에 떨어진 친구들은 이슬에 흠뻑 취해 재잘댄다. 그러다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어 어느새 솟아오른다. 그래, 이젠 정말 안녕! 비바람이 몰아친다. 숲 속에서 누구 하나 뭐라고 하는 이 없지만 그들은 피어나고 떨어지고 떠다니다 사라진다. 찬란한 그네들만의 유영. 나는 다시 벚꽃이 피길 고대하면서 특유의 은은한 향을 기억에 간직해 둔다. 그리고는 아슴푸레 벚꽃을 떠올린다.


벚꽃이 졌다.


나는 삼월 말의 옹달샘을, 봄이 지나는 소식을, 떨어져 흩날리는 벚꽃을 


늘 그러했듯 다시 그리워할 테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차원으로 빠진 시내버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