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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Sep 23. 2022

분명히 어디선가 봤는데?  

병수 형과의 게임





커트를 먹여야 해.


이때껏 커트가 먹히지 않았어도 지금은 부디 제발 꼭 커트가 걸려야 해. 나는 라켓을 평평히 눕혀서 짧게 톡 끊어 커트 서브를 보낸다. 그간 지독히도 커트가 걸리지 않았다. 평평히 눕혔는데 평평하지가 않은가 보다. 평평한지 안 평평한지 서브 넣는 순간을 옆에서 보고 싶을 정도다. 간절히 속삭인다. 제발 짧게 가, 하고 공을 바라보지만 공은 야속하게도 쭉쭉 길게 원바운드 성을 띠며 탁구대 끝을 살짝 넘으려 한다. 그것을 병수 형은 놓치지 않고 루프 드라이브를 걸어 길게 나의 백핸드 쪽으로 보낸다. 병수 형의 루프는 잠시간 기다렸다가 저 밑에서부터 부우웅 올라오는 스윙, 즉 라켓이 공을 때리지 않고 날름! 혀 내밀어 핥고 지나가는 타법이다. 어쩌면 스친다고도 할 수 있다. 네 놈 이름이 뭐냐? 이름? 나무로 만들어진 라켓, 그 위에 고무를 통칭하여 러버라 부르긴 하는데. 근데 이름은 왜?


러버의 침이 잔뜩 묻어서 화난 공이, 아쭈! 방금 내 얼굴에 침 묻혔어, 누구야? 죽었어! 가만 안 둬! 이름이 뭐냐니까? 라면서 지나간 라켓을 잡으려고 뒤늦게 달려가는 회전 볼. 그래서 지극히 느린 아리랑 드라이브, 이름하여 루프 드라이브다. 병수 형이 2구 리시브를 이리도 과감히 루프로 거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나의 3구 끝내기 드라이브를 봉쇄하기 위함이다. 눈치챘구나. 살쾡이처럼 야비한 형. 촉도 예리한 형. (실제 형은 착한 사람이다, 게임 중 전술적인 상대를 지칭) 형이 나의 백사이드로 리시브한 이유는 두 가지다. 나의 3구 결정타를 막는 것이 먼저고 또 하나는 내가 어떻게 처리하는지 시험하기 위해서다. 이제 나의 대응 하나가 형의 게임 운영에 결정적 자료를 제공하게 될 터. 내가 미스하거나 당황하면 형은 계속해서 루프 드라이브를 보낼 것이다. 


나쁜 사람. 비열한 형. (형은 진짜 착하다.) 동생의 아픈 부위를 감싸주지는 못할망정, 젠장, 안타깝게도 나는 루프에 약하다. 대뜸 어설프게나마 갖다 대는데 공은 영락없이 붕 떠올라 아웃된다. 한번 꼬이면 자꾸 꼬인다. 형도 어느새 루프 드라이브 마니아가 됐구나. 루프 드라이브는 상회전을 잔뜩 먹어서 포물선을 높이 그리며 날아온다. 현미경으로 자세히 보면 초당 수천 번은 돌고 있겠지? 겉으로 보기엔 그저 두둥실 천천히 날아오는 공인데. 그 공이 탁구대에 닿으면 즉각 위력이 발휘된다. 닿자마자 공은 휘리릭 낮고 빠르게 튀어온다. 병수 형은 자신의 러버에 화난 공을 


"예끼, 이 놈아, 나 말고 저쪽 물어라"


하면서 성난 멧돼지 몰듯 머리 방향을 내게로 돌려버린다. 멧돼지의 주둥이가 내게로 향하니 놈과 나의 시선이 마주친다. 그러자 멧돼지는 자신에게 침 묻힌 상대가, 엉뚱하게도 맞은편에 서 있는 내가 그런 줄 알고 앞발을 팍팍 구른다. 바보야, 나 아니야, 라고 손사래를 쳐도 내게로 덤벼든다. 어이쿠, 나 아니라니까, 이 놈 멧돼지처럼 달려드는 공. 천천히 날아오던 게 생각보다 더 빠르게 튀어오면 가뜩이나 당황스러운데, 이미 병수 형의 침 묻혀 핥고 튀는 타법에 거듭 놀라는 중이다. 이 놈 멧돼지가 달려오는 촉감은 어떨까, 하며 꺼림칙하게 라켓을 갖다 댄다. 갖다 댈 때의 심정이란, 마냥 두렵다. 착하게 톡 맞고 잘 넘어갈까? 에이, 그래도 멧돼지인데, 천방지축 어떻게 변할까? 조마조마,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면 어김없이 걸렸구나 하고 공은 붕~ 홈런이 된다. 멧돼지는 제놈이 달려온 속도를 못 이기고 라켓에 부닥치고는 꺄울, 하늘 높이 두둥실 떠 버린다. 


