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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Oct 25. 2022

당신의 상대가 될까?

규옥, 태준과 당당히 겨루고 싶은 마음




서서히 목 죄어 온다. 


무섭다. 

막연한 공포. 내가 상대가 될까. 가당키나 할까. 남자 6부 규옥이랑 남자 7부 태준이가 게임하는 중 나는 가운데 앉아서 심판을 본다. 정말 오랜만에 탁구 치러 왔다. 우리는 탁구장에 아무도 없는 시각. 해질녘 땅거미가 쭉쭉 길어지는 강아지와 늑대의 시간. 퇴근 후 저녁 먹기 전, 황혼 질 때 잠깐 틈새 시간에 딱 3명이 모여 삼파전을 벌인다. 


주어진 시간은 1시간. 그 시간에 서로가 두 번씩 결전을 벌여야 한다. 그리고 탁구장을 벗어나야 한다. 사전에 궁리하고 약속해서 만났다. 오후 5시 50분부터 6시 50분까지다. 삼십 대 규옥이는 이른 퇴근을 했고 사십 대 태준이는 비번일이다. 나는 조퇴 내고 왔다. 탁구는 치고 싶고 코로나는 무섭고 진퇴양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다. 그래서 짜냈다. 텅 빈 탁구장. 아무도 없을 때, 조명은 입구 쪽에만 켰다. 입구 앞 세 개의 탁구대에 비치는 불빛. 저 안쪽 절반 이상의 탁구대는 조명을 받지 못하고 깜깜한 어둠 속에 묻혔다. 우리는 마스크를 쓰고 진땀 흘린다. 탁구장에는 으레 저녁 7시 반은 넘어야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난다. 퇴근 후 저녁 먹고 느지막이 고정 멤버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탁구장의 중추들. 그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탁구장에 온다. 늘 보던 얼굴이 늘 보던 얼굴을 보러 온다. 요새는 때가 때이니만큼 피해야 한다. 안 그럼 수많은 질타와 비난을 면치 못한다. 치고는 싶고 비난은 무섭고...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다가 그래서 이렇게 모였다. 나는 심판을 보며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빨리 서브하셔. 특히 태준이 너. 전처럼 서브 넣을 때마다 루틴 할 거 다 할 시간이 없다고. 평소 하던 대로 서브 넣기 전 양쪽 발목을 까닥거리고 어깨를 들썩이고는 상대를 쳐다보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는 왼손으로 공을 탁구대에 서너 번 따다닥 두드렸다가 높이 훌쩍 공을 던져서는 고작 코앞으로 짧은 서브 넣을 거면서 자꾸 그러지 말라고. 아! 방금 네트다. 다시 서브. 다시 발목 까닥거리고 어깨를 들썩이길래, 아이고 너만의 루틴을 존중하지만 반으로 줄이면 어떻겠니, 라고 눈치를 줬다. 그러자 루틴 없이 서둘러 서브를 넣는다. 긴 거든 짧은 거든 같은 동작이다. 관건은 뻔히 보이지 않게. 


2구에 드라이브를 맞으면 그거만큼 열받는 게 없다. 서브를 읽혔구나 하고 어떻게든 들키지 않으려 한다. 미안해. 벌써 태준이의 머리띠에 땀이 맺혔다. 사십 대 중반 근육질의 남자. 100 사이즈의 티셔츠가 몸에 꽉 끼는 남자. 105 입으라고 해도 105 입으면 태가 안 난다고 100을 고집하는 남자. 티셔츠는 탄성이 포인트란다. 어깨가 너무 굵어서 매번 어깨 부상을 당하는 남자. 나는 어깨가 얇아서 부상도 안 당하는데... 태준이는 워낙 어깨가 두껍고 딱딱하여 큰 스윙을 할 때마다 욱욱! 괴성을 내지른다. 그의 탁구는 투쟁적이다. 힘들게 드라이브를 날리는 만큼 매섭고 무겁고 빠르다. 생각 없이 받으면 그대로 엔드라인 아웃되기 일쑤다. 공을 죽이며 받아야 그나마 탁구대 끝에 떨어뜨릴 수 있다. 그마저도 포핸드 쪽을 가르면 따라가지도 못한다. 탁구대 모서리를 넘어 오른쪽 옆면을 가르기 때문이다. 욱! 소리가 나면 재빨리 뛰어가야 한다. 




