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화채

진주시 봉곡동 오죽광장

by 머피



수박.jpg 수박화채 먹는 꼬마




초등학생 시절이었다.

여름날 저녁. 뜻밖의 이벤트. 커다란 스테인리스 대야 가득 함성이 절로 나오는... 와~~! 차라리 예술이었다. 처음 본 화채. 이름은 수박화채지만 어쩌면 수박보다 다른 부속물들이 더 많은지도 모를 작품. 부속물들은 물에 동동 떠 있었다. 물은 물이 아니라 우유와 사이다였다. 우유와 사이다에 동동 떠 있는 부속물. 부속물은 어떤 것일까? 후르츠 칵테일, 바나나, 각얼음, 방울토마토, 오이, 사과,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야채류. 모두 색이 선명하니 저마다 개성을 내뿜고 있지만 그네들이 어울려 하나가 된 모양새. 그것이 바로 수박화채. 주인공은 수박이었다. 이게 바로 화채구나? 것도 수박화채. 가만히 보니 그것은 은은히 수려하다 못해 번쩍번쩍 화려했다. 사이다의 탄산 방울이 찬찬히 부서지는 소리. 우유빛깔 속 부속물들이 수박에게 지지 않으려고 떠다니는 움직임. 나 좀 먹어줘요. 내가 더 맛나요. 마치 축제 때 음악분수처럼 보고 듣는 즐거움이 있었다. 꼬마는 눈이 동그래져서 숟가락을 들었다. 미용실 가족뿐만이 아니라 옆집 다방 이모들, 주인집 가족이 함께였다. 많은 이들이 아빠가 만든 음식을 먹는다. 자 먹자! 라는 아빠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동생과 꼬마는 숟가락으로 마구 퍼먹었다. 내가 먼저 먹어야지. 더 맛난 거부터 먹어야지. 스테인리스 그릇은 깊고 넓어서 마치 태평양 같았다. 바다가 깊고 까마득하여 중간에 건더기를 건지라면 집중해야 했다. 허우적허우적 우유와 사이다만 퍼먹기 일쑤. 핵심 건더기를 건져야 한다. 꼬마는 정신없이 수박을 건져 먹으려다 다른 부속물까지 같이 먹게 되었고 어쩌다 같이 먹는 즐거움을 깨닫게 되었다. 골고루 먹어야지. 수박만 먹고 싶지만 골고루 먹어야 한다는 말과 숟가락에 더불어 떠지는 부속물만 살짝 다시 담글 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같이 먹었다. 수박과 오이가 같이 씹히는 맛이란? 이상한 거 같은데 나쁘지 않아. 우유와 사이다가 달달함을 보충하여 나중에는 무얼 먹더라도 같은 맛이 나게 되었다. 꼬마는 생각했다. 이건 다 우유다. 아니 사이다 맛이다. 바다의 맛이다. 여름의 맛이다. 그리고 시원한 맛이다. 아빠의 맛이다. 가족의 맛이다. 정겨운 맛이다. 이건 다 맛있다. 아빠의 작품이었다. 냉장고 앞에서 도마 위 칼질로 뚝딱뚝딱 만들었다. 잠깐만 기다리거라. 뭔가가 만들어진다. 앞집 옆집 사람들도 부르거라. 아빠가 만들어준다. 기대하거라. 엄마가 옆에서 웃는다. 뭔가 즐거움 가득한 것이 만들어지는구나. 꼬마는 두근거렸다. 즐거웠다. 동생도 신나 지켜보았다. 커다란 선물이 곧 올 거야. 수박화채를 보고서 와~~ 소리치는 꼬마와 동생. 맛나겠다~~ 함성과 함께 손뼉 치던 순간. 그런 꼬마와 동생의 얼굴을 보고서 미소 짓던 아빠와 엄마. 벅찬 눈으로 들여다보던 화채의 색상. 봐도 봐도 신기한 조합. 얼음과 다른 부속물을 헤치고서 수박을 건져 먹으려던 노력. 애쓰지 마. 무얼 먹더라도 맛있어. 숟가락에 뭐가 얹혀도 괜찮아지던 시간. 그런 수박화채는 단 한 번이었다.




20220728_191712.jpg 월영교를 걷는 아버지




지난 목요일 안동에 다녀왔다.

아버지를 뵙고서 같이 저녁을 먹었다. 간고등어랑 찜닭을 시켰다. 월영 달빛 야행이라는 축제장 바로 앞이었다. 안동댐 주변은 사람과 차로 붐볐다. 어디 한번 먹어볼까? 아버지는 찜닭 접시 위 감자 하나를 집었다. 그러고선 내내 간고등어만 드셨다. 식사를 마치고 축제장 속으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맨 앞에 앞장서고 나와 아내 딸아이가 뒤따랐다. 가다가 월영교 위에서 사진을 찍었다. 아버지를 보는데 눈매가 낯설다. 눈꺼풀, 눈매가 변했다. 나는 놀랐다. 이제 다시는 수박화채 만들어주던 아빠를 볼 수 없구나. 아빠가 아버지로 그리고 이제 할아버지가 되었다. 아빠가 만들어주던 수박화채를 먹어본 적이 오래되었다.


나는 어느 시점부턴가 수박을 사면, 채 썰던 아빠처럼 작게 조각내어 큰 그릇에 나누어 담는다. 그것을 먹기 좋게 접시에 담아 포크와 함께 내놓는다. 차이가 있다면 수박 외 다른 부속물들이 없다. 그리고 우유와 사이다도 없다. 우유와 사이다와 부속물들이 없어서 수박만 온전히 집어먹어 먹기 편한데 아무렴 예전 수박화채 부속물보다 맛이 없다. 그간 수없이 수박화채를 먹으면서도 오래전 그 맛을 만나지 못한다. 아빠가 만들어주지 않는 한 만나지 못할 테다. 화채를 먹을 때마다 수박을 먹을 때마다 꼬마 시절 그 맛을 떠올려본다.



20220728_195903_HDR.jpg 안동댐에서 보는 월영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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