한 번은 멧돼지인 줄 알고 힘줘서 블록 하니, 루프 걸린 공이 말한다. 어머? 감히 내 몸을 만져요? 엄마야, 어딜 훔쳐보세요! 하고 내 뺨을 때려버린다. 그러곤 저 혼자 오버 아웃. 이번엔 새침데기 아가씨냐? 정신이 혼미하다. 사실 엉덩이를 퉁 때려주기는 했는데, 감촉이 탱글탱글하더라고. 나는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방금 전 그 느낌을 상기해본다. 어떻게 받아야 하나?


루프 드라이브. 이것은 머리로 알아도 막상 손으로 대응하기 힘든 습성을 가져서, 느리게 오는 볼을 빠른 박자로 처리하기란, 습관이나 훈련이 뒤따르지 않는 한 막기 힘든 특성이 있다. 길고 빠른 스윙에 비해 뒤늦게, 한참 시간이 지나서, 내 얼굴에 침 묻혔어? 하고 멧돼지로 변해 날아오는 공. 건드리면 어딜 만져요? 하면서 날아가버리는 아가씨. 잔뜩 뿔이 난 공. 병수 형은 계속해서 루프 드라이브만 고집한다. 포물선이 낮은 건 멧돼지, 포물선이 높은 건 아가씨다. 나는 부글부글 화딱지만 난다. 나는 중년의 아저씨라서 요즘의 새침데기 아가씨를 어찌 달래야 할지 모른다. 그저 살살 어루만지고 싶은데. 




병수 형과 나는 탁구장 맞수다. 

그리고 오랜 지인이다. 오래전에 알았다가 작년에 탁구장에서 우연히 재회했다. 재회 순간 얼마간 그를 몰라보았는데.


"여기, 이 분이랑 한번 쳐 보세요."


처음에는 처음 보는 사이로 관장님이 게임을 주선했다. 나는 병수 형을 보면서 느낌이 어딘가 익숙하다, 생각만 하고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병수 형도 안경 속 눈동자를 굴리며 힐끔거렸다. 어디서 봤더라? 혹시 빚쟁이인가? 서로가 서로를 의심했다. 달아나야 하나? 그러다 병수 형이 드라이브를 날렸다. 루프였다. 아가씨는 머리를 굴리는 내게, 엄마야! 어딜 만져요? 미쳤나 봐! 하고 슈웅 멀리 달아났다. 멀리 굴러간 공을 주워오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이 아가씨는 누구야? 왜 갑자기 탁구채에서 튕겨 나오고 그래? 어머! 여자도 다룰 줄 모르는 주제에 누가 누구한테 큰소리래요? 기가 막혀! 그 말에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분명, 어디선가 봤는데"


하니 병수 형이 말했다.


"혹시 철이 친구 아닌가?"


철이라니? 아, 그래, 나는 철이 친구구나. 맞습니다. 맞다고 했다. 철이 친구. 십수 년 전 시립 도서관에서 우르르 어울리던 사이. 형과 나 사이엔 철이가 있었다. 고개 들어 찬찬히 형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십수 년 만에 만난 우리는 서로를 즉각 알아보지 못했다. 많이 변했구나. 흰머리가 쏭쏭 늘었고 배가 볼록 나왔다. 얼굴이 까매지고 인상이 딱딱해졌다. 청년에서 중년으로의 변화. 다만 눈빛은 전보다 더 반짝거렸다. 살아온 환경이 달라 병수 형이 병수 형임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탁구 치면서 1세트가 끝나도록 몰랐다. 병수 형은 지금 어디 어디 계장님이라 했다. 계장님이라니. 출세했구나. 국어 한 과목의 성적이 도통 나오지 않아 몇 년 연속 낙방하던 그 형이 계장님이라니. 젊은 나이에 벌써? 도서관 쉬는 날 운동장에서 뒤엉키며 함께 족구 하던 그 사람이 맞나 싶었다. 시험이 끝난 날, 투다리에서 허물없이 함께 술 마시던 사람이 맞나 싶었다. 나는 국어가 정말 싫어, 세상에서 제일 어려워, 국어를 제발 없애 줘! 하던 바로 그 형. 영어는 단어를 하나하나 외우면 어느 정도 성적이 나오지만, 국어는 아니라고 했던 형. 국어는 낱말에서 끝나지 않고 문장으로 응용이 되기 때문에 특유의 언어 감각이 있어야 풀 수 있는 거라고 했다. 웃긴 건, 형의 그 말을 듣기 전에 나는 국어를 잘했고 영어를 어려워했는데, 어느 순간 국어와 영어 둘 다 어려워하기에 이르렀다. 이상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게 무슨 감이 필요해? 하고 국어 문제를 하나하나 파고들었던 부작용이 아닌가 싶다. 