한편 삼십 대 규옥이는 4부 같은 6부다. 

규옥이는 정말 착하다. 자신이 득점해도 작은 소리로 "재수!"라고 읊조린다. 내가 "응? 뭐라고?" 물으면 "아, 운이 좋다구요"라고 답한다. 그럼 아하, 이번에 특별히 규옥이의 운이 좋아서 내가 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규옥이는 운이 좋고 나는 운이 없어서? 처음에는 그랬다. 자꾸 네트에 걸리고 에지로 지네. 네트랑 에지만 아니면 이길 텐데, 라고 여겼다. 그러다 차츰 녀석의 루프 드라이브도 덮어서 받았더라면, 파워드라이브도 카운터로 때렸다면, 백드라이브도 물러나서 받았다면, 이라고 자꾸자꾸 가정법을 생산하게 되었다. 아니구나 아니야. 실력이다. 실력으로 진 거다. 그것을 예의상 재수, 운이라고 말해주는 녀석이 착한 거다. 녀석의 착함에 속아 매번 폐 끼치면 안 된다. 착한 녀석이 모처럼 시간 내 위험을 감수하고 왔는데 조금이라도 상대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부담.


규옥이를 상대할 때 태준이는 핸디 2점을 먹고 시작한다. 그런데 오늘따라 얘네들 플레이가 장난이 아니네? 태준이가 사이드 끝으로 드라이브를 날리는데 규옥이가 그걸 기어코 따라가 받아낸다. 받아낸 카운터를 다시 태준이가 감아 친다. 또 그걸 규옥이가 받아내네? 서너 차례 랠리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다. 내 고개가 좌우로 빠르게 왔다 갔다 한다. 윽, 목디스크. 어이! 너네 뭐 하는 거야? 우린 고작 6, 7부일 뿐이라고. 역시 4부 같은 6부 규옥이. 그리고 5부 같은 7부 태준이. 동 부수에서는 최강인 남자들. 


언젠가 구장에서 가장 어르신 영감님이 휴게실에서 읊조렸다.


"자, 보라고. 저 규옥이의 드라이브를."


그때 휴게실 앞 테이블에서는 6부 규옥이와 3부 악인이 겨루고 있었다. 3부 악인은 중진 수비형이고 6부 규옥이는 전진 공격형이다. 악인은 규옥이에게 3대 0으로 깨졌다. 규옥이가 드라이브를 거는데 영감님이 눈빛을 반짝이며 탄복했다.


"바로 저거야."


나는 규옥이를 보는 영감님을 보면서 내가 지금 밀키스를 마시는지 사이다를 마시는지 몰랐다. 그저 나도 저런 눈빛을 받고 싶다는 욕구만 일뿐. 공을 채 회전을 거는 데는 규옥이를 따라갈 자가 없다. 길게 백스윙하여 임팩트를 팍 줘 공을 굴려 넘기는데 회전이 너무 많아서 번번이 맞으면 아웃되고, 맞으면 떠올랐다. 규옥이는 5부도 꺾고 4부도 이긴다. 어쩔 때는 5부와 4부에게 핸디 받는 모습이 어색할 때도 있다. 공식 시합이 없어서... 승급하지 못한 규옥이. 가여운 규옥이. 80년대 삼성 라이온즈 야구 선수 허규옥을 연상케 하는 이름. 녀석은 백수일 때 매일같이 탁구장에 나와서 살았던 적이 있다. 온종일 머무르며, 오전 주부교실 아주머니와 오후 시니어들의 선생님 역할을 자처했다. 아주머니들은 규옥이에게 핸디 7점, 8점을 받고는 게임했다. 그러고도 매일 져서 규옥이에게 음료수를 사 주고 점심을 사 줬다. 게임하고 음료수 마시고 깎아주는 과일을 먹고, 규옥이는 친절히 게임 전술을 가르쳐 주었다. 언젠가 내가 쉬는 날, 낮에 규옥이를 한번 이겼을 때 주위에서 지켜보던 아주머니들의 일갈.


