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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Oct 25. 2022

탁구장에서 만나는 엄마

탁구장에 기거하는 가족입니다. 석민 선희 행규네 




"아이 씨, 왜 안 되지?"


선희 씨가 짜증 부린다. 상대의 드라이브를 떠오르는 박자에 맞춰 커트치기 하는데 계속해서 오버 아웃이 된다. 여자 5부 선희 씨. 사십 대 아줌마. 작은 얼굴. 놀라울 정도로 동안. 피부에 흠집 하나 없다. 웃을 때 볼에 보조개가 움푹.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방 날카로운 데가 있어서 쉽지 않은 사람. 털털하고 화끈한 탁구장 터줏대감이다. 태초에 여기 탁구장이 생겨났을 때부터 함께 해왔다. 탁구장 주인은 관장님이지만 이벤트 살림은 그녀가 주도한다. 이벤트로 구장 리그 중 그냥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무려 상품이 걸리고 기록이 남기에 지극히 진중한 게임. 그래서 최선을 다한다. 이때껏 갈고닦은 기량을 마음껏 발휘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오랜 시간 레슨 받았고 연마하고 정진했노라. 1등부터 꼴등까지 쭉 줄 세우는 자리다.


"아이 참, 왜 안되냐고?"


다시금 선희 씨가 자책한다. 자신에게 말하고 자신에게 버럭 소리 지른다. 스스로를 꾸짖는 소리지만 그 소리는 심판 보는 나를 꾸짖고 상대편까지 꾸짖는 연계효과를 발휘한다. 상대는 바로 선희 씨의 남편, 석민 형이다. 석민 형은 성실하고 섬세하다. 7부로 입성하여 몇 년간 꾸준히 레슨 받고서 대회에 나가 입상하여 어느새 5부가 되었다. 회사일 중에 타 지역 출장만 아니라면 매일같이 탁구장에 나온다. 나와 마주칠 때마다 레슨을 받으라고, 커트를 연습하라고, 꾸준히 게임하라고 가르침을 준다. 진지한 형의 말을 들을 때마다 탁구 실력이란 게 그리 간단한 것만은 아닐 텐데, 라는 생각도 들지만, 실제 형이 하나하나 기술을 습득하고 연습하여 실전 게임에서 응용하는 것을 볼 때면, 정말 대단하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저렇게 드라이브를 연습해서 게임 중 똑같이 접목해보는 게 정말 되긴 되는구나, 하는 수긍. 이를테면 소년의 성장을 지켜보는 느낌이랄까. 선생님께 배우고 공부하여 실생활에 써보고, 차츰 성장해 가는 소년. 나이는 사십 대 후반이지만 탁구 세계에 있어서 그는 아직 소년이다. 스펀지처럼 가르침을 흡수한다. '다양한 사람이랑 많이 게임해봐야 된대이'라고 내게 정답게 권고하는 형. 내 취향이 다양한 이를 경계하고 익숙한 이만 선호하기에, 형이 내게 해주는 따뜻한 조언이다. 아무튼 나는 어찌하여 부부의 구장 리그전 공식 게임에 심판을 보고 있는가? 젠장 잘못 걸렸다.

 

"아이 진짜, 정말, 잘 되던 게 왜 안되냐고!"


선희 씨가 다시금 소리친다. 그러자 상대방 석민 형이 움찔한다. 마치 아내의 잔소리를 듣는 것처럼, 집에서 혼나고 있는 것처럼 움츠러든다. 이 시대 가여운 남편들의 표상, 석민 형이 먼저 2세트를 따냈다. 이제 1세트만 이기면 게임 끝이다. 기세 등등. 이름하여 구장 리그전. 관장님이 1등부터 5등까지 상품을 걸고 커다란 벽보에 이름과 게임 결과가 죄다 기록된다. 참가자는 30여 명. 누가 누구에게 몇 대 몇으로 이겼냐 졌냐, 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람들은 벽보 앞에서 웅성거린다. 누가 누구에게 졌네? 뭐야? 말도 안 돼. 평소에 그렇게나 이긴다고 으스대더니 실전에서는 약하네. 새가슴 인가 봐? 이런 소리를 듣기도 한다. 기록이 남겨진다는 것. 컨디션이 어떨지라도 마음 단단히 먹고 임해야 한다. 이른바 진검승부. 이제 목검은 던져두고서 진검을 들어라. 스쳐도 살과 뼈가 베인다. 피가 흐르고 흉터가 남는다. 자, 들어와라. 자신 없나? 떨리나? 겁나나? 어서 서브를 넣어라. 네가 어디로 어떻게 서브 넣을지 이미 알고 있노라. 미안하지만 이번 승부는 내가 가져가겠다. 잘 가라. 멀리 안 나간다. 컨디션 탓은 의미 없다. 다시 태어나 다음 생에 다시 도전하라.