낡은 가방을 메고 아침 6시 30분, 비켜 인마! 도서관 자리를 선점하려고 복도 옆에서 나란히 달리던 그 형이 맞아? 점심 먹고 나른한 오후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종이컵 2개를 한데 오므려 컵차기를 하던 그 형이 맞다고? 저녁 먹고 해질 때까지 (그놈의 승부욕 때문에) 100개 채우고 들어가자며 둥그렇게 서서 컵차기에 목숨 걸던 바로 그 병수 형? 때문에 피곤해서 저녁 내내 도서관에서 자던 그 형? 우린 거의 동시에 말했다.


"왜 이렇게 많이 늙었냐?" 


"왜케 많이 늙었어요?"


관장님에 의해, 우리는 게임 맞수가 되었고 지금 이 순간 게임에 음료수 내기를 걸었다. 수준이 비슷하다는 진단 때문이었다. 기왕 오래간만에 만난 거니 기념으로 여기 지켜보는 이들 전부에게 음료수를 쏘라고 했다. 그게 왜 기념이 된다는 거지요? 라고 따지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래, 오랜만에 만나서 기분이 좋네요, 그렇지만 일단 게임은 이기고 봐야 하지 않겠어요? 이길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형이나 나나 태초부터 승부욕이 강했는데 특히 대나무가 무성했던 곳, 젊은 날 시립도서관 출신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숙여 숙이자 숙여 제발 숙여서 밀어.


나는 입으로 주문을 왼다. 그러나 너무 숙여서 그럴까. 공이 네트에 박힌다. 긁어 긁자 제발 긁어서 밀어. 그러나 너무 늦게 긁어서 그럴까. 공은 다시 네트에 걸리거나 오버 아웃이 된다. 오냐, 좋다. 시험하고 안되면 바꾸고 재차 시험해야 한다. 나는 중진으로 물러나 공을 받기로 한다. 바운드되고 회전이 풀릴 타이밍에 공을 받으니 다행히 전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어느덧 중진 플레이어가 된 나. 신나게 이쪽저쪽 코너웍을 한다. 아이고 숨차다. 스코어는 오락가락.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한 땀 한 땀, 집중에 집중. 자네, 일을 이렇게 열심히 해 보지?  


공이 라켓에 닿기 전 백스윙은 얼마나? 타구 할 때 팔로스윙은 어디까지? 각도가 맞나? 힘은 적당히. 조심조심 움직였다. 사람들은 우리 플레이에 고개가 좌우로 왔다 갔다 한다. 우와, 야아, 대단하네, 잘했다, 그건 밀어야지. 회전이 걸린 건데. 라켓면을 세워야지. 별의별 탄식과 감탄과 훈수가 난무한다. 음료수 내기가 걸려서 사투가 벌어지는 곳. 여기는 시나브로 정다운 탁구장이다.


병수 형이 별안간 서브 패턴을 바꾼다. 