"아악, 어떡해, 규옥이는 우리들의 선생님이라구욧! 우리 선생님을 이겼어! 바보! 착각하지 마! 규옥이가 봐준 거야! 지쳐서 그래, 이건 있을 수 없어!"


라고 절규하던 때도 있었다. 그래, 그 시절 규옥이는 아예 탁구장에 살았었지. 관장님이 레슨실 안에서 가르친다면 규옥이는 레슨실 밖에서 가르쳤지. 단지 그 차이. 거기다 녀석은 너무나 착하다. 이겨도 잘난 체 하나 없고, 운이에요, 재수가 좋았어요, 죄송합니다, 라켓 끝에 빗맞았어요, 다음엔 제가 질 거 같아요. 그렇게 착하니 아주머니들이 열광할 수밖에. 게다가 얼굴이 하얘서 귀염상이다. 그러니 사십 대 아주머니들이 저녁에 밥하러 갈 생각도 잊고 내가 어슬렁 나타나던 시각까지 있었다. (보통 7시 정도) 나는 처음에 탁구장에 일찍 갈 때면 아주머니들이 보여도 상대 않고 곧장 연습실에 들어가 로봇과 몸 풀고는 했다. 하루는 아주머니들이 항의했다. 자신들이 있는데 자신들을 모른 척, 없는 사람인척 대했기 때문이란다. 자신들과 게임을 안 해주어서 화가 났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들의 스승인 규옥이를 불러서 나와 대적시켰다. 혼내주세요, 라고 하는 걸 들었다. 나는 규옥이에게 핸디 2점을 받았다. 처음에는 무참히 졌다. 질 때마다 아주머니들은 환호했다.


"역시 선생님이야, 규옥이가 최고야! 어디서 감히!"


나는 씁쓸한 얼굴로 그들의 환호성을 들었다. 단지 한 게임 졌을 뿐인데 마치 큰 대회에서 진 것처럼 참담한 기분이 드는 건 뭐냐. 아주머니들은 규옥이만 좋아했다. 어쩌다 한번 규옥이를 이기면 이기는 자는 악의 축이 되었다. 악의 축은 퇴출되고 퇴출되어 낮시간, 남자라고는 규옥이만 있었다. 삼십 대 싱싱한 피부의 규옥이. 곱슬머리에 인상까지 부드러운 녀석. 그러한데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아주머니들이 사라졌다. 쓸쓸한 규옥이는 이후 취업에 성공했다.




"규옥이가 그러는데요. 오빠들 그러니까 '7부 클럽' 있잖아요. 7부 중 아저씨가 젤 잘 친대요."


언젠가 규옥이와 유독 친하게 지내는 미영이의 말이 떠오른다. (이 말은 내가 7부일 때 들었던 말이다) 미영이는 규옥이 팬클럽 회장이다. 팬클럽은 말했듯 대부분 사십 대 초반 아주머니들. 미영이도 사십 대 초반 가정주부다. 실력은 주부교실 출신 초보 실력이지만 탁구에 관한 열정은 선수를 뛰어넘고도 남는다. 그녀의 일상을 보면, 하루 종일 탁구장을 드나들며 탁구장 동태를 살핀다. 탁구장 가서 저녁 하러 가기 전까지 탁구장에서 내내 서식한다. 그리고 어쩌다 나와 마주치면 두런두런 탁구장에서 일어난 일을 들려준다. 그 내용이 다만 규옥이가 중심이 되어 그렇지, 들어보면 나름 재밌다. 

오늘 규옥이가 있잖아요, 글쎄, 어떤 언니에게 핸디 8점을 준거예요. 근데 언니가 네트로 점수 내고 손가락에 빗맞아 점수 내어서 어떻게 된 줄 아세요? 네, 맞아요, 규옥이가 진 거예요. 미쳤어, 와아, 나 규옥이가 언니에게 진 거 첨 봤다니까요. 그랬어? 규옥이가 졌어? 별로 흥미를 끄는 화두는 아니지만 듣다 보면 중독성이 있어서 이제는 재밌게 들린다. 미영이는 나만 알고 있으라고 속삭였다.