 

"아유 정말, 이상하다, 왜, 왜 안 되는 거냐고!"


선희 씨의 얼굴이 벌게졌다. 이기나 지나 언제나 여유롭게 게임을 즐기던 그녀였다. 며칠 전 구장 리그가 시작되고 연전연승을 하던 그녀였다. 기록 상 1위였다. 이러다 우승하는 거 아냐? 라고 떠들던 그녀의 전적. 그녀는 상위 부수와도 넉넉히 얻은 핸디를 잘 이용하여 흐름을 유리하게 가져가곤 했다. 아무리 상위 부수라 해도 핸디를 잔뜩 준 상태에서 한두 번 실수하다 보면 금세 5대 0, 7대 0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그 압박감을 견디고 한점 한점 따라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점수판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또다시 한두 점 줘버리면 곧장 게임 끝이 되어버린다. 그런 고수들의 압박을 그녀는 잘 안다. 여유로이 만면에 보조개를 띄운 채 냅다 커트치기를 한다. 공은 이쪽저쪽 코너웍까지 되어 허를 찌른다. 발이 무거워져서 마음 급한 고수는 섣불리 예측하지 못해 쩔쩔맨다. 예측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는 거고 보이는 거다. 따라가지 못하고 발이 점점 무겁다. 무거워져서 움직일 수도 없다. 이게 아닌데. 왜 이렇게 초조한가. 10대 4로 지고 있는 게 사실이란 말인가. 한 점이면 끝난다. 그것도 하필 구장 리그전에서? 본인이 아무리 검술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상대가 어설피 휘두른 칼날에 베이면 살이 찢기고 피가 터진다. 어쨌든 칼은 칼이기 때문이다. 그 수를 다 알면서도 발이 무거워 피하지 못했구나.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심판을 본다. 어쩌면 게임이 아니라 부부싸움을 하는지도 모른다. 아내가 타박하고 남편이 무릎 꿇고 경청하는 분위기. 아니, 이게 왜 잘 되던 게 안 받아지는 거냐고, 라고 선희 씨가 소리칠 때부터 석민 형의 평정심은 무너진다. 안 하던 서브 실수를 하고 리시브를 미스하고 땀을 훔치고. 자꾸 점수를 잃는데도 석민 형은 별다른 말이 없다. 그저 안경 속 눈을 비비며 땀인지 뭔지를 닦아낼 뿐. 점점 선희 씨가 앞서간다. 이제 별 말이 없는 부부. 무거운 공기가 주위를 에워싼다. 석민 형이 이기다가도 선희 씨가 구시렁거리면 석민 형은 움츠러들었다. 선희 씨의 스매싱이 하나둘 꽂히기 시작한다. 밀리는 석민 형. 그에게도 구장 리그는 중요하다. 실력의 잣대가 되는 자리. 1승이라도 추가하면 좋다. 그러나 한번 넘어간 흐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스코어는 역전되어 3대 2 패. 오직 아내에게만 약한 남자, 석민 형이 졌다. 누가 봐도 초반 기세를 봤을 때 그리고 실력으로 볼 때 그가 우세임을 의심할 자 없지만 그럼에도 졌구나. 나는 석민 형이 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로써 가정의 평화가 지속되지 않을까. 선희 씨가 신나는 표정으로 달려가 벽보에 결과를 적었다. 아싸 1승 추가요. 선희 씨, 자못 만족스러운 얼굴이다.  




"아들이 아빠보다 잘해."