계속 백핸드 쪽 짧은 커트 서브를 넣더니 갑자기 포핸드 쪽 라인 끝으로 빠르게 보낸다. 탁구대를 기준으로 여느 때처럼 내가 왼쪽 끝에서 기다리는데 뜬금 오른쪽 끝으로 보내는 거다. 병수 형이 벼락같이 꼬마 아이를 내보냈다. 나는 여염집 규수가 쑥스러운 듯 사부작사부작 나올 것을 기다렸지만 웬걸 조그만 아이가 쪼르르 달려 나왔다. 황급히 몸을 날려 라켓을 갖다 대지만 늦었다. 아이가 탁구대 밖으로 뛰어내려 달아나버렸다. 잡지 못했다. 오른쪽 무릎이 시큰거린다. 승리에 굶주린 야수. 형은 인정도 없소? 나는 인정을 생각하며 공을 줍는다. (형이 진짜 착한 걸까?)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번엔 내가 서브 넣을 차례. 나는 형의 백핸드 쪽을 주시한다. 어랏? 그쪽에 돈이 떨어졌어요. 어쩌면 오만 원짜리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먼저 줍지 않으면 내가 뺏는다? 오잉, 돈이 아닌가? 그쪽에 먼지가 묻었나 유심히 바라본다. 먼지가 있으면 불규칙 바운드가 생길지도? 어서 먼지를 털어주세요. 나는 오롯이 그쪽 백핸드에만 관심 있어요, 하고 관심법을 보낸다. 텔레파시를 보낸다. 그러다 냅다 반대쪽, 형의 포핸드 라인으로 빠른 서브를 보낸다. 형은 백핸드에서 돌아설 것만 준비하다가 황망히 공을 떠나보낸다. 그리고는 내 얼굴을 본다. 너 이시키! 이 놈! 그 맘도 모르고 나는 말한다. 형! 우리 서로 얼굴 정말 오랜만에 본다. 그렇지? 형이 먼저 시작한 전쟁이야. 나 사실 사파 탁구인이야. 탁구장에 오기 전부터 탁구 좀 쳤어. 몰랐어? 비록 요즘에 정파 레슨을 받느라 한동안 비기를 써먹은 지 오래되었지만 다 버린 건 아니거든. 


나는 몸통 안쪽에서 나오는 코믹 스윙으로 라켓면을 대각선으로 휘두른다. 이른바 사파 회전을 먹인다. 이런 회전은 처음이죠? 하며 형을 보는데 형은 공이 떠오르기도 전에 따닥 박자로 휘두른다. 공이 변화를 일으키기도 전에, 공은 스매싱을 먹어 찰싹 내 배꼽을 관통한다. 사파 회전을 막다니? 그동안 낮잡아 봤네요. 오랜 세월, 당신도 그렇겠지만, 거친 야생에서 익힌 구력을 모두 구사해 주겠어요. 기를 모은다. 나는 보다 자세를 낮춰 게임에 임한다. 불안한 기운이 스멀스멀. 어쩌면 질지도 몰라. 열심히 하자, 고 다짐한다. 


형의 너클 볼 서브를 커트로 속아 커트에 맞는 퍼올리기 타법을 구사했다. 그랬더니 공은 붕 떠올라 탁구대 너머 멀리도 날아간다. 져서 속 쓰린데 형은 공 주으러 갈 생각도 없이 나를 보며 외친다. 아즈아! 하고 고함까지 지른다. 그것도 한쪽 팔을 내밀어 주먹을 쥐면서. 형이 전에도 장난기 그득한 스타일인 건 알고 있었지만, 형의 함성이 탁구장을 쩌렁쩌렁 울린다. 형은 공이 어디로 굴러갔는지 관심도 없다.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파이팅을 외친다. 우히히! 게임이 끝난 것처럼 웃는다. 즐겁구나, 형. 나는 형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형이 내가 반가워서 그러는걸 거야. 탁구는 멘털 게임. 형은 하리모토의 고함소리 전술을 들고 나왔다. 단 하나의 포인트에도 귀청이 찢어져라 소리치는 작전. 겨우 한 점 얻었을 뿐인데. 마치 게임이 벌써 끝나고 우승한 것처럼 우렁찬 고함소리. 상대방의 평온을 흐트러뜨리는 비음. 나는 그저 어서 빨리 공 주워 다음 플레이를 속개하고픈 마음. 


다시 형에게 찬스 볼을 준다. 

