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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Jul 19. 2021

고수와의 대결 그 힘겨운 부담

이상하게 쉬운 상대만 찾게 된다



만만한 상대 누가 있으랴.


탁구장 문 열고 들어설 때 순간 테이블마다 누가 누구랑 치는지 살핀다. 저분이 나왔구나. 성준 형. 오랜만에 나오셨네. 아아 나 성준 형 서브 못 받는데. 서브가 너무 어려워. 일단 리시브가 되어야 게임하지. 피하자. 으잉? 못 보던 얼굴인데 누구지? 아는 얼굴은 없나? 그렇게 어느 테이블이 나을지 본다. 선뜻 이길 수 있는 상대만 찾는다. 이런 심리는 나만 그런 것일까. 간혹 고수만 찾아다니며 도전하는 이가 있는데 난 그게 그리 부러울 수가 없다.(교빈 형 같은 사람) 무섭다. 한점도 못 내고 질까 봐. 무시당할까 봐 겁난다. 혹은 재미가 없을까 싶어 주저하기도. 용기가 없어서 쉽사리 도전하지 못하는 이놈의 심리. 풀어보자면 이길 때만 즐겁고 지면 전혀 즐겁지가 않다는 마음. 그냥 이기적인 마음이다. 탁구장에서는 시시각각 승패가 갈린다. 누군가 승을 가져가면 그만큼 누군가 패를 가져가야 한다. 나는 승만 챙기려는 쪽이고 패는 외면 하고픈 쪽이다. 쉽고 단순한 진리. 패가 많아야 실력이 상승할 텐데. 그걸 알면서도 패가 유력한 상대를 고려하지 않는다. 근처에 가지도 않는다. 행여 고수가 먼저 한 게임 하실래요? 라고 청할까 봐 지레 귀 막고 고개 돌리고 눈길을 피한다. 


한 번은 2부 핌플 치는 남자가 다가와서 "한 게임 하실까요?" 라며 접근한 적이 있다. 젠장 걸렸구나. 아까부터 쳐다보더라니. 시선을 잘 피했건만. 하얀 얼굴로 해맑게 웃는 남자. 고수라는 타이틀이 밑바탕에 깔려서인지 어떤 제스처를 취해도 마냥 두렵게만 보인다. 가냘픈 몸매의 2부 뽕 남자. 2부라는 것만 해도 버거운데 거기다 뽕이라니. (돌출 핌플 아웃 러버를 일명 뽕이라고 부른다) 게임할 때마다 "뒷면이 뽕입니다"라고 말하는 남자. 알고 싶지 않다. 뒷면이 뽕이든 똥이든. 제발 뽕뽕 그러지 좀 마. 그렇게 말해봤자 어느 면으로 치는지 살펴볼 여유도 없다고, 라며 응답해주고 싶은 욕구. 가령 내가 커트를 보냈으니 민 볼이 돌아올 타이밍인데 상대가 커트를 댔으니 커트로 돌아올까 아니면 민 볼이 올까. 머리가 복잡해진다. 계산하기 싫어. 그저 게임이여 어서 끝나라 하고 건성으로 칠 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곧장 3대 0으로 진다. 한 세트도 이기지 못한다. 찍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진다. 이른바 삼빵. 누가 누구에게 삼빵 당했대. 정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난 이겼는데. 나한테 이기는 그가 왜 그리 허무하게 졌대? 그래 걔는 괜찮대? 삼빵 당하면 멘털이 정말 나갔을 텐데. 컨디션이 안 좋은가. 으레 그런 말들을 듣게 된다. 땀 뻘뻘 흘리며 승부하는데 이른바 삼빵을 당하게 되면 맥이 탁 풀린다. 게임이 끝나고 악수하는데 웃어도 웃어지지 않는다. 짜증이 나는데 짜증 난 티를 내지 못한다. 무력감도 생긴다. 내가 이것밖에 안되나. 정말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런가.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어제와 별반 다른 점도 없는데. 이것이 현실. 이것이 드러난 맨얼굴의 모습. 나는 숨기고 있던 흉터를 적나라하게 들킨 것만 같아서 부끄러워한다. 심판에게도 부끄럽고 그동안 나와 맞수를 자처했던 이들에게도 부끄럽고 내게 패했던 상대들에게도 부끄럽다. 


고수와 게임할 때는 당연 핸디를 받고 시작한다. 핸디를 받고 함에도 삼빵을 당하면 고수에게도 미안해진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하는데 나는 꿈틀 한번 하지 못하고 무너졌노라. 꿈틀 한번 하지 못했으니 고수의 귀한 시간과 품을 빼앗은 것 같아 미안하다. 조금이라도 꿈틀거려서 무언가 찌릿한 떨리는 긴장감을 전해주어야 하는데 게임 내내 그런 걸 주지 못해 미안하다. 고수에게는 건성으로 쳐도 이긴다는 느낌을 주어 미안하고 다음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며 숙연해진다. 자신에게 미안하다. 그동안 탁구 친 시간은 뭐니? 흘린 땀은? 뭐가 잘못된 거니? 모욕적이다. 나는 왜 모욕적이라는 말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일까. 