아들이 아빠보다 잘하는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공부나 특기 여러 가지 등. 행규는 선희 씨의 장남이다. 행규는 아빠보다 탁구를 잘 친다. 무려 3부다. 행규는 탁구장 코앞에 집이 있고 학교가 있다. 학교를 파하고 곧바로 탁구장으로 온다. 아침에도 있고 낮에도 있고 밤에도 내내 머무른다. 먹거리를 싸들고 엄마 선희 씨는 탁구장 한편에 봇짐을 푼다. 


"아들아, 먹어라."


선희 씨가 말하면 아들 행규는 먹기 시작한다. 탁구장 한편 휴게실에서도 먹고 대기석 벤치에서도 먹는다. 먹다가 자고 자고 일어나 먹을 게 없으면 탁구를 친다. 


"엄마! 칠 사람이 없어"라고 행규가 선희 씨에게 푸념한다.


"아니, 왜? 저기 아저씨 있잖아"라고 선희 씨가 나를 가리킨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뜨끔한다.


"아저씨는 나랑 치기 싫어한단 말이야"라고 행규가 소리친다.


나는 행규를 기피한다. 되도록 녀석과 탁구 치지 않으려 한다. 덩치는 어른이지만 아직 학생이지 않은가. 학생에게 후달려 뚜드려 맞고 지는 것을 나는 웃으며 받아들이지 못한다. 못난 어른이다. 


"칠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그때 쳐주마"라고 하수인 나는 고수인 행규에게 미리 일러두었다.


녀석 이렇게나 잘하다니 기특하구나, 귀엽구나, 하면서도 날카로운 드라이브를 딱딱 맞다 보면 어느새 농락당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농락당하면서 아이고, 어린 학생 주제에 밥 먹고 탁구만 쳤니? 왜 이렇게 잘해? 라고 물으면, 맞아요, 밥 먹고 탁구만 쳤어요, 라고 할 테다. 


밥 먹고 탁구만 친 행규. 

덩치도 제법 커 우람한 편이다. 배가 남산처럼 불룩하다. 그런 녀석이 자신보다 하수인 어른을 상대할 때 가만히 보면, 무늬만 고등학생이지 어른을 방불케 할 때도 많다. 때때로 삼십 대부터 오십 대까지 상대할 때 녀석은 봐주기도 하는데, 3대 0으로 이기면 무안해할까 봐 3대 1로 이기고, 한 세트에 한 점도 못 뽑으면 기죽을까 봐 서비스로 한두 점 실수인 척 져 준다. 그게 빤히 보이는데도 녀석이 나름 베푸는 거라 뭐라 말하지 못하고 고마워한다. 아아, 나는 고등학생에게 어여쁨을 받는 신세구나. 어리지만 녀석 사람 됨됨이가 착하구나 하고 느끼지만 서글프기도 하다. 게임 중에 최근 새로이 배운 기술을 시험해보듯 구사해보고, 통하면 득점이고 실패하면 연습이요 그게 또 봐주는 게 된다. 이를테면 탁구대에서 한발 떨어진 곳에서 공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대각으로 퍼 올리는 회전 드라이브가 있다. 회전 드라이브는 횡회전까지 먹어서 탁구대에 닿으면 앞으로 튀어가는 성질에 더하여 옆으로 휘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그 공을 받아치려면 이만큼 더 오른쪽으로 튀어 오를 것을 예상하여 백스윙을 가져가야 한다. 따라서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헛스윙하기 딱 좋은 모양새가 된다. 허공에 헛스윙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 초보면 '와, 신기하다'라고 할 것이고 중수면 '이 자식이 장난하나'라며 이를 으득 깨물 것이고 고수면 '생각보다 더 휘는데'라며 조절할 것이다. 나는 와~ 신기하다, 라고 느끼면서도 이 자식이 장난하나, 나랑 게임하면서 연습한 거 시험하나, 라는 데까지 생각이 이른다. 그것은 즉 전력을 다하지 않음에 기분 나빠하는 것이다. 게임 중 신기술을 연습하지 말고 평소 갖춘 기량으로 승부에 최선을 다하라, 라고 무언의 일갈을 날리면서도 나는

 

"우와, 행규 드라이브가 예술이네"


라면서 저 멀리 헉헉 공 주워다가 던져준다. 하긴 게임 중에 연습하지 언제 연습하겠어?