"젤 잘 친대요."


그 말을 듣고 두근거렸다. 은근히 기분 좋은 말이다. 아아, 나도 규옥이의 팬클럽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게까지나 봐주다니. 괜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7부 클럽'은 2년 전 조성된 동호회다. 구장 내 맞수들끼리 모여서 만든 클럽이다. 우리도 6부로 올라가자는 일념으로 모여서 연습하고 다독이고 자체 리그전도 치렀다. 




태준이와 규옥이의 한판 승부. 

초 박빙이다. 나는 심판을 본다. 이들 중 승자와 내가 붙을 테다. 그런데 얼마간 쉬는 동안 감이 죽었다. 나와는 다르게 이들은 여전하다. 포핸드 드라이브와 백 드라이브가 작렬한다. 카운터와 카운터가 맞부딪쳐 불꽃이 튄다. 한방 스매시가 되돌아오고 긴 랠리로 연결된다. 뭐 이렇게 잘해? 순간 두려워진다. 나도 이렇게 칠 수 있을까. 나도 낄 수 있을까. 나는 상대도 안될 텐데. 내가 제일 형인데. 내가 제일 못하면 어쩌지. 아까운 1시간. 귀중한 시간 짜내서 왔는데 내가 그들의 시간을 망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차라리 6부 규옥이가 7부 태준이를 일방적으로 깨 주면 좋을 텐데, 그러면 나도 막 깨지고 편할 텐데. 바람과 달리 둘은 세트 스코어 2대 2에 결승 5세트에서도 듀스에 듀스, 그야말로 용호상박, 접전 중이다. 둘은 비슷하다. 이게 바로 맞수지. 이런 게임을 위해 온 거다. 짜릿한 느낌. 실력이 엇비슷해 집중력 높은 이가 이긴다. 물러서지 않는다. 힘내면 이기고 방심하면 진다. 나도 이런 감각을 느낄 수 있을까. 말도 안 되게 무너지면 어쩌나. 태준이가 이렇게나 잘하는데, 나만 규옥이에게 3대 0으로 지면... 최악이다. 어쩌면 나도 팬클럽 아주머니들 중 한 명으로 치부될지 모른다. 맞수로써의 존재가치가 사라질까 싶어 두렵다. 게임은 규옥이가 이겼다. 규옥이가 이겼지만 나랑 태준이더러 먼저 하라고 하네. 승자는 물 마시러 갔다. 나는 혈전을 벌인 태준이 앞에 섰다. 태준은 평소에 열 번 붙으면 7할은 지는 상대. 우린 같은 부수다. 작년까지만 해도 내가 승률이 높았는데 올해 들어서는 내가 밀리는 판국. 언젠가부터 녀석의 파워드라이브에 반응조차 못한다. 그리고 서브에도 한참을 헤맨다. 같은 동작에서 나오는 서브는 같은 코스 바운드로 오는데 너클도 있고 회전도 있고 커트도 있다. 거기다 포핸드 기습 짧은 서브도 있다. 급히 따라가 받으면 그마저도 커트와 너클이 섞였다. 리시브가 떠오르면 공이 부서져라 때려버리는 녀석이다. 무지막지한 힘. 어깨가 두껍다. 두꺼운 어깨에서 욱욱! 괴성과 함께 터져 나오는 파워. 태준은 남자들의 로망이다. 두꺼운 어깨뿐 아니라 육덕진 상체. 그냥 필요 없는 세포라고는 하나도 없고 죄다 근육뿐. 울룩불룩 나온데 나왔다. 좀 많이 나와서 우리 클럽 티셔츠를 같이 맞춰서 입는데 태준이는 가슴 근육에 딱 달라붙어서 멋이 나는데, 나는 웬걸 빈약해서 멋이 안 난다. 옷을 탓하지 말고 가슴을 키워라고 누군가 말했는데 차라리 옷을 줄이는 게 더 빠르다 싶어 수선집에 갔다.