아뿔싸. 형의 백핸드로 치기 좋게 높이 띄워지는 공. 형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스텝을 밟는다. 맛나겠구나. 멧돼지가 오겠구나. 타다닥. 백핸드를 백핸드로 받지 않고 기어이 백핸드 사이드로 옮겨가 포핸드로 스매싱한다.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혼을 담아 스윙한다. 형은 탁구대 옆에서 어랏차 휘두른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뒤에서 앞으로 사정없이 몸을 날린다. 공이 깨질 듯 굉음을 낸다. 팔로스윙이 네트까지 다다른다. 동시에 형은 탁구대 옆에서 얼마나 세게 쳤는지 스윙의 중심이동을 이기지 못하고 내쪽으로 달려온다. 탁구공과 함께 날아온다. 공은 이미 멧돼지다. 멧돼지는 탁구대 위에서 폭풍처럼 달려오고 형은 탁구대 옆에서 내게로 뛰어온다. 나는 양동 공격에 맞서 고민한다. 누구를 먼저 상대해야 하나. 일단 가슴 앞에서 쇼트로 받아 카운터를 날린다. 에비야! 저쪽이다! 멧돼지는 정수리 약점을 맞자 얌전히 반대편으로 몸 돌린다. 그리곤 달려간다. 공은 정확하게 네트 너머에 꽂히고 형은 나의 코 앞에 다 와서 그 장면을 돌아본다. 우리는 동시에 멧돼지를 봤다. 보면서 내게 부딪칠 듯 더 가까이 온다. 그러곤 얼결에 내 품에 안긴다. 휘청거린다. 넘어지지 않게 내가 붙잡는다. 내가 있는 곳에 형이 함께 서 있다. 아직 몸이 흔들린다. 내 얼굴에 닿을 듯 형의 얼굴이 밀착한다. 뭘 봐. 별안간 형이 피식 웃는다. 나 역시 환한 웃음으로 답한다. 우리는 전쟁을 치르던 투사. 서로 죽고 죽여야 사는 현실. 주변에 응원하거나 구경하는 이들은 누가 죽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단지 피만 보면 즐거운 관객. 싸워라, 좀 더 거칠게 부딪쳐라. 너희의 관계가 어떻든, 여기는 콜로세움, 찢기고 쏟아지는 피를 보고 싶구나, 하는 로마인들. 보면서 떨어지는 고기 덩이나 얻어가야지 하는 사람들. 

나는 병수 형을 보며


"형! 여긴 웬일이에요?" 하고 묻는다.


"응? 그냥 보고 싶어서"라고 형이 답한다.


"근데 우리가 지금 뭐 하는 거니?"라고 형이 묻는다.


"글쎄, 싸우고 있나 봐" 


그러자 형은 미소 짓더니


"여전하네, 반갑다, 녀석아" 하고 말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막상 형의 스매싱을 카운터 날린 게 미안해진다. 우리는 서로 환히 웃으며 악수한다. 비록 게

임 중이지만 아름답게 조우한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정답게, 비로소 정신이 돌아온다. 재미있는 맞수와 한판. 그리운 이와 진지한 전투. 탁구는 탁구일 뿐. 게임이 끝나고 우리는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악수한다. 병수 형은 내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덕담을 들려주었다. 처음이라서 그래. 자꾸 보다 보면 정도 들고 그런 것처럼, 멧돼지도 길들여질 거야. 맛난 먹이 많이 좀 주고 그러면 네 말도 잘 듣겠지. 뭐? 아가씨? 아가씨가 왜 여기서 나와? 내가 아가씨도 보냈어? 이 녀석, 보는 눈이 있구나. 그래, 아가씨 맞아. 내가 보내는 아가씨는 그래도 착한 편이야. 저기 5부, 4부들이 만들어서 보내는 애들은 거의 짐승이라구.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어. 아무리 잘해줘도 빽! 성질내며 아웃된다고. 돈 많이 들여야 돼. 레슨 받아서 비싼 명품 척척 갖다 바쳐야 순해진달까. 정확한 박자에 각도 숙여서 받아야 된다고. 부단히 연습해야지. 


"아, 자꾸 듣다 보니 어려워요, 형, 형 때문에 루프 드라이브 받기가 어려워졌잖아요." 


그 옛날 형 따라 국어가 어려워졌듯, 탁구도 어려워진다. 이게 뭐 어려워? 하면서 쉽게 치든 것을, 어라 내가 어떤 각도, 어떤 타이밍, 어떤 반경으로 스윙했더라, 이렇게 했나? 이렇게 했구나. 문득 쪼개고 분석하면 어려워진다. 모르고 대충 감으로 푸는 게 아니라 조각조각 하나를, 알고 풀기 위한 단계, 비로소 깨끗한 상태에서 튼튼한 집을 짓기 위해. 


잘못된 루틴을 고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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