행규네 가족은 쿨하다. 

선희 씨가 나에게 지면 석민 형은 내 칭찬을 먼저 한다. 와~ 많이 늘었네. 석민 형이 내게 져도 선희 씨는 내 칭찬을 먼저 해준다. 와우, 오늘 컨디션 좋네요. 그러다 행규가 내게 지면? 그것은 코끼리 뒷발에 어쩌다 얻어걸린 결과일 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석민 형을 볼 때 나는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안쓰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탁구에 있어서는 아들에게 치이고 집에서는 아내에게 치인다. 7부에서 6부로 올라간 지 한 달여 만에 단체전 승리로 5부까지 단시간에 올랐다. 따라서 초반에 비슷한 실력 5부나 6부에게 매번 핸디를 주고 게임해야 했다. 그래서인가. 석민 형은 자신의 부수, 5부에 어울리는 실력을 갖추고자 연일 맹연습을 했다. 핸디를 준다지만 맨날 지기만 하면 어떻겠는가. 많은 이들이 의심할 수가 있다. 정녕 5부가 맞는가. 5부가 맞다면 같은 5부들끼리의 삼파전에서도 이기고 지고를 주고받아야 하지 않는가. 정말 주고받을까. 나는 유심히 그의 게임을 지켜보곤 했다. 신기한 건 정말 주고받더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6부 같은 5부였지만, 어느새 그는 5부에 어울리는 실력에 다다라 진정 5부 같은 5부가 되었다. 이름이 사람을 만든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라는 말이 딱 석민 형에게 해당되리라. 

그는 가족의 중간 지점에 서서 끊임없이 성장하는 중이다. 내가 행규와 랠리조차 버거워할 때 그는 매일 스스럼없이 아들과 랠리를 이어가고 선희 씨의 잔소리를 견뎌 낸다. 

       



나의 맞수, 혜리 씨는 나보다 한 살 아래다. 혜리 씨는 나랑 실력이 엇비슷하다. 그녀는 나와 핸디 없이 게임한다. 하루는 이겼다가 하루는 지기도 한다. 우리가 게임을 시작하면 비교적 랠리가 길어지는데, 이것은 서로 간 공이 '맞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실력이 비슷해도 공이 '맞지 않으면' 랠리가 되지 않는다. 서브, 리시브에 이어 대부분 3구에서 짧게 끝나버린다. 보는 입장이나 하는 입장이나 도통 재미가 없다. 서브나 리시브, 3구로 결정이 나니 서로가 서로에게 한 방을 먹인다. 한 방만을 준비하니 모 아니면 도가 되어 랠리로 이어질 수 없다. 반면에 나와 혜리 씨는, 살살 조심조심 넘기다 찬스가 나길 기다린다. 찬스가 나지 않으면 차근차근 만들어간다. 백으로 서너 방을 때리고 갑자기 포핸드로 방향을 트는 것이다. 같은 강도로 백을 두드리다가 갑자기 세게 날려버린다. 혜리 씨와 나는 랠리가 길어지니 한 점 얻으려고 열몇 번의 타격을 한다. 열몇 번의 랠리 중 득점이 나면 지든 이기든 환호성이 터진다. 땀이 난다. 후들거린다. 그런데도 재미가 있다. 실력이 비슷하여 가벼이 넘기면 가벼이 받고 세게 치면 세게 친다. 듀스에 듀스, 한두 점은 따라붙어도 네댓 점은 따라붙지 못한다. 방심하면 끝이다. 서로가 서로의 장단점을 안다. 약점을 커버하려고 부단히 발을 움직인다. 컨디션이 나쁘다가도 혜리 씨와 게임 한번 치르고 나면 본래 좋았던 감각이 돌아올 때도 있다. 그런 혜리 씨의 라이벌이 한 명 있는데 공교롭게도 선희 씨다. 관장님으로부터 레슨을 받는 40대 주부 중 최고가 되고 싶다는 라이벌 의식. 둘 다 키가 작고 스타일이 비슷하다. 탁구 시작한 시기가 같다. 실력은 혜리 씨가 앞서갔지만 선희 씨는 가족이라는 플러스가 있다. 


