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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Jul 08. 2021

스마트한 남자와 3파전 (교빈)

탁구 일지 기록하기



컨디션 안 좋은 날.


피로가 쌓였다. 그간 매일 탁구 치느라 쉴 틈이 없었다. 거기다 어젯밤 천둥번개가 치는 바람에 잠까지 설쳤다. 우르르 쾅쾅! 휘잉~ 휘이잉! 천둥소리, 바람소리. 부스스 새벽에 일어나 거실 창과 아이 방 창을 닫았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다. 잠이 쉬 오지 않았다. 깬 김에 화장실 다녀올까. 그러고 보니 마려웠다. 어젯밤 수박을 너무 먹었구나. 새벽 내 두 번 일어나 화장실에 갔다. 잠을 온전히 자지 못했다. 때문에 컨디션이 다운되었다. 낮부터 눈이 막 감겼다. 컨디션이 안 좋으니 라이벌과의 일전이 부담스럽다. 그러나 평일 저녁이면 늘 기다린다. 나의 버거운 라이벌들이 리턴매치를 부른다. 

와라. 붙자. 겨루자. 대결하자. 혈투를 벌이자. 

감당하기 벅찬 고수들. 이기면 좋고 지면 괴로운 관계. 

오늘은 승리의 쾌감을 느끼기 힘들겠구나 했다. 


교빈 형. 

얼굴이 시커멓지만 고급 안경으로 비교적 깔끔한 인상을 연출한다. 

탁구장에 막 들어설 때 정장 차림은 반듯한 과장님의 모습이다. 반면 그가 배낭을 메고 탈의실에서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나오면 확 다른 인상을 준다. 어쩐지 가볍다고나 할까. 까칠한 과장님에서 부드러운 운동선수로의 변신. 마치 슈퍼맨이 클라크로 변신한듯한 느낌. 낮에는 정장 차림으로 대기업 행정을 좌지우지하며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밤에는 운동복으로 영락없이 탁구 치는 중년 무리에 뒤섞여 버리는 순수함. 클라크처럼 뭔가 2% 부족한 일반인이 되는 것이다. 


나보다 두 살 위지만 이름이 정말 스마트하다. 교빈? 어딘가 서울틱한 이름. 음성이 조용하고 조근조근 서울말투로 교양 있어 보인다. 처음에 다른 이가 나보다 두 살 아래라고 해서 그리 알았는데 얼마 전 대놓고 물어보니 두 살 위라고 했다. 내 딴에는 동생이어서 게임 뒤 꼬박꼬박 음료수를 뽑아 챙겨줬었다. 그런 줄 알았는데 나보다 형이라니. 젠장 곧바로 이미지 업데이트가 힘들다. 

동생 같아서 때때로 같이 탁구칠 이 없이 혼자 있으면 선뜻 다가가 같이 치자고 했다. 

그는 세종 시에 살며 평일만 진주에 거주한다. 직장 때문이다. 평일 저녁이면 늘 탁구장에 나타난다. 

세종 시 지역 6부다. 인근 대전에서 서너 번 대회에 나가 입상하여 승급했다고 한다. 공식 비공식 모두 나보다 고수다. 


교빈 형은 주로 우리 구장 4, 5부와 게임한다. 우리 구장에는 1부와 특 1부도 있지만 주력은 크게 4, 5부와 7, 8부로 나뉜다. 4, 5부들이 메인 탁구대에서 탁구 치고 7, 8부들은 중간부터 바깥 출입구 부근 탁구대에서 탁구 친다. 주력인 4, 5부들은 탁구장 맨 안쪽 1탁 2탁 3탁에서 논다. 거기는 이른바 고수들의 영역이다. 초보들이 감히 얼씬거리지 못하는 에어리어다. 그런데 교빈 형은 당당히 1탁 2탁 3탁의 심판석에 앉아서 다음 차례를 기다린다. 그렇게 4, 5부와 대전한다. 교빈 형이 말했다.


"저는 핸디 받고 하는 게임은 거의 다 이겨요."