다행히 초반에 내가 점수를 앞서간다. 

그러다 여지없이 드라이브 한방 맞고는 멀리 튀어간 공을 주으러 간다. 불 꺼진 저 안쪽 테이블 아무도 없는 곳. 나는 태준이의 드라이브 공을 주으러 간다. 주워서 돌아서는데 여전히 두려움이 가시지 않는다. 3대 0으로 지면 어떡하지? 최근에 연습도 못했는데. 탁구장에 못 가더라도 섀도 스윙을 했어야 했는데. 제발 1세트만이라도 이기고 싶다. 두려움은 끝없이 확장된다. 탁구 실력에 있어서 그 근본이나 기초 지지대가 얄팍하다는 생각. 들킬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들이 알아채기 전에 퍼뜩 시멘트를 발라 메꿔야 한다. 구멍이 뚫리면 댐이 무너져. 부실공사. 지금은 보이지 않아. 물이 가득 차 있어서 그리고 댐도 흔들림 없이 평소 그대로의 모습이니까. 하지만 물속에 구멍이 벌어져서 커지고 커지면 결국 무너질 거야. 나는 애초부터 구멍이 없는 듯 으스대고 있는 댐. 보수해야 한다. 시간이 없다. 지켜야 한다. 연마했어야 했는데. 발라도 발라도 시멘트가 물속에서 응고되지 않아 잘 메꾸지 못한다. 두렵다. 나는 겉만 멀쩡하고 속은 부실해. 잘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어쩌다 그리 됐을 뿐 온전한 실력이 아니었어. 등에 진땀이 난다. 악몽을 꾸며 깨어나듯 맞수 앞에서 긴장한다. 문득 몸에 힘이 쭉 빠진다. 내 장점이 뭐였지? 생각나지 않는다. 랠리? 언뜻 떠오른 중진 랠리. 형은 먼 랠리에 들어가면 잘하잖아요. 그래, 잘했지. 길게 길게 치는 게 재미있었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오랜만에 치는 탁구는 왕왕 그런 마음을 가지게 한다. 감각 운동이니까. 연습한 만큼, 게임한 만큼, 다져진 만큼, 오래 건조된 만큼 튼튼해지는 거니까. 완공되지도 않았는데 섣불리 물 채운 것처럼, 어설픈 고수의 기분에 젖어서 으스댄 지난 기억이 부끄럽다.




지금 와서 후회해봐야 이미 늦었다. 

편하게 하자. 부드럽게, 급하지 않게. 나는 평소보다 한 발짝 물러나서 리시브했다. 그리고 어설피 2구 공격을 하지 않기로 했다. 돌아서서 큰 동작으로 드라이브를 걸면 그만큼 미스가 난다. 리시브에서 미스가 잦으면 될 것도 안 된다. 리시브는 리시브다. 편하게 넘기자. 욕심을 버리자. 그런 일념으로 태준이의 서브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파워드라이브도 천천히 눈 떼지 않고 따라갔다. 빠른 볼을 캐취 하는 동체시력. 내게 무섭게 날아온다고 해서 움찔 눈감으면 끝이다. 눈 감지 마. 눈 떠. 계속 노려 봐. 천천히 차분하게 지켜보라고. 보인다. 그래, 눈에 들어온다. 자, 이제 따라가자. 저 쪽 코너 끝으로 공이 날아가도 나는 쫓을 수 있다. 끝까지 포기 말고 따라가. 알잖아, 이쪽으로 오리란 걸. 몇 번이고 당했다. 잡을 수 있다. 잡아서 막상 카운터로 때리기까지는 못해도 갖다 댈 수는 있다. 워낙 공이 빨라서 갖다 대기만 해도 넘어가. 넘어가면 다음 공도 길게 올 거야. 중진 랠리에서는 내가 유리해. 서둘러. 어서 돌아가 스매시 때릴 준비해. 온다. 역시 공이 길게 넘어온다. 나는 이미 스텝을 밟아 움직이는 중, 어지간하면 포핸드로 잡는다. 원래라면 녀석의 득점일 텐데, 한 세트에 두어 개만 잡아도 그것은 곱절로 내 점수가 된다. 결국 3대 1로 이겼다. 이겼네? 어느새 두려움은 사라지고 자신감으로 변한다. 두려움은 뭐였을까. 그것은 한동안 쉬었던 공백이리라.