공식 구장 리그전을 하는데, 우리 동호회 사람들은 우승 후보로 혜리 씨를 지목했다. 혜리 씨는 실력에 비해 아직 낮은 부수로 책정되어 있다, 가 그 이유였다. 평소 나랑도 핸디 없이 게임을 하는데, 구장 리그전에서는 구장 공식 부수를 적용하기에, 핸디 3점을 혜리 씨에게 주고서 게임했다. 얼떨결에 나는 혜리 씨를 이겼고, 혜리 씨는 원망스러운 눈길을 보내왔다. 나는 게임이 끝나고서야 정신 차렸다. 아뿔싸 우리는 진검승부를 연습처럼 하는 사이라 잠시 이성이 나가 버렸나 보다. 우승 후보를 감히 내가 이기다니. 아니 난 그저 평소처럼 최선을 다하느라 그랬는데, 이미 늦었다. 젠장 쳐다보는 혜리 씨의 시선이 매섭다. 이윽고 저쪽에서 선희 씨가 나를 부른다. 돌아보니 나랑 구장 리그전을 하잔다. 큰일 났다. 혜리 씨와 선희 씨의 불꽃 튀는 라이벌 사이에 끼여버린 형국이다. 내가 살 길은 혜리 씨를 이겼듯 똑같이 선희 씨를 이기는 것이었다. 


작년 여기 탁구장에 복귀할 즈음 나는 선희 씨를 이기지 못했다. 맨날 졌다. 확실히 실력으로 밀렸다. 선희 씨는 꾸준히 레슨을 받은 결과라고 했다. 나는 선희 씨에게


"누님! 서브를 못 받겠어요. 제발 서브받는 법 좀 알려주세요"


라고 부탁했었다. 그때 선희 씨는


"영업 비밀이에요"


라며 단칼에 거절했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서브가 5할 정도 차지할지도. 그만큼 서브가 까다로웠다. 우리 구장 최고의 서브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역회전으로 횡과 커트가 적절히 섞여서 길게도 오고 짧게도 왔다. 받으면 속절없이 옆으로 튕겨 나가서 나는 서브를 받지 못해 늘 깨졌다. 


그런 선희 씨를 이겨야 한다. 

복귀한 지 불과 몇 달만이 지났다. 노 핸디로도 졌는데, 그것도 핸디 3점을 주고서 필히 승리해야 한다. 안 그럼 전처럼 얼굴 들고서 혜리 씨를 볼 수 없을 터다. 혜리 씨가 얼마나 욕하고 있을까. 생각 없는 사람. 정신 나간 사람. 구장 리그전에서 나를 이기다니. 라이벌인 선희 언니에게도 똑같이 이겨주세요. 만일 지면... 상상하기도 싫네요, 라고 혜리 씨가 나를 노려보네. 나는 구장의 모든 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맨 안쪽 빅게임의 주 무대인 두 번째 탁구대에서 선희 씨와 마주했다. 아직도 기억한다. 그날 밤의 압박감을... 땀이 안 나는 체질임에도 온몸에서 그야말로 비 오듯 땀이 났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서브를 받아내야 해. 나는 한 번도 세게 때리지 못하고 그저 열심히 따라가 받아내고 걷어내고 올려 보내는 이른바 머슴 플레이를 했다. 지면 안된다는 몸짓이었다. 온몸을 바쳐 뛰어다닌다는 것을 혜리 씨가 알아주길 바랐다. 선희 씨가 아무리 세게 때려도 나는 달려가 로빙볼로 돌려보냈다. 선희 씨의 뒤쪽으로 석민 형과 행규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은 결코 대놓고 가족을 응원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날만큼은 달랐다. 엄마 힘내세요, 여보 행규 엄마 파이팅! 할 수 있다, 라는 말이 끊임없이 들렸다. 그래요. 때리세요. 때려도 때려도 저는 쓰러질 수 없답니다. 저기 옆에서 혜리 씨가 지켜보기 때문이지요. 이겨야 합니다. 반드시 오늘만큼은 이겨야 한답니다. 제가 나머지 날들은 다 져 드릴게요. 선희 누님! 왜 이러세요. 선희 씨! 라고 나는 절규하며 그녀의 서브를 받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왼쪽으로 비스듬히 들어서 공이 가까이 올 때 뒤로 빼면서 받아 속도를 죽였다. 옳지, 들어갔다. 휴우, 살았다. 