말 그대로 4, 5부에게 이긴다는 말이다. 아~ 어떻게 이런 말을 거침없이. 나는 감탄했다. 나도 언젠가 저런 말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2탁 뒤에 위치한 휴게실에서 물 마시며 교빈 형의 플레이를 봤다. 보면서 감탄했다. 어떻게 4, 5부들을 죄다 이기지? 난 감히 도전하지도 못하는데 대단하구나. 6부라는 타이틀. 그것은 공식 대회에 나가 입상했다는 증거. 나는 아직 공식 대회에 나가보지 못했다. 공식 시합이 2년째 전무한 현실. 그래서 나처럼 대회에 참여하지 못한 7부들이 지역에 수두룩하다. 알고 보면 무늬만 7부지 진짜 실력은 4, 5부에 이르는 이들도 많을 터다. 우리 구장에도 있다. 공식 7부지만 구장 안에서 구장 부수라고 4부, 5부, 6부 다양하게 있다. 아무튼 교빈 형은 우리 구장 진짜 고수들 4, 5부들에게 승률이 높은 편이다. 


어쩌면 진짜 6부가 아닐지도, 라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도 공식 대회가 없어서 무늬만 6부지 진짜는 4부 정도 될지 모른다. 실제는 4부면서 공식 6부라고 떠벌리며 가당치 않은 핸디를 받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겸손했다. 멀리서 우러러보던 우리(영삼 형과 나)에게 다가와 한 게임 어떠냐며 청한다. 나는 말했다.


"제가 너무 초보라서 재미없으실 거예요."


아아~ 나의 무척이나 겸손한 표현. 그것은 완고한 거절의 표시다. 그러나 그는 왜 그러냐며 자신은 6부, 너희는 7부지 않느냐, 우리는 고작 1부수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니 얼마든지 게임할 수 있다. 핸디 2점을 주지 않느냐, 라는 눈빛으로 저기 맞은편에 서라고 한다. 안경 속 눈빛이 반짝거린다. 상대를 존중하면서도 뭔가 스마트한 느낌. 나는 얼결에 그와 게임했다. 탁구는 멘털 게임. 멘털부터 지면 게임에서 본디 실력의 반에 반도 나오지 않기 마련. 나는 그에게 연거푸 삼대 빵으로 졌다. 역시 대단하신 분. 나는 6부에게 약해. 그를 볼 때마다 6부라는 부수가 높아만 보였다. 




그런 교빈 형과 어젯밤 게임했다. 

나의 영원한 라이벌 영삼 형과 함께 3파전. 먼저 영삼 형이 그에게 3대 2 스코어로 졌다. 이어서 바통 터치. 나와 교빈 형이 붙었다. 어쩌다 보니 박빙의 승부, 내가 3대 2로 이겼다. 이럴 수가? 짜릿했다. 그리고 영삼 형과 교빈 형의 리턴 매치. 이번에는 영삼 형이 3대 2로 이겼다. 뿌듯했다. 모두 잔뜩 땀 흘린 상태. 우리는 휴게실에 가 음료수를 마셨다. 통성명을 했다. 늘 얻어마시던 교빈 형이 지폐를 꺼냈다. 이제 막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시면서 그가 말했다.


"제가 고수들에게 핸디 받고 하는 게임은 다 이기는데 두 분한테만 져요."


그 말은 7부 영삼 형과 내게만 열세라는 뜻이다. 그냥 하는 말이겠지만 일단 기분 좋았다. 절반에 절반 정도는 진심이겠지. 누군가에게 위협적이 될 수 있다는 거. 늘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우리가 공식 6부에게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 아닌가. 안 그래도 요 며칠 교빈 형과 3파전을 벌일 때 곧잘 이기곤 했다.


그래서 기록해본다. 어떻게 이겼는지. 기억해두어야 한다. 교빈 형의 서브는 크게 네 종류가 있다. 

1 백으로 강하게 쏘는 공(하회전 10%와 70%가 번갈아 온다) 

2 횡회전과 하회전 섞인 롱

3 하회전 짧은 공

4 오른쪽 포핸드 기습적인 공

 

나는 리시브를 준비하며 라켓을 가슴팍에 올리고 생각한다. 따닥 박자로 커트와 백드라이브(거의 쇼트다). 이것은 미리 생각해야 나갈 수 있는 리시브다. 짧게 오면 빠른 박자에 화 커트를 대고 백으로 강하게 쏘는 공이 오면 백드라이브로 넘긴다. 여기에 변칙 횡회전과 하회전 롱이 오면 백스윙을 밑에서부터 길게 가져가 얇게 묻혀 넘긴다. 그리고 만에 하나 오른쪽 끝 라인을 따라 기습 서브가 올 것도 염두에 둔다. 