뒤이어 규옥이와 붙었다. 

태준이는 내게 지고는 심판 보는 대신 로봇과 마무리 운동을 하러 갔다. 뭔가 반성중인 표정이다. 집중하자. 나보다 고수, 규옥이의 커트 서브가 온다. 착한 표정과는 달리 탁구에서는 자비가 없다. 역시 회전이 많다. 나는 미리 라켓을 집어넣어 따닥 박자 스톱으로 받았다. 이게 완벽한 스톱은 아니겠지만 스톱이라 생각하면서 라켓을 집어넣었다. 빠른 박자로 받으니 다행히 공은 네트 위로 살짝 넘어가 뻗어나가지 않는다. 덕분에 규옥이의 3구 공격을 다소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규옥이의 긴 서브를 쇼트로 받아치니 그대로 3구 공격이 살아난다. 오늘따라 규옥이의 백드라이브가 한층 날카롭다. 백인데도 포핸드 드라이브처럼 회전이 많다. 마치 톱날 같다. 예전에는 루프처럼 살랑 왔는데 이제는 백으로도 강렬한 드라이브가 온다. 아무 생각 없이 쇼트로 받으니 그대로 퍽! 소리와 함께 오버 아웃이 된다. 센 공이다. 내가 받았다기보다는 공이 라켓으로 날아와 부닥쳤다. 따닥 박자가 아니라 조금 공간을 두고 덮듯이 눌러야 한다. 놀라지 말자. 때리지 말자. 지켜봐야 해. 센 힘을 털어내야 해. 명심하자. 예전 감 좋을 때처럼 규옥이의 전진 드라이브를 카운터 스매시로 때리지 말자는 다짐. 고집을 버려. 그건 정말 멋지기는 해도 한 달 중 하루 있을까 말까 한 컨디션에서만 가능하다. 한번 그랬다고 해서 그것을 일반화해서 연신 시도하면 연신 깨질 뿐이다. 그래도 탁구란 지더라도 계속 시도해야 되잖아? 아니야, 아닌 것도 있어. 계속 뻥카만 날리면 뻥카도 습관이 된다. 감각이 눈을 떠 공이 눈에 보일 때 그때 날리면 된다. 지금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아. 눈에 익지 않았어. 규옥이의 드라이브를 나는 겨우 갖다 대 받아넘겼다. 서브, 리시브, 그리고 3구의 틀을 넘어서면 공을 띄워서 길게 중진 랠리로 이끌어 갔다. 결과는 3대 1로 승리. 아자! 얼마만인가. 이 맛이다. 이 맛! 짜릿한 승리의 쾌감!  


오늘도 1시간 알차게 운동했구나. 

땀도 많이 났고, 고맙다, 나의 라이벌들. 수고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레 태준이의 비번날 재차 붙을 예정이다. 생각하니 새로이 두려움이 엄습한다. 금방 이겼는데. 금방 끝났는데. 새삼 피어나는 염려. 한 세트라도 이겨야 할 텐데. 정말이지 백 퍼센트가 없다. 이건 확실하다, 하면서 치는 공도 아웃되거나 네트에 걸리기 일쑤. 미스하지 않으려고 힘 빼고 속도를 늦춰 휘두른다. 그런데도 미스한다. 이 정도인가? 이렇게? 이건가? 탁구는 감각 운동. 감각은 딱 이 정도, 라고 짐작할 뿐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매일 다르다. 모르겠다. 알수록 궁금하다. 그런 의문이 가실 줄을 모른다.


이겨도 늘 떨리고 지면 부단히 되짚게 된다. 그래서 재미있는 운동. 


탁구의 무한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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