나는 남편과 아들이 지켜보는 선희 씨와 게임하는 중 찌릿한 시선에 흐느적거렸다. 


"엄마, 파이팅!"


모처럼 행규가 응원했다.


"행규 엄마, 나이스!"


아, 조용하던 석민 형까지 응원을 했다. 나는 그저 탁구 치고 있을 뿐인데, 어느새 가족 공동의 적이 되어버렸다.  


"아니, 잘 되던 게 왜 안 들어가."


"아니, 잘하던걸 왜 못해, 아 씨!"


선희 씨의 자책이 들렸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외려 힘이 났다. 그녀의 잔소리가 시작되자 뒤에 있던 석민 형의 목소리만 기어 들어갈 뿐. 나는 주눅 들지 않고 같은 코스로 공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이기고서 


"잘 배웠습니다"


라고 공손히 인사했다. 응원단 쪽으로 돌아와 나는 혜리 씨와 결의에 찬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그 옛날 슬램덩크에서 전국 최강 산왕과의 결전 직후 강백호와 서태웅이 하듯 짝! 마주치는 소리가 났다. 


"혜리 씨! 저 이기고 왔어요"


라고 내가 말하자


"잘하셨어요. 멋졌어요"


라고 혜리 씨가 칭찬해주었다.

동료들이 고생했다며 한 마디씩 격려해주었다. 짜식 죽다 살았구만. 오늘 큰 거 하나 했으니 집에 가 밥 두 그릇 먹어라. 얼굴이 퍼레 갖고 완전 죽상이더만 이제 좀 피네. 

   



작년 우리 시에서 단체전 대회가 열렸을 때다. 

석민 형과 행규와 성준 형이 한 팀이었다. 행규와 성준 형이 나란히 승리하고 이제 행규의 아버지 석민 형 차례였다. 석민 형은 돌출 러버 선수와 맞붙었다. 돌출 러버는 공의 회전을 뒤바꾸는 러버다. 민 볼을 넘기면 커트 볼이 되고 커트 볼로 보내면 너클 볼이 되어 돌아온다. 민 볼로 보냈는데 상대가 라켓을 돌려 앞면으로 받는지 뒷면으로 받는지 파악해야 한다. 민 러버로 받으면 상회전이 상회전으로 돌아오고 돌출 러버는 반대니까, 순간적인 타격 동작으로 구질을 짐작해야 한다. 대놓고 계속 커트만 대다가는 먹기 좋은 공중 볼을 주기 십상. 당시 상대는 돌출면으로 횡회전을 먹여 빠르고 긴 서브를 넣었다. 석민 형은 이렇게도 대보고 저렇게도 대보았다. 모두 실패. 리시브가 마비되었다. 급했다. 어쩌면 게임 전체를 말아먹을 위기. 어떻게든 리시브가 되어야 게임이 진행된다. 1세트를 내주고, 2세트도 내줬다. 이제 시간이 없다. 뒤에서 행규가 뭐라 뭐라 말하고 있었다. 게임 중에는 응원단이 코치를 하면 안 된다. 행규도 누런 얼굴로 중얼중얼 지켜보았다. 다시 상대 서브를 못 받고 실점. 석민 형이 뒤돌아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아, 이 서브 대체 어떻게 받아야 돼?"


누구도 바로 대답 못하는 상황. 내가 보기에 그것은 전쟁 중 아버지가 아들에게 도와달라고 절규하는 것이었다. 이 총을 어떻게 쏘는 거냐고! 총만 쏠 줄 알면 어떻게든 전쟁을 치러 보겠다고. 지금 사방에서 사격을 받으며 엎드려 피하고는 있지만. 더 시간이 지체되기 전에 나도 사격을 해야겠다고. 죽어도 좋아. 그러니 부디 총만 쏘게 해달라고 부르짖는 거였다. 행규는 초조했다. 아버지께 계속 뭐라 뭐라 말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소리도 나지 않아 그저 중얼거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그때 행규의 진지한 모습을 처음 보았다. 들리게끔 말하면 안 되니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가족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데시벨로. 마냥 철없이 까불던 아이로만 치부했었는데. 아버지를 위해 자신이 아는 분석을 끊임없이 했다. 조용하게 읊조리듯 말했지만 아빠, 제발 들어주세요, 라는 표정이었다. 굳이 소리 내지 않아도 우리는 입모양만으로 소통할 수 있잖아요.