우리 구장에는 특 1부, 1부, 2부, 3부 초고수들이 있다. 그들과는 핸디를 최대치로 받고서 게임한다. 나름 먹히는 공격도 있어서 게임에 별 부담은 없다. 지는 게 당연한 부수들이다. 그러나 4부부터가 문제다. 4, 5부에게는 쉽게 지면 안 된다. 경쟁하는 이들이 많다. 의식하는 이들도 많다. 4, 5부를 꺾어라, 가 당면한 과제다. 

4부 중 천적처럼 나를 괴롭히는 이들이 몇 있다. 실력이 초고수는 아니지만 공의 오가는 합이 맞지 않아서 이상하게 꼬이는 상대가 있다. 예컨대 그가 번번이 지는 상대를 내가 이기지만 그와 내가 붙으면 여지없이 내가 깨지는 상대. 물고 물린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가 힘들어하는 상대를 나는 쉽게 이기는데 막상 그와 붙는 나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성준 형 같은 사람. 성준 형은 탁구를 오래 쳤다. 오래 쳐서 공에 대한 감각이 탁월하다. 그러나 지금껏 탁구대회에 나가본 적이 없어서 아직 공식 7부다. 공식 7부지만 구장에서는 비공식 4부다. 얼마 전까지 5부로 치다가 구장 5부들이 상대가 되지 않아 원성이 높아져 관장님으로부터 4부로 치라는 명을 받았다. 내가 볼 때 4부로 놓고 치지만 실력면에서 어쩌면 더 높을지도 모른다. 차분하게 치는 특성 때문이다. 급하게 덤비지 않는다. 일구일구 공의 특성을 알고서 친다. 편하게 천천히 친다. 그게 얼마나 부담스러운지는 맞은편에 서보면 안다. 


먼저 서브가 일품이다. 성준 형의 서브는 날카롭다. 같은 폼으로 커트와 너클이 번갈아 온다. 커트의 커트량도 상당하다. 커트인가 싶어 찍으면 공이 높이 떠오르고 너클인가 싶어 받으면 여지없이 네트에 박는다. 공이 천천히 온다. 천천히 바운드되어 떠오른다. 이게 커트일까, 너클일까 알 수가 없다. 임팩트를 넣었나 안 넣었나 판별할 수 없다. 서브를 받지 못하니 이길 수가 없다. 한 세트도 이기지 못하고 여지없이 삼빵. 오랜만에 게임하는 사이.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도 이것밖에 안되나 하는 저책. 아직도 그대로네 하는 상대의 눈빛. 안 그런 척 해도 전해지는 무시. 김 빠짐. 뒤따르는 실망. 그런 게 두려워 나는 이기지 못하는 상대를 기피한다.




같은 부수 중에도 그런 이가 있다. 영삼 형이다. 어쩔 때는 비슷하거나 이기는 날도 많은데 어쩔 때는 처참하게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깨질 때가 있다. 어제도 그랬다. 우리는 평소 라이벌이지만 과거에는 내가 이기는 날이 더 많았다. 어제도 쉽게 생각하고 탁구대 앞에 섰다. 예전과 비슷한 영삼 형의 서브. 백으로 길게 왔다. 나는 돌아서서 걸려다가 생각보다 더 빠르고 커트량이 적어 어정쩡 넘겨주는 리시브를 했다. 그러자 영삼 형은 냅다 3구 드라이브와 스매싱을 날려왔다. 나는 받지 못하고 점수 헌납. 그리고 내가 서브할 때 형은 전부 한 박자 늦게 코너를 공략했다. 코너를 공략당하니 나는 3구 공격을 못하고 수비하기에 급급했다. 자꾸 타이밍을 놓쳤다. 형의 드라이브에도 카운터는커녕 끝까지 버텨서 받아내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게임 내내 형은 공격했고 나는 당하기만 했다. 이렇게 깨끗이 당한 적이 얼마만이던가. 나는 참담하여 한 게임 더 청했고 다음 게임은 세트 스코어 2대 2에서 마지막 세트 듀스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하고 말았다. 2 연속 패. 게임이 끝나고 영삼 형이 말해줬다. 내 스타일이 좀 변한 거 같재? 네 변한 거 같아요. 서브에 커트를 빼고 보냈지. 아뿔싸 그랬구나. 나는 평소처럼 커트 서브를 밑에서 루프로 걸려다가 자꾸 박자가 안 맞았는데 그래서 그랬구나. 커트를 뺐으니 결대로 받아쳤다면 좋았을 텐데. 순간 깨달았다. 리시브 시 익숙한 상대의 라켓면을 보지 않았다는 거. 그냥 그 서브겠지 했던 게 패인. 상대가 임팩트를 줘 커트를 넣는지 너클인지 회전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오늘도 리시브를 위해 자세 낮춘다. 낮춰 더 낮춰. 서브하는 순간 놓치지 마. 온다. 포핸드 따닥 박자로 찍어야 해. 휙 다가가 최대한 얼굴 가까이서 커트를 한다. 온다. 흘러내린다. 원바운드 공이다. 기다려. 아직 아니야. 됐다. 지금이다. 길게 백스윙 시작 해. 살짝 회전을 건다. 완벽하지 않아. 3구 공격에 대비 해. 물러나. 


오늘도 괜찮은 상대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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