여기에 나만의 비기. 승부수를 걸어야 할 때 한방 드라이브를 건다. 나는 이렇게 그의 네 종류 서브에 다섯 가지 리시브를 준비한다. 


교빈 형은 나의 너클 서브에 약하다. 너클은 라켓면을 평행하게 눕힌 채 그대로 공 아랫면을 칼로 자르듯 파고들며 날아간다. 그러다 보니 어떨 때는 너클, 어떨 때는 하회전이 걸린다. 그것을 길이 조절해가며 넣어준다. 그것이 커트로 넘어오면 무조건 드라이브를 건다. 커트를 커트로 넘기면 이미 패한 것. 그리 생각해야 이긴다. 


교빈 형의 특기. 쇼트 랠리 중 강하게 팍! 쏘는 백 푸시가 있다. 이건 너무 강하게 와서 방향을 놓치면 그대로 점수를 헌납하게 된다. 정면에서 받는다 하더라도 순간 놀라서 힘주면 공이 강하게 넘어가 라인 아웃이 된다. 받을 때 순간적으로 힘을 떨어뜨려야 상대편 탁구대 안에 떨어진다. 엉겁결에 받더라도 라켓 각을 숙이든 힘을 빼든 해야 한다.   


그리고 교빈 형의 특기 하나 더. 이른바 얇은 드라이브다. 공을 앞에 받쳐놓고 자세를 한껏 낮춰 올려치는 타법이다. 회전을 잔뜩 먹여 보낸다. 때리는 동작에 비해 공이 다소 느린 속도로 오는데, 사람 심리상 일단 때리는 큰 동작에 당황하느라 날아오는 공 대처를 잘 못하게 된다. 따라서 미리 학습해둬야 한다. 얇은 드라이브니까 위에서 눌러줘야 해. 아니면 똑같이 맞드라이브로 대응해야 한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가 드라이브 동작에 들어갈 때마다 따닥 때리자 따닥 때리자 따닥 때리자고 암시 건다. 멍하게 서 있다가 홈런 치지 말고 똑같이 자세 낮춰 걸어야 해. 그것도 임팩트 줘서 찰싹 때려야 한다. 상대의 회전을 이겨내 반대 회전을 준다. 


교빈 형에게 통하는 기술. 의도한 건 아니지만 요즘 나의 백 쇼트가 빛을 발한다. 눌러주는 쇼트인데 네트에 처박거나 올리려다 라인 아웃 범실을 유도한다. 한 가지 명심할 건 눌러주는 쇼트지만 눌러준다고 생각하고 치면 안 된다. 그냥 강하게 친다는 생각만 해야 한다. 눌러준다는 생각이 들어가면 스윙은 직선이 아니라 하회전을 주는 커트처럼 아래로 향하게 되는데 이때 공은 외려 붕 뜨게 된다. 때문에 대각선을 따라 강하게 친다는 생각만 한다. 그러면 상대가 알아서 걸리거나 올려치게 된다. 여기서 교빈 형의 실수가 적잖이 생겨났다. 여기에 방향을 트는 쇼트까지. 


교빈 형을 이기고 연이어 영삼 형과의 일전에서도 승리했다. 영삼 형이 처음과 달리 중간에 몸이 풀리는 바람에 마치 슈퍼맨처럼 훨훨 날아다녔지만 그럼에도 내가 이겼다. 하루는 지고 하루는 이기는 관계. 라이벌과의 일전은 늘 긴장감이 맴돌아 즐겁다. 승리하면 쾌감이 몇 배나 증폭된다.


우리는 2탁에서 쳤다. 2탁은 고수들만 친다는 메인 탁구대다. 뒤에 휴게실과 벤치에서 수많은 관객이 지켜보는 탁구대 2탁. 누가 잘하고 누가 모자란 지 평가받는 곳. 으쓱한 기분. 우리가 비록 6, 7부지만 고수 못지않은 고급 플레이를 한다면 2탁에서 쳐도 되지 않겠느냐 하는 자신감. 이 정도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긍지. 거기서 나는 좌우로 뛰어다니며 연승의 쾌감을 맛봤다. 그것도 벅찬 라이벌들에게서. 


잊어먹지 않기 위해 지금 여기다 급히 탁구 일기를 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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