"아빠! 아까 우횡 회전으로 받았잖아요. 좌횡 회전으로 받아 봐요."


아버지 석민 형은 라켓을 반대면으로 기울여 받았다. 또다시 실패.


"아빠! 이미 3세트예요. 한 발짝 물러나서 커트로 받아요. 커트 커트 커트 커트!"


석민 형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커트로 받았다. 오, 커트로 받으니 그나마 네트 위로 너무 높게 뜨지 않고 넘어갔다. 뜨지 않고 넘어가니 상대도 일단 커트.


"아빠! 4구는 민 볼이야! 민볼 민볼 민볼 민볼!"


떠오른 볼이 뱅글뱅글 도는데 아무리 봐도 커트처럼 보였다. 하지만 석민 형은 자신 있게 민볼 드라이브 스윙을 하고 득점했다. 상대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민 볼처럼 보이지만 커트였구나. 이제 됐어."


"아빠! 3구! 한 번만 버텨. 더 뒤로 가요! 뒤로 뒤로 뒤로 뒤로!"


석민 형은 상대의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는 서브도 한 발 물러나 커트로 띄우고서 스매싱 수비를 했다. 그러고선 다가가 카운터 때릴 준비를 했다. 그렇게 점차 맞서게 되고 자신의 플레이가 살아나 마침내 3대 2의 스코어로 이겼다. 게임이 끝나자 행규가 "초래이~!"라고 여운이 이어지게 아주 길고 크게 외쳤다. 뒤이어 아빠품에 안기는 아들의 모습. 석민 형이 행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뭉클했다. 아빠와 아들의 협력 플레이. 아빠에게 있어서 아들은 훌륭한 감독이자 조언자였다. 선희 씨는 음료와 기타 먹거리를 싸 들고 대회가 열리던 장소에서 종일 응원했다. 그날 선희 씨는 내게도 응원을 보내주었다. 고마웠다. 


"엄마 어디 갔어?"라고 아빠가 물으면 딸이, 


"탁구장 갔어"라고 답한다.


"아빠는 오늘 비번이잖아, 아침부터 어디 갔어?"라고 엄마가 물으면 딸이,


"탁구장 갔어"라고 답한다.


"뭐야? 방에 행규가 없잖아. 이놈의 자식 외박한 거 아니야?"라고 엄마 아빠가 물으면 딸이,


"탁구장 갔어"라고 답한다.


그러면 쏜살같이 탁구장으로 달려가 하루 중 가족을 처음 만나는 아침이 시작된다. 탁구장에서 평소 시큰둥해 보이던 부부, 부자, 모자의 모습. 가족의 모습이란.

.

.

.

지금 탁구장으로 복귀하기 전, 

내가 멀리 지하 작은 탁구장에 갇혀 있던 중 선희 씨 가족이 그곳에 온 적이 있다. 지하 탁구장 주인과의 친분 때문에 잠시 방문한 거였는데 우연히 나를 만난 것이다. 선희 씨는 


"왜 여기서 이러고 계세요? 빨리 사람 많은 곳으로 복귀하세요. 살이 좀 찐 거 같은데 어서 오세요"


라고 말해주었다. 

 

구장 리그전 직후, 선희 씨가 한 말.


"다 봤어요. 나한테 이기고 혜리랑 하이파이브하던 거."


뜨끔했다. 

머쓱합니다. 우리는 구장 내 같이 발전하는 영원한 라이벌. 라이벌이 있어서 탁구장 오는 게 즐겁습니다. 나는 오늘도 웃으며 선희 씨에게 한게임, 부탁합니다, 라고 고개 숙여 청한다. 



형님에게 덕담을 듣고 행규를 피하면서 탁구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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